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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가짜”…’친일파 꿀꿀이’ 소리는 이젠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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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놀랐다. 지난 6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38호 머리기사를 보고서 수많은 독자들이 댓글로 ‘한국 언론에서 어떻게 이런 제목이 실릴 수가 있느냐’며 질타했다.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광화문에서 열렸다면….” 이 제목에 독자들이 깜짝 놀란 것이다. (☞관련 기사 :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광화문에서 열렸다면…”)

기자도 놀랐다. 독자들 댓글의 상당수가 “김일성은 가짜다” 유였기 때문이다. 1950~60년대에 유포된 이런 허황된 얘기를 아직도 믿는 이들이 상당수니, 이것이야말로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지금 새삼 ‘김일성 가짜설’이 왜 가짜인지 다시 한 번 짚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김일성 가짜설’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황된 주장이라는 사실은 이미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가 <대한민국사>(전4권, 한겨레출판 펴냄)에서 꼼꼼히 짚었다. 그래서 아래의 내용도 <대한민국사> 두 번째 권 3부(김일성이 가짜라고?)에 실린 내용에 의존한다.

‘김일성 가짜설’, 친일파가 원조!

1946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당시 34세의 김일성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만주를 누비는 독립운동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김일성 장군’은 백발을 휘날리는 노장군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김일성은 너무나 젊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김일성 가짜설이 시작된다. 북쪽의 김일성은 독립운동가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빌려 쓴 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런 주장을 처음 제기한 책은 1945년의 <해방 전후의 조선 진상>, 1950년의 <김일성 위조사> 등이다. 그렇다면, 이런 책들의 저자는 누구인가?

<해방 전후의 조선 진상>의 저자 중 한 사람인 김동운은 만주의 봉천 일본영사관 소속의 고등계 형사였다. 또 다른 저자인 김종범은 친일파 지주들의 근거지였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의 간부였다. <김일성 위조사>를 펴낸 이북도 일제 강점기에 도쿄에서 아세아민족연구소라는 친일 단체를 운영했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타도동지회 회장으로 변신한 친일파다.

처음 김일성 가짜설을 유포한 이들은 이처럼 친일파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이었다. 이들이 분단 상황에서 북쪽의 김일성을 깎아내리고자 유포한 거짓말이 수십 년 동안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 “김일성은 가짜다”라고 당당히 댓글을 다는 이들은 그것이 해방 후 궁지에 몰렸던 친일파의 거짓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까?

26세에 항일 유격대 지휘관을?

김일성이 민족적 항일 영웅으로 부각한 사건은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보천보 사건’이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전에 만주의 조선인 유격대가 함경남도 국경 지대의 면사무소 소재지(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를 습격한 이 사건은 김일성을 ‘스타 독립운동가’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26세에 불과했다.

여기서 잠깐 김일성의 나이를 둘러싼 의혹부터 살펴보자. “어떻게 26세의 나이에 유격대의 지휘관이 될 수 있겠어?” 하고 묻는 독자라면, 일제 강점기 당시 상황을 살펴야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26세는 전혀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안중근, 김좌진, 윤봉길, 이재유 등 당대의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1920년 ‘청산리 대첩’의 영웅이었던 김좌진 장군도 당시 나이 31세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 장교를 상대로 폭탄을 투척할 때의 나이는 고작 24세였다. 해방 이전 국내에 거점을 둔 마지막 독립운동 조직을 이끌었던 이재유는 어떤가? 그의 첫 옥살이는 25세 때였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김일성이 26세에 항일 유격대의 지휘관이었던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일본군의 혹독한 탄압에 맞서서 평소에는 이 산 저 산, 이 마을 저 마을 숨어 다니며,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 유격 작전에 백마 탄 노장군이 가당키나 한가?

보천보 전투는 없었다?

독자의 댓글 중 일부는 김일성을 유명하게 만든 보천보 사건에 토를 단다. 맞다. 실제로 이북이 자랑하는 이 “위대한” 전투의 실상은 보잘 것 없었다. 6월 4일 당일의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군이나 경찰은 한 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당시 일본군이 200만 명에 달했던 것을 고려하면 보천보 사건은 ‘전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보천보 사건으로 김일성은 항일 영웅으로 떠올랐을까? 이 사건이 일어난 1937년은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이 위축되던 상황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만주의 독립군이 국경을 넘어서 일본군을 타격한 것이다. 승리에 목말라하던 당시의 조선 민중에게는 청량제 같은 소식이었다.

더구나 국경에서 일어난 이 보천보 사건이 전국으로 퍼지게 된 데는 <동아일보>의 공이 컸다. 당시 <동아일보>는 두 차례나 호외를 발행하면서 이 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공비들의 살인, 방화, 약탈”을 보도한 이 신문의 호외를 받아본 조선 민중은 흥분했다. ‘아, 독립군이 드디어 일본군을 박살냈구나!’

1998년 10월 김병관 당시 사장 등 <동아일보> 방북 취재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물로 준 것이 바로 보천보 사건의 기사를 보도한 이 호외를 황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동아일보> 측도 김일성의 명성을 퍼뜨리는데 자신이 기여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당시 <동아일보>에서 보천보 사건 보도로 활약한 양일천은 김일성이 국내로 조국광복회 조직을 확대할 때 손을 잡은 천도교 지도자 박인진의 제자였다. 당시 양일천은 <삼천리> 1937년 10월호에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었던 대지주 김정부의 말을 빌려서 김일성에게 호의적인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 내용의 일부는 이렇다.

“후리후리한 키, 우락부락한 말소리, 음성을 보아 고향은 평안도인 듯, 예상보다 연령은 너무나 젊은 혈기방장의 30 미만의 청년. 그는 만주어에 정통, 어데까지 대장이란 표적이 없고 복장, 식음에까지 하졸과 한 가지로 기거를 같이하며 감고를 같이 하는데 그 감화력과 포용력이 있는 듯하게 보였다.”

독립운동가 김일성 vs 독재자 김일성

한홍구 교수는 보천보 사건의 여파를 이렇게 정리한다.

“보천보 전투 이후 갑산 지방에 널리 퍼진 노래에 ‘순사 돼지 꿀꿀’이란 것이 있다. 유격대의 기습에 혼비백산한 일본 경찰 하나가 돼지우리에 숨었고, 유격대가 퇴각한 뒤에 마을 주민들이 다가가도 겁에 질린 채 돼지인 척 꿀꿀됐다는 것을 풍자한 노래이다. (…) 보천보 사건 이후 순사들은 유격대를 겁내 밤에는 나다니지도 못했다.

(…) 일본 경찰이 김일성 부대가 공격해 오자 돼지우리에 숨어 돼지처럼 꿀꿀거렸다는 이야기를 통해 농민들은 일제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떨칠 수 있었고, 세상의 변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천보 사건 직후 조국광복회나 조선민족해방동맹이 국경 산악 지대에서 놀라울 정도로 급속하게 조직을 확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애초 ‘프레시안 books’ 머리기사의 제목은 김일성을 미화,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김일성 역시 분단 정부 수립에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서울에서 김일성 환영 대회 한 번 했다고 ‘빨갱이’ 손에 한반도가 넘어가리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야말로 해방 직후 좌파의 역량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 아닌가?

더구나 분단 이후 수십 년간 있었던 대를 이은 김 씨 일가의 독재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남쪽의 독재와 마찬가지로 준엄한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일성이 일제 강점기에 했었던 보천보 전투와 같은 그의 독립운동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이북처럼 찬양 일색이어서야 곤란하겠지만, 1937년 보천보 사건을 <동아일보>를 보고서 알았다면, 그 순간 우리 모두 다 남몰래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김일성 장군 만세, 대한 독립 만세!”


 


<프레시안> ,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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