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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 칼럼] 저승길조차 편치 않았던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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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길조차 편치 않았던 ‘회장님’ (김효순 한겨레신문 대기자)


해장국집들이 늘어선 서울 종로구 청진동 골목에 있는 한 다방에서 매달 한 번씩 모이는 노인들이 있다. 모임의 이름은 ‘삭풍회’다. 본지에 관련 기사가 여러 차례 나갔으니 이들의 사연을 기억하는 독자들도 제법 있을 것이다. 일제 말기 징병으로 끌려가 만주나 쿠릴열도 쪽으로 배치됐다가 전후 소련군 포로가 돼 3~4년씩 시베리아에서 억류됐던 사람들이다. 강제노역, 극심한 추위, 굶주림을 견디며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귀국한 뒤에는 적성국가에서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가혹한 조사를 받고 오랜 기간 요시찰 대상에 묶여 있었다.

추석 연휴 마지막날 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삭풍회 모임을 이끌던 이병주씨가 세상을 떠난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랜 기간 모임의 회장을 맡아 한국, 일본,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고독한 투쟁을 벌이다 쓰러져 와병중에 있던 분이다. 허겁지겁 회사로 나와 몇 군데 전화를 해서 사실을 확인하고는 급히 부음기사를 썼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이 일본 언론매체에는 보도되고, 국내 언론에는 한 줄도 언급되지 않는 상황을 무엇보다도 피하고 싶었다.



▲故 이병주 회장의 빈소 모습.


숨죽이며 살던 시베리아억류 피해자들이 명예회복과 배상을 요구하며 공개적으로 활동에 들어간 것은 1990년 한국과 소련이 국교를 맺은 후의 일이다. 초창기 삭풍회는 금풍실업 회장이었던 김규태, 러시아문학자로 한국외대와 고려대 교수를 지낸 동완이 회장을 차례로 맡아 이끌었다. 이병주는 삭풍회 모임에 늦게 합류했으나 5대 회장을 맡아 대외활동을 정력적으로 벌였다. 일본인 억류피해자들과 함께 일본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거나 러시아에서 열린 국제회의 등에 참석해 한국인 피해자들의 기막힌 처지를 호소하며 여론을 환기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의 빈소의 특이한 점이라면 일본인 명의의 조화가 많았다는 것을 꼽아야겠다. 곤노 아즈마 참의원 의원을 비롯해 전·현직 국회의원 몇 사람이 조화를 보냈고, 한국인 전후보상 재판을 현지에서 지원했던 일본 시민단체의 조화도 여럿 눈에 띄었다. 서울 주재 엔에이치케이 특파원이 보낸 조화도 있었다. 그는 빈소를 찾아와 직접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2009년 2월 27일 시베리아 억류 귀환 60주년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 주관으로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관련 전시회장에서 생활을 설명하는 이병주 시베리아삭풍회 회장과 이를 경청하고 있는 곤노 아즈마 일본 민주당 의원


하지만 우리 정부의 실무 책임자나 현직 국회의원은 아무도 빈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정치인으로는 진보신당 대표를 지낸 노회찬 전 의원이 유일하게 조문을 했다. 얼마 전 독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초병 근무를 자처하거나, 현지에서 회의를 하겠다고 법석대던 여야 지도부는 중요한 국사를 다루느라 정신이 없었던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물론이고 보좌하는 사람들조차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친일청산 문제의 중요성을 끈질기게 제기해온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등 시민단체 간부들이 ‘회장님’의 분투를 회고하며 빈소의 적막함을 덜어주었다.

생전에 고인은 군번이 3개나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일본군, 카투사, 한국 육군장교 군번이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고인은 6·25 때 부산에서 동아대학교에 편입해 다니다가 학도병 지원을 했다. 1600명의 일행과 함께 큰 여객선을 타고 요코하마로 이동해 훈련을 받은 뒤 미 1군단 직속 통신대대에 배속됐다. 나중에 미군 장교의 추천으로 경주에 있던 예비사관학교에 들어가 소위로 임관해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래서 죽으면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있었다.

빈소에서 유족들로부터 기막힌 사연을 들었다. 별세한 날 바로 안장 신청을 했더니, 현충원 심사과에서 1949년에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은 기록이 있어 관련기관에 더 조회를 해봐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고는 발인 전날 오후 늦게까지 계속 심사중이라고만 해 유족들의 애간장을 태웠다는 것이다. 1949년은 억류됐던 피해자들이 생고생을 마치고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온 해이다. 결국 무사히 장례를 마쳤지만, 가당치도 않은 60여년 전의 꼬리표가 마지막까지 따라다닌 것이다. 군대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처럼 식민통치의 피해자들이 잇따라 세상을 뜨고 정치권은 무심하기 짝이 없는 답답한 상황을 언제까지 봐야 하나? <한겨레 신문,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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