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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호, 박원순 검증하려면 공부 좀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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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호, 박원순 검증하려면 공부 좀 해라”


[기고] 피해자 심정 안다면 역사의 비극을 함부로 이용 못할텐데…


 


한나라당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 선대위 ‘전’ 대변인인 신지호 의원이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작은 할아버지 강제 징용은 역사적으로 허구”라고 주장한데 대해 <프레시안>은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등이 조사한 실태를 근거로 신 의원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도했다.


신 의원의 이같은 주장은 나경원 후보 측이 제기하고 있는 박원순 야권단일후보의 ‘보충역’ 판정 의혹 공세에 대한 측면 지원으로 보이지만, 근거는 현저히 부족하다. 오히려 나경원 후보의 자위대 50주년 창립 기념 행사 참석 관련 해명이 거짓으로 드러난 것과 겹쳐 한나라당의 ‘친일파 옹호’ 이미지만 강화시키고 있다.


관련해 <프레시안>은 민족문제연구소에도 신 의원의 주장에 대한 의견을 구했었다. 이에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이 신 의원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프레시안>은 양해를 구하고 김 연구위원의 글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주)


 


신지호의원의 어설픈 공격


김민철(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며칠 전 음주방송으로 사고를 친 뉴라이트 출신의 한나라당 신지호의원이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애쓰다가 마침내 건수 하나를 잡았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작은 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는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는 기업체 모집, 1942년부터 1943년까지는 조선총독부 알선, 1944년부터는 강제징용 형식이었다”면서 “박 후보의 할아버지가 1941년에 징용영장을 받았다는 것은 거짓 주장이며, 작은할아버지가 사할린으로 갔다면 모집에 응해서 간 것이지 형의 징용영장을 대신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박 후보의 입양이 형제의 병역면탈을 노린 `반(反)사회적 호적쪼개기’였음이 명백해 졌다”고 열을 냈다.

‘모집’ ‘알선’ ‘징용’이라는 전문용어까지 동원한 것을 보면 꽤나 신경을 써서 건수를 올린 것 같다. 그런데 어쩌나 그게 건수가 되지 못함을! 그가 겨냥한 화살이 영 과녁을 잘못 겨냥하고 있으니 말이다. 왜 틀렸는지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다.











▲신지호 의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 만든 친일 관련 과거사 위원회 통폐합에 관심이 많았다. 위 화면은 신 의원이 대표발의한 ‘대일항쟁기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설명한 신 의원 홈페이지 캡쳐다. 이 법안을 통해 일제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와 태평양전쟁전후국외강제동원희생자지원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들어 ‘효율성이 없다’는 이유로 관련 피해자들의 반발 속에 통폐합됐다. 물론 이 법안 역시 38년부터 45년까지 자행된 일제의 조선인 강제 징용은 인정하고 있다.


첫째, 일반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제징용은 모집, 알선, 징용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지, 전문적으로 구별해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다. 이 말은 일반 사람들 속에는 모집, 알선, 징용 모두가 강제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강제성에 차이가 조금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강제징용이라는 말은 틀렸다. 징용은 징용일 뿐이지 앞에 ‘강제’라는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징용 그 자체가 ‘징용령’으로 규정한 강제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치 지금의 군 입대처럼 그것을 거부하면 일부 특권층을 제외하면 예외 없이 감옥에 가야하기 때문에 강제니 아니니 하는 수식어를 붙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일반사람들은 강제징용이라는 말을 쓴다. 즉 자발성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부르고 있으며, 이 강제징용에는 1939년부터의 모집까지 포함되어 있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하면 일제의 노동력 강제동원은 모집→알선→징용으로 발전했으며, 한국정부는 이들 모두를 강제동원피해자로 인정하고 있다. 본인이 한 때 없애려고 혈안이 됐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에서도 모집, 알선, 징용을 모두 강제동원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음을 벌써 잊어먹었는가. 국가기구가 법으로 정해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있는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정치공세를 하고 있어, 강제동원 피해자의 권리 회복운동을 지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매우 불쾌하다. 어쩌면 알고서도 트집잡기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피해자와 유족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역사의 비극을 함부로 정치공세에 동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그래도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모집이 강제라 해도 형을 대신해서 간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그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당시의 일기를 통해 확인해보자.

『정강일기』라는 한 유생의 일기에 따르면, 1941년부터 북한지역 공사, 일본 공장, 남양 등지의 ‘역부 모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되는 기사가 자주 나온다. 1943년에는 면리원들이 마을을 수색해서 공장에서 일할 만한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사람을 ‘마치 죄인 다루듯이’ 잡아갔다. 월 평균 1회로 모집이 강제되자 관지리 마을 주민들은 제비뽑기를 해서 대상자를 선정해서 대응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선정된 청년이 도망하기 때문에 면리원들이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연령 해당자면 무조건 잡아갔다. 쉽게 말해 모집 단계에서 신청자가 적자 그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마을별로 강제로 인력을 동원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선순위는 자연히 돈 없거나 ‘빽’ 없는 농민들부터였다.

그리고 1941년 이후 전쟁이 태평양으로까지 확대되자 일제는 부족해진 군사력과 노동력을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강제동원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조선인들은 도망하거나 집안을 이을 장남 대신 차남이나 삼남이 대신 동원되는 현상이 일반적으로 일어났다. 이 일기의 주인공도 장남에게 징용령이 떨어졌으나 피신하는 바람에 주재소에서 직접 동생을 강제동원하는 형태로 머리수를 채웠다. 이걸 피하기 위해 가족 전체가 피신하는 내용도 심심찮게 나온다.

이것이 현재 학계가 이해하고 있는 일제 말기 강제동원의 실태이자 역사적 사실이다. 요약하면, 1) 1941년의 모집도 법률상으로나 실체상으로나 강제동원에 해당하며, 일반인들은 통칭해서 ‘징용’으로 부르고 있으며, 2) 강제동원의 대상이 된 사람을 대신해서 동생이 동원된 사례는 당시 흔히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호적쪼개기’니 하는 천박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 근대사의 비극이 반영되어 있다.

검증을 하려면 좀 더 공부를 한 뒤 검증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하기야 일단 저질러 놓고 보면 된다는 것이 저들의 기본심성이니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도 무리이긴 하다.(프레시안, 10.11)





 

[관련기사]


▶”신지호, 박원순 검증하려면 공부 좀 해라”(프레시안,10.11)


▶ 신지호 `징용’ 주장 정부 입장과도 배치(연합뉴스,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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