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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청산 제대로 했다면 한국교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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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초대 편찬위원장 이만열 지도위원

 

‘이만열 장로(숙명여대 명예교수)의 기독 청년들과 함께하는 역사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애초 30여 명으로 제한하려 했으나, “서서라도 강의를 꼭 듣고 싶다”며 의지를 불태운 수강 신청자들이 많아서 최종 마감 전 신청자까지 모두 받게 되었다. 첫 강의는 1월 5일 푸른역사 강의실에서 열렸는데, 가깝게는 광화문, 멀리는 파주에서 온 청년들까지 모두 60여 명이 강의 공간을 빼곡히 채웠다.


기독청년아카데미에서 이 장로의 강의는 처음이 아니다. 3년 전에 비슷한 강의를 열었지만, 이번처럼 큰 반응은 없었다. 수강 신청 초기부터 마치 강의 개설을 기다렸다는 듯이 등록이 폭주하고, 강의 문의가 쇄도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변화와 뜨거운 반응을 가져온 것일까?


강의 전 수강생들이 클럽에 올린 소개 글을 보면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여러 수강생은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 중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 대형 교회들의 부끄러운 모습들, 옳지 않은 사람들의 여러 행동을 보면서, 무엇부터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하는지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한지영, 직장인)”,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을 거라 본다. 그동안 교회가 달려온 길을 되짚어 볼 때라고 생각한다(조광희, 신학생)”, “진리가 한쪽으로 치우쳐 선포되고 성도들이 그것을 그대로 믿는 현실, 세상과 전혀 구분되지 않고 오히려 세속의 가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현실이 시급히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이하나, 주부)”며 강의에 대한 굵직한 기대를 밝혔다. 이처럼 직장인, 대학원생, 신학생, 목회자, 학자 등 하는 일은 다양했지만, 한국교회에 대한 문제 인식과 변화에 대한 갈증은 동일했다.



▲해방 후 한국 교회사 강의에는 기독 청년 60여 명이 모였다.

이에 단단히 부응하기로 작심한 듯 이 장로는 첫 시간부터 그야말로 살아 있는 교회사를 술술 풀어내 주었다. 마치 살가운 할아버지가 사랑스러운 손자 손녀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말랑말랑하게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으로 첫 강의가 진행되었다. 오랜 이야기를 회고할 때는 먼 산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하고, 첨예한 사건들을 다룰 때는 청년들의 눈을 직시하며 냉철한 기운을 내뿜으면서 뭔가를 심어 주려는 듯하였다. 때론 쓴소리를 아끼지 않으면서 2시간 30여 분의 긴 강의를 흔들림 없이 이어 갔다.



이번 강의는 이 장로가 깊게 관여한 책인 <한국기독교의 역사-3권>을 중심으로 해방 후 한국 교회사에 대한 내용을 시기와 주제별로 각각 다루는데, 이 장로는 “3권은 현재 살아 있는 사람도 많고, 매우 가까운 과거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쓰기가 어려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한 “이번에 실험적으로 이 책을 중심으로 청년들과 공부하는 것이다”며 강의에 대해 의미부여를 하였다. 첫 강의의 범위는 해방 후 한국교회의 재건 활동과 교회 내 일제 잔재 청산의 과제에 대한 것을 강조하였다.


먼저 해방 후에 하나의 교단을 위한 노력이 많았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점에 대해 아쉬워했다. 실제로 교회에서 학교, 병원, 문서(찬송가, 교단 신문) 등을 합치려는 작업이 활발했으나 본국 선교부가 반대하여 실패했다. 또한 “1945년 9월에 감리교가 가장 먼저 재건을 선언하자, 장로교도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의 기독교에서 이탈하여 분열하고자 하였다”며 교단 분열의 초기 역사를 평가했다.


특히 교단 분열의 시초가 되었던 1, 2차 남부대회에 대해서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다소 새로운 입장을 밝혔다. 왜냐하면 “오늘날 감리교와 장로교의 차이가 별로 없고, 1905년 일치된 교회를 만들려는 정신이 있었다는 전제하에 강제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했다면, 한국교회가 무질서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일제가 강제로 한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았다”는 전제를 확실히 붙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강조한 것은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의 문제였다. 이 장로는 “해방 후 한국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나? 그 시대의 요구에 얼마나 부응하느냐가 중요했지만, 한국 기독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며 한국 기독교의 민족사적 사명과 사회적 책임에 주목했다. 또한 “일제 시기에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이 큰 과제였다면, 45~60년까지의 민족사적 사명은 식민지 잔재 청산이 제일 중요했다”고 덧붙였다.


“철저한 신사참배 회개 운동을 비롯하여 친일, 부일 했던 인물들이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여야 했다. 제대로 청산했더라면 45년부터 우리 스스로 힘으로 한반도를 다스릴 수 있었고, 민주적인 국민 역량을 증대시킬 수도 있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영성도 제대로 일어났을 것이고, 한국 사회를 향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며 교회가 제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나아가 “군부 독재 시기에는 인권 및 민주화 운동으로, 70~80년대는 북한 돕기 운동으로, 이후 계속된 분단 시기에는 민족화해와 통일 운동으로 교회의 사명이 확장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두 가지 중점 외에 개인사적인 이야기와 보수 측의 무리한 행위에 대해 일침을 놓기도 했다. 예장 고신 측 출신인 이 장로는 학창 시절에 주일에는 버스를 타면 안 되어서 2~3km나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녀 교회에 갔던 일, 주일에 학교 공부도 하지 않아서 월요일에 시험이 있을 때 일찍 자고 자정 넘어 월요일이 되어서야 공부했던 일, 대학 시절 고적 답사를 주일에 가느라 한 번도 참가하지 못했던 일 등의 개인적인 신앙 경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장로는 이런 신앙생활에 대한 철저한 보수성이 “일생을 돌이켜 볼 때 많은 교훈과 인격 양성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고, “신앙생활에서 가장 근본은 주일을 어떻게 제대로 잘 지키느냐다”라며 주일 성수와 구별된 생활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명확한 기준과 확실한 근거 자료를 가지고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일도 자세하게 들려주었지만, 본인의 업적을 너무 과하게 강조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제하여 균형 감각을 잃지 않았다.



▲강의장 풍경

보수 측의 행위에 대해서 두 사례를 이야기하였는데, 첫째는 전광훈 목사로 대표되는 보수 목회자들의 무지다. 전광훈 목사가 어느 집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군을 ‘침략자’라고 발언했다며 비하하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던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 장로는 바로 대응하려 했으나, 정확한 사실 관계에 자신이 없어서 대응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침략자’가 아니라, ‘점령군’이라는 매우 역사적 근거가 확실한 발언을 한 것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아 이야기하면 ‘반미, 종북’이라며 무리하게 비판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이처럼 “식견이 넓고, 지식이 정확하면 순간순간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며 청년들에게 학적인 도전을 주었다.


두 번째는 현 정권의 인사 악습에 대한 재미있는 분석이었다. 정권 초기에 주요 단체장들은 대부분 병역 미필,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등의 부도덕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전력과 약점을 통치권자가 잡아 두고두고 이용하면서 함부로 대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것이다. 식민 치하와 해방 이후 미 군정 시기에 미군이 ‘친일’이라는 민족사적 약점을 볼모로 사람을 기용하고 조종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부터 우리나라가 비틀어진 것이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뼈아픈 분석도 잊지 않아서 마냥 재미있어할 수는 없었다.


이후 30여 분간 진행된 질의응답을 통해 수강생들의 실존적인 질문이 공유되기도 했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묻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 공세도 많았는데, 하나하나 차분하고 솔직하게 응답해 주면서, 수강생들의 잘못된 전제를 지적하기도 하고, 삼단논법이 쉽게 빠질 수 있는 논리적인 비약을 바로잡아 주기도 했다. 연륜과 깊은 학식이 없으면 가능하지 못할 법한 대답들이 첫 강의를 더욱 풍성하고 역동 차게 해 주었다. 질의응답까지 모두 마친 후 10여 명의 수강생은 뒤풀이 장소로 옮겨서 못다 한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기독청년아카데미의 강의는 강의 전 식사 교제와 강의 후 뒤풀이까지 참석해야 강의를 온전하게 듣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첫 강의는 자랑스럽고 떳떳한 사건들보다는,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많았고, 노 교수의 역사적 탄식이 청년들이 가슴에 오롯이 다가와 큰 울림을 선사한 시간이었다. 내용적으로는 한국교회의 재건 활동과 미 군정하에서 받은 큰 혜택을 맞물려 생각해 볼 수 있었고, 해방 이후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일제 청산 운동이 왜 안 되었는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음도 배웠다.




한편, 친일 문제 관련해서는 교회의 정체성을 지켜야 했다는 진보적 입장과 교회를 계속 유지했다는 보수적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히며, 이런 논점은 이후의 역사에도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엄밀하게 공부해야 함을 깨달았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역사적 과오를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희석하면서 합리화하려는 세력들, 그리고 불의로 정의를 억누르려는 자들이 횡행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추운 겨울날, 한국교회의 어두운 현실을 따뜻하게 밝힐 청년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인 것이 아닐까. (뉴스엔조이, 1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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