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인 현창석(玄昌碩·1922∼1971) 선생은 일본 유학 중에 항일결사 우리조선독립그룹의 주도적 역할을 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일본 도쿄 전수대학에 재학 중이던 1940년 9월에 박인석(朴寅錫)·채용석(蔡用錫) 등과 일제의 부당한 식민통치에 항거하기로 결의한다. 동급생 정종락(鄭鍾樂)·김원식(金源植)·권오황(權五煌) 등을 동지로 규합한 뒤 1941년 11월 항일결사 우리조선독립그룹을 결성했다. 고향인 공주 지역에도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일본 내 주요 건물 파괴와 식량창고 방화, 수도와 도로 파괴 등으로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활동하다 1943년 9월에 체포된 뒤 이듬해 3월에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경찰은 현창석 선생이 모진 고문에도 조직원들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자 한국에 사는 그의 어머니를 일본으로 연행해 그가 보는 앞에서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모진 고문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기홍 논설위원 |
현창석 선생 부부의 집안은 공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이었다. 공주 지역에서 자기 땅만 밟고 다닌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공주 갑부 김갑순도 부럽지 않다고 했다. 일본으로 유학간 뒤 독립운동을 시작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 위해 재산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몰래 고향으로 돌아와 돈을 챙겨 떠나곤 했다. 광복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아픈 몸을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남아 있는 재산은 거의 없었다.
부부의 말년은 궁핍 그 자체였다. 슬하에 4남4녀를 두었다. 부인은 자식들을 건사하기도 어려운 형편에 공주 버스터미널 앞에서 포장마차를 하며 번 돈으로 부랑아들과 장애인들을 돌보다 콜레라에 걸려 1969년 사망했다. 2년 뒤 현창석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초라했다. 어린 자식들이 아버지 시신을 우마차에 실어 겨우 장례를 치렀다. 부모를 여의고 기댈 곳조차 변변치 않은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무작성 상경했다. 이후 이들이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바보다”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일본의 대학으로 유학까지 갈 정도의 엘리트였으면 대서방이라도 해서 돈을 벌면서 잘살았을 텐데 선택을 잘못해 자식들을 고생시킨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가 창피했다. 아버지의 과거를 숨겨야 하는 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부 도움이라도 받아볼 요량으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다가 취소한 일도 있었다. 경찰이 찾아와 아버지 얘기를 꼬치꼬치 캐묻자 아버지의 ‘죄’가 드러날까 잔뜩 겁을 먹었다. 그때 아버지가 생전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독립운동 관련 자료 보따리도 태워 버렸다.
여섯째인 석산(51)씨에게 ‘일본군 장교 복장’은 아버지와 대비되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서울 홍제동에 살고 있던 초등학교 시절. 전파사를 운영하고 있던 큰형을 따라 동네 어느 집에 TV 안테나를 달아주러 지붕 위로 올라갔다가 마침 그 집 주인이 일본군 장교 옷을 입고 떠들썩하게 생일잔치를 벌이는 현장을 목격하고 까닭없이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는 경험을 했다. 아버지 얘기를 하고 다닌 것은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 뒤였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받은 것은 1982년이었지만,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뒤부터였다고 했다.
이들의 고생담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항간의 속설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음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독립유공자 후손 10명 중 8명이 고졸 이하 학력자이고, 10명 중 6명은 직업이 없으며, 10명 중 6명이 자신의 생활·경제수준이 ‘하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독립유공자 유족실태 설문조사’ 결과가 공개됐었다. 2004년 조사였다. 7년이 지난 지금, 대를 이어 가난에 시달리며 어렵게 살아가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형편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김기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