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만난 김준형씨는 부친 얘기를 할 때면 눈빛이 빛났다. 부친의 삶에 강한 자부심을 느낀 듯했다. 그의 부친은 김상돈 전 반민특위 부위원장이다. 김 전 부위원장은 반민특위 시절 대표적인 친일파 경찰인 노덕술 체포를 진두지휘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초대와 3·4·5대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최초의 민선 서울시장을 지냈다. 하지만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세력은 그를 서울시장 자리에서 해임했다. 이후 그는 군정반대운동과 3선개헌반대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유신체제’를 통해 종신집권을 꿈꾸던 박정희 정권과 대척점에 선 것이다.
김 전 부위원장은 김씨가 대학원을 졸업하던 즈음인 1970년대 초반 미국에 정착해 미주 한민통 등 민주화운동단체를 만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유신반대운동을 벌였다. 위스칸신주립대를 졸업한 뒤 IBM 등에서 잠시 일했던 김씨도 부친의 운동대열에 동참했다.
“박정희 기념·도서관 건립은 DJ에게 큰 오점이 될 것”
그런 김씨를 불편하게 하는 ‘국내 상황’이 있었다. ‘박정희 기념·도서관 건립’과 ‘박근혜 대통령론’이다. 박정희 기념관은 이미 지난 2월 문을 열었고, 박정희 도서관은 오는 11월 개관할 예정이다. 박 전 대통령의 장녀인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은 대선 예비주자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도를 보이며 ‘대권’에 가장 근접해 있다.
김씨는 “투옥과 고문 등을 통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갔음에도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정희 기념·도서관을 세우는 것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된다”며 “박정희 기념·도서관을 폭파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김씨는 박정희 기념·도서관 건립이 민주파인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된 점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적이었던 박정희를 감싸주려고 한 것은 잘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박정희를 영웅시하는 기념관을 만든 것은 김 전 대통령에게 큰 오점이 될 것”이라고 일갈했다.
김씨는 “그동안 정부가 독립운동가나 그의 유족들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되돌아 보라”며 “그런 곳에는 세금을 적게 쓰면서 박정희 기념·도서관 건립에 그렇게 많은 돈(208억 원)을 쓸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론’을 겨냥한 김씨는 “박근혜 전 위원장은 부친과 지역 때문에 유력정치인이 됐기 때문에 그에게 (독자적인) 정치적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라며 “제가 알고 있는 민심과 정보를 종합할 때 그가 차기 대통령이 될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는 “박 전 위원장은 대통령을 꿈꾸기 전에 부친의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에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며 “그와 관련해 박 전 위원장이 과거에 유감을 나타낸 적이 있지만 그것을 진정한 사과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과연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정적들을 투옥하고, 고문하고, 죽였어야 했나?”라며 “경제발전을 이룬 것보다 친일과 독재의 역사적 과오가 훨씬 무겁다”고 강조했다. 김씨의 부친인 김 전 위원장은 5공시절인 지난 85년 타계한 뒤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김씨는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것은 내 유언이니 꼭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며 부친의 유언을 공개했다.
‘나를 국립묘지에 안장하겠다는 제안이 오면 거절하라. 내가 독재자인 이승만·박정희와 같은 장소에 묻힐 수는 없지 않으냐.’
김씨는 이날 인터뷰를 마친 뒤 평생 ‘반독재운동’에 헌신해온 부친의 묘소를 찾았다. 모란공원으로 향하기 전 그는 “박근혜 전 위원장이 눈물을 흘리며 (부친의 역사적 과오를) 진정하게 사과한다면 누가 거기에 침을 뱉을 수 있겠느냐”며 거듭 박 전 위원장의 진심 어린 사과를 촉구했다. (오마이뉴스, 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