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친일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사,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인도 최초의 총리 네루가 독립 투쟁 시절 감옥에 갇혀 지내며 매일 어린 딸(훗날 인도의 수상 인디라 간디)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 ‘세계사 편력’에 실린 3·1 운동에 관한 내용. “3.1 운동은 조선 민족이 단결하여 자유와 독립을 찾으려고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일본 경찰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숭고한 독립운동이었다. 조선에서 대학을 갓 나온 젊은 여성과 소녀들이 학생 신분으로 투쟁에 참가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네가 듣는다면 틀림없이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 민족대표 33인은 국내 대표…또 다른 독립선언서들
흔히 3·1운동, 독립 선언하면 파고다 공원과 민족대표 33인을 대표격으로 떠올리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아는 민족대표 33인은 국내 대표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1919년 3월 1일을 전후하여 국내뿐 아니라 동경, 길림, 용정, 미국, 하와이, 시베리아, 대만, 상해 등 국내외에서 70여 종의 서로 다른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것으로 전해진다. 발견된 것은 20여 종 정도.
이 중에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도 있다. 1982년 일본정부의 비밀문서 속에서 일본어로 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순한글 원본이 1983년 11월 미국에 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 안수산 여사의 로스엔젤레스 자택에서 발견되었다. 발표된 곳은 중국 지린 – 길림(吉林)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 동포시여, (우리 여성도) 같은 국민, 같은 양심의 소유자이므로 주저함 없이 살아서는 독립기 아래서 활기 있는 새 국민이 되고 죽어서는 구천에서 수많은 선철을 찾아가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가는 의무이므로…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 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 동포시여 대한독립만세”
3·1운동과 관련된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찾아가 만나보자.
평안북도 선천지역의 만세운동을 이끈 차경신 선생. 차 선생은 일본 유학 중이던 1919년 2·8 독립선언운동에 참가한 뒤 ‘여성 독립운동의 대모’로 불리는 김마리아 선생과 함께 비밀리에 귀국해 고향 선천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고 신한청년단과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3·1 운동으로 체포령이 떨어지자 의주로 들어가 청년단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펴고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 투신, 안창호 선생을 도와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다.
마산의 최덕지 여사는 마산 의신여학교 고등과에 다니던 1919년 3월 13일 통영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나눠주며 민족주의운동에 뛰어들었고 조직적인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펼치다 4차례 옥살이를 했다. 옥에서도 단식 투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무장 투쟁에 나선 여성 독립투사들도 있다. 부산 동래 일신여학교(동래여고) 출신인 박차정 여사는 근우회, 의열단을 거치며 독립투쟁을 하다가 1939년 2월 장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1944년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순국했다. 1940년 9월 중국에서 창설된 광복군 490여 명 중 17명이 여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남자현 여사는 평범한 주부였다고 전해진다. 남편이 의병 투쟁에 나서 전사하자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훗날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까지 불리며 무장 투쟁에 참가했고 국제연맹의 조사단 앞에서 손가락을 잘라 ‘한국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쓰고 1925년에는 사이코 마코토 조선 총독부 총독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돼 고문 중 단식투쟁. 숨지기 직전 병보석으로 출옥해 하얼빈의 한 여관에서 사망. 숨질 때 남긴 한 마디는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 상식과 정의를 향한 기록
어제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18년 몸부림친 기록을 받아 살피다 보니 참 아프다. 제목부터 ‘상식과 정의를 향한 기록’이다. 우리 사회가 잘못된 역사 청산의 문제를 얼마나 비상식적으로 내팽개치고 외면했는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또 친일 세력이 득세하면서 일본 학자들이나 친일학자들에 의해 우리의 근대사 특히 독립운동사가 몹시 축소되고 왜곡됐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라도 밝혀내고 밝힌 것이 국민 모두에게 전파되도록 힘써야 한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친일인명사전 18년사-Collaborator Dictionary 18years from MinjokMovie on Vimeo.
재야 사학자 임종국 선생은 조지훈 선생의 제자로 자신의 온 생애와 재산을 친일연구와 친일 잔재 청산에 바쳐 1989년 11월 세상을 떴다. 1966년 발간한 친일문학론 친일에 대한 최초의 실증연구 저술 1,500부쯤 찍었는데 일본에서 1,000부는 사갔다고 한다. 그 저술의 역사적 가치를 일본 학자들이 먼저 알아본 것. 1976년 와세다 대학 오무라 마쓰오 교수가 일본어로 번역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선 친일의 세력들이 수구 기득권 층이 되고 정작 선생은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가도록 가난하게 살다 세상을 떴다.
임종국 선생의 유고에 실린 당부
“친일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과정이 없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민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독립선언서 공약 삼 장을 읽어보자.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하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 나라를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 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CBS 변상욱의 기자수첩,12.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