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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전 하자마자 위안부 모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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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5일 일본은 패전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종전'(패전의 일본식 표현)을 전하는 히로히토 일왕의 ‘옥음방송’은 일본인에게 8.15를 이야기할 때 가장 쉽게 떠올리는 연상어중 하나이다. 당시 방송을 접하고 그 감상을 기록한 수많은 일기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눈물이다.






“천황폐하의 목소리는 녹음된 것이었는데 전쟁을 종결한다는 조서다.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이 쏟아지는 눈물은 대체 무슨 눈물인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작가 우치다 핫켄·56살)

“전쟁중이라 고장 난 라디오를 고칠 수가 없었다. 소리가 작아 듣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내 눈물은 수돗물을 틀어 놓은 것처럼 흘러내려 멈출 수가 없었다.”(작가 히로쓰 가즈오·53)

“정오, 기미가요의 연주에 이어서 폐하의 방송을 경청하였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 멈출 줄 몰랐다.”(실업가 고바야시 이치조·72)

< 아사히신문 > 가 다음날인 16일 일왕의 옥음방송을 전하는 보도태도는 전시와 다름없이 선동적이었다.

“오늘도 내일도 국민들은 계속 모여들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천황을 찬양하는 노래를 계속 부를 것이다. 민중의 목소리다. 그분의 마음을 받들어 고난의 생활에 돌진할 것이라는 민초의 소리다. 일본 민족은 패배하지 않았다.”

일왕은 항복을 선언했지만 일본 본토에 당시 육군 225만명, 해군 125만명이 있으니 일 해군이 힘을 합쳐 특공기 6천기를 이용해 결사항전을 할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은 대다수 일본국민들의 마음을 < 아사히신문 > 은 대변하는 것이었다. 전쟁 당시 ‘일억 옥쇄’를 운운하며 수많은 전쟁터에서 항복을 치욕으로 알고 무모할만큼 미군과 연합군을 상대로 결사항전의 전쟁을 수행해온 일본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8월28일 연합군 선발대가 가나가와현 아쓰가 비행장을 통해 일본에 상륙할 때까지 일본 본토에서 ‘1억옥쇄’의 정신으로 결사항전의 분위기에 충만했는가? 패전을 맞은 일본의 자세는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힘있는 자에게 순응적인 일본답게 철저하게 질서정연하게 연합군을 맞이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다.

항복 선언 이틀 뒤인 8월17일 ‘일본군의 대원수’인 일왕으로부터 일본 육해군을 무기를 버리고 더 이상 저항하지 말라는 무장해제 명령 한마디에 일본 군대는 그대로 해산했다. 일본 우파학자들은 히로히토 일왕이 전쟁 개시를 원치 않았으며, 하루라도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히로히토·일본군부 수뇌부의 전후 처리 주요 관심사는 ‘천황제 수호’였으며, 연합군의 점령정책에 순응적인 것도 철저히 이를 위한 것이었다는 게 일본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옛 대본영(일본군의 전쟁수행 지도본부)의 육해군 수뇌부는 점령군이 일본 본토에 주둔하러 왔을 때 일본군을 해산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사전에 그들을 모두 무장해제 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일본은 또한번의 놀라운 변신을 시도했다. 논픽션 작가인 한도 가즈토시는 70만권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 저서 < 쇼와사 > (쇼와는 히로히토 일왕의 연호)에서 “변신의 좋은 예(실은 가장 나쁜 예지만)를 하나 소개하겠다”면서 연합군의 본토 진주를 맞이해 내무성이 18일 발표한 책략을 예로 들었다.


“전쟁에 패배하면 여성이 미국인의 첩이 될 각오를 해두라는, 수없이 들어왔던 악의적인 선전대책을 지도층이 진지하게 고민한 것같습니다. 양가집 규수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그 방파제 역할을 하기 위해 진주군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른바 특수위안시설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급하게 특수위안시설협회(RAA)가 만들어져 바로 위안부를 모집합니다.”


실제 일본 내무성 하시모토 마사미 경보국장은 18일 각부, 현의 장관(당시는 부와현의 지사를 장관이라고 지칭)에게 점령군을 위한 서비스 걸을 모집한다는 지령을 내렸고, 그 명령을 받은 경찰서장이 각종 수단을 써서 ‘국가를 위해 매춘을 알선해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한도는 “매춘을 단속해야 할 위치에 있는 경찰이 매춘을 해달라고 부탁하며 돌아다녔던 것은 일본에서는 처음 일어난 경우”라면서 “기본에 깔려 있는 것은 승리자에게 영합하려는 마음이나 더 이상 비굴하고 한심할 수는 없는 것같다. 패배한 인간의 한심스런 자세가 한순간에 훤히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적었다.


특수위안시설은 1946년1월21일 당시 프랑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의 반대와 성병 만연 등의 이유로 점령군사령부가 폐지를 명령할 때까지 도쿄에서 30곳 이상, 일본 전역에서 7만 여명의 여성이 종사했다고 한다. 일본 당국은 처음에는 일의 내용을 자세히 알리지 않은 채 “신 일본여성 모집, 숙소, 의복, 식료품 모두 지급”이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긴자 등 유흥가에 내붙이거나 신문광고를 내어 여성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하는 일의 내용을 알고 발길을 여성들이 많았으나 전쟁 직후라 살아갈 방법이 없는 여성들이 많아서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 마이니치신문 > 이 발행하는 주간지 < 선데이 마이니치 > 는 1974년 9월1일호에서 당시 특수위안시설협회의 이사였던 야마시타 시게루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케다씨가 ‘얼마나 필요한가’라고 질문을 하자 노모토씨(협회 부이사장)은 ‘1억정도 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이케다씨는 ‘1억으로 순결을 지킬 수 있다면 싸다고 할 수 있군’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한 ‘순결’이란 평범한 일본 여성의 순결을 뜻한다. 그리고 이케다는 당시 대장성 주세국장이었고, 나중에 총리가 된 이케다 하야토이다.

위안시설은 연합군의 본토 상륙날인 27일 도쿄 오타구의 오모리에서 문을 연다. 그날 도쿄에 오는 점령군은 불과 몇명 안됐는데 그들이 왔을때 제대로 수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며 1360명의 위안부를 모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연합군 1진이 곧장 위안시설로 달려갈 거라곤 도저히 생각하기 힘듭니다. 그토록 강한 근성을 가지고 싸운 일본인이 패배하자마자 지나칠 정도로 고분고분해졌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일본민족에게는 신용할 수 없는 구석이 있는 것같습니다. 어느쪽이든 큰 힘에 의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 소와사 > 는 전쟁만이 살길이라며 일본 국민을 승산없는 전쟁터로 내몬 일본 군부 지도자들의 종전 뒤 재빠른 변신도 자세히 기록했다. 만주사변(1931년9월18일) 을 일으킨 주범으로 일본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폭주하게 만든 가장 큰 책임자중 한명인 전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간지(1889~1949년)는 연합군 1진이 진주한 다음날 8월29일치 < 요미우리호치신문 > 과 인터뷰에서 “전쟁에 패한 이상 군은 깨끗하게 유종의 미를 거두어 군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우리야말로 평화의 선진국이라고 자랑하면서 세계의 여론과 마주하고 싶다. 국군에게 향해 있던 열의를 뒤지지 않도록 앞으로 과학, 문화, 산업의 향상을 향해, 그리고 조국의 재건을 향해 용감하게 매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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