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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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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쏘베차의 백서농장에서 농사일을 하며 군사훈련을 받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모습. 현재 신흥무관학교와 관련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진이다.


한일 강제병합 1년 전인 1909년 봄, 독립운동가 양기탁의 서울 집에서 신민회 간부들의 비밀회의가 열렸다. 이동녕, 주진수, 안태국, 이승훈, 김도희, 김구 등이 모인 이날 회의 안건은 ‘해외 독립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이미 독립운동가들은 나라 밖에서의 독립운동, 특히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신민회를 중심으로 1911년 서간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3500여명의 독립군을 배출하며 국외 무장 독립투쟁의 대표적인 산실이 됐다.


이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년을 맞아 기념사업회(www.sh100th.org)가 13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학술회의를 연다. 설립 주역 중 한 명인 우당 이회영 일가나 만주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사안마다 산발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신흥무관학교 자체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조강연을 맡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의 주요 방략(정책)이었던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한다.














이역만리에서 변변한 자원도 없이 맨손으로 농장을 개간하는 등 간난신고를 겪어야 했지만, 항일 무장투쟁의 근거지로서 신흥무관학교는 그 위상이 높았다.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은 15살 때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만주지역의 독립군 항일투쟁에 폭넓게 참여했으며,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서로군정서의 간부들도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또한 우당 이회영 일가 등 구한말 사회지도층들이 가산을 털어 신흥무관학교를 뒷받침했던 것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꼽힌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대한제국 때의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의 관련성을 짚고, 윤경로 한성대 교수는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역사적 맥락을 살필 예정이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신흥무관학교 이후 독립군 간부 양성을 살핀다. 무엇보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군맥’의 계승 문제다. “신흥무관학교가 전신이고 육군사관학교가 후신이라고 보는 시각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우려가 있는데다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육군사관학교 창설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성이 낮다.”


군사(軍史) 연구자인 한용원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는 ‘대한민국국군의 창설과 신흥무관학교의 정통성 계승’ 발표문을 통해 신흥무관학교의 정통성을 잇는 문제에 대한 국군 일각의 주장을 소개한다. 그리고 “정통성 판별기준을 잘못 적용한데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역할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한 교수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보는 사관이 민족사관, 식민사관, 민중사관 등 3가지 관점으로 나눠지는 것처럼, 국군사를 보는 시각도 광복군모체론, 경비대모체론, 미제용병론 등 3가지로 나눠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가운데에서도 미군정 때 만들어진 경비대를 국군의 기원으로 보는 경비대모체론이 많이 퍼져 있는데, 이는 경비대 창설에 주역을 담당했던 군사영어학교 출신 등이 군의 수뇌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도했던 독립군이 광복군 창설 뒤 광복군에 편입되어 임정 산하의 통합된 국군이 되었으므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국군 역시 이런 군맥을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특히 국군 창설 전 ‘창군운동’ 과정에서 “광복군을 모체로 국군을 편성해야 한다”는 명분론을 폈던 ‘참전동지회’ 등의 중견층 세력이 있었고, 이들이 창군 앞뒤로 국군에 대거 몸담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범석 국방장관, 김원봉 중앙육군군관학교장, 송호성 경비대총사령관 등 광복군 출신 인사들이 국군 창설 때 주요 간부를 맡기도 했다. 이런 사실들은 독립군-광복군-국군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이 한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뒤 반공세력이 득세하고 항일세력이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국군의 광복군 정통성 계승 노력이 약화되거나 변질됐고, 쿠데타로 등장한 구군부·신군부가 국군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더욱 훼손시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 교수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배로부터 광복한 우리는 역사적 정통성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된 독립군의 활동에서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이번 학술회의를 시작으로 현지 답사 등의 각종 행사를 통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서 신흥무관학교를 지속적으로 조명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11.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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