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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 등장한 근대식 호텔의 흥망사… ‘손탁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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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순우, <손탁호텔>, 하늘재, 2012





경성 시내에 서양인에 의한 근대식 숙박시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00년대 이후의 일이다. 팔레호텔, 임페리얼호텔, 스테이션호텔, 손탁호텔 등이 모두 1901∼1902년을 전후해 개업했다. 앞서 의료선교사이자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의 1884년 일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새로 지은 조선호텔에 투숙했는데 조선보빙사를 태우고 온 미국해군기함 트랜톤호의 장병들을 접객하기 위하여 마련된 호텔이었다.”

하지만 이 호텔이 접대용 객관(客館)이었는지 아니면 온전한 의미의 호텔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와 헐버트가 발행했던 월간 영문소식지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6년 7월호에도 다음과 같은 문안의 부동산 임대광고가 등장한다. “두 채의 말끔한 상업용 벽돌건물이 서울 유럽인 거주지의 공사관거리 맞은편에 건립되어 이제 막 사용할 찰나에 있습니다. 각각의 건물은 1층에 네 개의 큰 창고방과 2층에 두 개의 훌륭한 거실과 연회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사를 마치고 외국인의 입주를 기다립니다.”

근대개화기에 조선을 찾아온 숱한 여행가, 외교관, 선교사, 특파원, 탐험가, 기업가 등이 한결같이 조선에서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호소하는 대상은 주로 숙박시설이었을 것이다. 사실 구한말, 근대 호텔이 처음 등장한 곳은 인천 지역이다. 1880년대 이래 일본인 호리 큐타로가 운영한 인천의 대불호텔, 중국인 이태(怡泰)가 운영한 스튜어트호텔, 오스트리아계 헝가리인 스타인벡이 주인이었던 꼬레호텔 등이 그것이다. 서울에 서양식 호텔이 등장한 것은 인천에 비해 20년이나 뒤진다. 그 가운데서도 서울 정동 29번지에 위치했던 손탁호텔은 근대개화기의 격동을 우리와 함께 치러낸 역사적 공간이다.

흔히 ‘미스 손탁’으로 알려진 프랑스 출신의 독일인 앙트와네트 손탁(1854∼1925)은 조선에 부임하던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따라 32세의 나이에 경성으로 온다. 영어 독어 불어에 우리말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탁월한 언어감각과 정치적 수완으로, 궁중과 연결고리를 만들었던 그녀는 아관파천이 있던 1896년을 전후해 러시아공사관 건너편의 호텔 부지를 사들인다. 1902년엔 서양식 벽돌건물을 지어 궁내부의 프라이빗 호텔(예약 손님만 투숙하는 특정 호텔)로 운영했다.

이후 손탁호텔은 반일친미세력의 대명사인 ‘정동구락부’의 회합장소로도 쓰였으며 1905년엔 을사조약을 배후에서 조정한 일본의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머물기도 했다. 그만큼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1909년 팔레호텔의 주인 보에르에게 경영권이 넘어갔고, 1917년엔 건물부지가 이화학당으로 넘어가 여학생 기숙사로 사용됐다. 손탁호텔의 모습은 그러나 1922년 이화학당의 프라이홀 신축을 위해 헐리면서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다른 서양인 호텔들도 비슷한 몰락과정을 거쳤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후 일본인에 의해 꾸려지는 서양식 호텔만이 경성의 거리에 존재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화기 당시 정동 일대와 돈의문 일대를 중심으로 자리한 서양인 호텔들은 당대의 사교문화 현장이라는 의미를 넘어 그 자체로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다. 저자 이순우는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이다. (국민일보,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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