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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일제 불법 개인청구권 명시안해 혼란 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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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불법행위에 따른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24일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은 당시 한국 정부가 부실하고 불명확하게 이 문제를 다룬 데서 비롯했다.


한국 정부는 당시 협정 과정에서 개인 피해에 대해 3억6000만달러를 요구하는 등 개인 청구권에 배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반해 일본 정부는 ‘청구권 자금’이라는 표현을 끝까지 반대하며 이를 ‘경제협력 자금’으로 표기할 것을 고집했다. 최종적으로 정부는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를 받아냈다. 이 자금의 일부를 1975~1977년 사이 8552명의 사망자 유족들에게 30만원씩 지급했다. 당시 개인들이 일본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손해배상금을 받아내기가 극히 어려웠던 사정을 고려하면 합리적인 측면이 있었다.

문제는 당시 정부가 대리해서 받아낸 청구권 자금이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으로 임금, 채권, 저축 등 재산권에 한정됐음에도, 이 협정에서 다루지 않은 별도의 개인 청구권이 남아있음을 명시하지 않은 점이다. 당시까지 확인되지 않았거나 전쟁 중 불법행위에 따라 발생한 일본군 위안부, 원폭 피해자, 사할린 피징용자, 시베리아 피억류자 등의 개인 청구권이 그것이다. 한국 정부는 오히려 한일 청구권 협정 과정에서 “협정에는 개인 청구권도 포함돼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개인관계 청구권이 소멸된다”는 점을 일본에 확인해 줬다.

이 소멸하는 청구권이 재산권에 한정된 것인지, 그밖의 모든 청구권을 포함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하지 않았다. 당시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에서 개인 청구권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의견을 협상팀이나 청와대에 제기했으나, 협상팀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정부가 “청구권의 어떤 것이 소멸하는지 확실하게 해둬야 한다”고 밝혔고 실제 논의도 이뤄졌으나, 그 논의 내용이나 결론은 현재까지 공개된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개인 청구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점이나 일본이 제기한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개인 청구권의 범위를 분명히 하지 않는 것은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외교부의 최봉규 동북아1과장은 “당시 협정은 여러 복잡한 상황 속에서 개인 청구권에 대해 정치적으로 타협한 부분이 있다”며 “개인 청구권은 정부가 대신 받아서 국내에서 보상한다는 정도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겨레,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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