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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선생1주기]진실담보 ‘실천하는 지성’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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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와 오늘 ‘지식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리영희 선생에게 지식인이란 우상 파괴자이고, 우상이란 평안도 말로 ‘어둑서니’라는 도깨비이다. 우리 시대의 낮도깨비는 밖으로는 미국과 일본 등 힘센 나라에 민족의 운명을 맡기는 외세 의존이고, 안으로는 친일파를 계승한 분단 독재체제의 옹호와 1%를 위한 국민 수탈 독점 세력이 날조해낸 일체의 가치관이다.


이러한 우상의 정체를 밝히려는 선생의 학문적 자세는 철저한 리얼리스트였다. 월남전의 진상을 파헤치면서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약한 나라를 어떻게 조리하는가를 자상하게 소개해 주는 대목에서 당장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어떨 것인가에 대한 정답을 유추할 수 있다. 총 한 방 안 쏘고 조용히 국제법망으로 찬찬히 동여매는 독거미의 기법은 이미 한미행정협정으로 익히 아는 바이다. 우리 땅에서 저지르는 미국 국적의 현행범을 우리 식으로 심판할 수 없는 법을 한·미우호라며, “오, 주여!”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크게 외치며 나라를 걱정하는 현상이 바로 낮도깨비에 홀린 증상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시선에는 한·미 FTA가 두 나라의 우애를 다지는 경제공동체로 보이겠지만 이 거미줄이 우리 민족의 경제적인 주권을 노예 상태로 몰아갈 것이라는 우려는 과장이 아니다.


 



▲2008년 3월 ‘독립언론 10년’을 기념한 경향신문 인터뷰 때 경기 군포시 산본 자택에서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리영희 선생. | 경향신문 자료사진


리영희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그 탁월한 영어실력으로 난삽한 한·미 FTA를 너무나 알기 쉽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설해 줄 텐데….


리얼리스트인 선생의 시선에는 항상 외형이 아닌 본질이 간파된다. 예컨대 박정희는 친일행적의 전과에다 민주주의를 말살시킨 쿠데타의 주모자라는 본질을 모든 평가의 우위에 세운다. 껍데기나 구호에 현혹당하는 걸 그는 지성으로 보지 않는다.


2008년 2월25일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는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실용정신은 동서양의 역사를 관통하는 합리적 원리이자, 세계화 물결을 헤쳐 나가는 데에 유효한 실천적 지혜입니다”라고 했다. 이 구절 때문에 이명박 정권 초기에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도 이미 다져진 민주화와 남북협력 등등은 ‘실용적’으로 승계될 것으로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생전에 리영희 선생은 모든 것이 수포화될 뿐만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사태가 연이을 것이라고 단호히 경고했다. ‘설마’ 하는 나의 의구심에 그는 모든 존재는 그 본질은 바꾸지 않는다는 변증법적인 인식론을 강조했고 두고두고 그 혜안은 적중하고 있다.


선생은 냉철하게 파악된 사실 그 자체를 글로 쓸 뿐만 아니라 실천하는 지성인이었다. 병석에 눕기 직전까지도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시위현장을 찾아 격려하거나 온전치 못한 팔로 쓴 비뚤비뚤한 글씨체의 격려문을 보내곤 했다. 그런 실천력이 때로는 도를 넘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청 자리에서 무엇이 가장 시급한 외교문제냐는 자문에 선뜻 미군 철수라고 응대하자 그 뒤에는 전혀 초청하지 않더라고 농조로 털어놓기도 했다.


실천력을 동반해야 이론은 공허함에서 벗어나 현실성을 갖추게 된다. 선생은 학문을 위한 학문에 의한 학문의 지식을 경계했다. “낱말 하나를 가지고 몇십 가지의 분열을 생산”해내는 이론투쟁은 예리한 지성이 아니라, “달팽이 뿔 위에서 서로 아웅다웅하는 분파경향”이라고 일갈하며, “우익은 이권분배의 크기에 따라 분열하고 좌익은 이념을 지나치게 정밀화·세밀화하는 ‘작음’의 고질적 아집 때문에 망한다”(<대화>에서 인용)고 엄중히 충고한다.


아는 지식을 다 동원하여 이것저것 두루 비판하는 실천력 없는 언어의 기관총소사형 지식인은 지성인이 아니다. 선생에게 지성인이란 민중과 역사와 진실이라는 당파성을 실천해야 하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존재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모 조폭매체에 등장한 김연아를 둘러싼 논쟁도 여기에 속한다. 별 의도가 없었다는 해명으로 끝내도 되지만, 등장 그 자체가 이미 낮도깨비에게 홀린 현상이기에 일침을 가하는 것은 앞으로 있을 조폭매체의 유혹에 대한 경고성 발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밖으로는 FTA, 안으로는 조폭언론이 이제 역사까지 날조해가며 1%를 위한 지배를 영구화하려고 갖은 추태를 다 부린다. 19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직선제에서 양김이 분열하여 군부 출신의 노태우씨가 집권하자 선생은 “절망감에 가까운 정신적 침체”에 빠졌다고 썼다. 시민의 투쟁으로 쟁취한 승리를 야권 정치인의 아집으로 역사를 후퇴시킨 과오가 이제 바로 오늘의 우리 앞에 다시 닥쳐오고 있다. 어떤 변명이나 논리도 MB를 비롯한 수구세력을 역사에서 퇴출시키기 위한 단일화에 지장을 주면 역사의 죄악이 됨을 지난 역사는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경향신문,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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