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민관 폭파 의거’ 주역 3인 후손들 67년 만에 만나다
“대일본제국의 영도하에 아시아 민족들은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해방운동을 적극 전개해야 합니다.”
친일 거두 박춘금의 목소리가 울렸다. ‘짝짝짝…’ 조선총독과 군사령관 등 참석한 일본 관리의 박수소리가 이어졌다.광복을 20여일 앞둔 1945년 7월24일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본관)에서는 박춘금 주도로 친일 어용행사인 아시아민족해방 강연회가 한창이었다.
오후 9시10분쯤 ‘쾅’하는 굉음과 함께 건물 곳곳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대한애국청년당(애청) 조문기(1927∼2008), 유만수(1924∼1975), 강윤국(1926∼2009) 선생이 미리 설치해 둔 폭약을 터트린 것. 행사는 아수라장이 됐다.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 최후의 의거로 불리는 ‘부민관 폭파 의거’ 주역인 3인의 독립지사 2·3대 후손이 처음 한자리에 모였다. 조 선생 등은 의거 후 일본 헌병의 추적을 피해 지리산,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당시 목숨을 함께했던 동지의 후손들이 67년이 흐른 뒤에야 자리를 함께했다는 사실이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난 21일 제67회 부민관 폭파 의거 기념식이 열린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에서는 이채로운 장면이 연출됐다. 의거를 한 3인의 독립지사 후손들이 한자리에서 만난 것. 첫 대면이었지만 선친 또는 조부가 간직했던 올곧은 뜻을 가슴에 새긴 탓인지 분위기는 밝고 따뜻했다.
기념식을 마친 뒤 유족들은 “꼭 만나보고 싶었다. 자주 만나자”며 서로 손을 맞잡았다. 조 선생의 외동딸 조정화(52)씨는 “아버지 생전에는 부민관 의거에 큰 관심이 없었다”며 “많은 사람이 아버지와 동료의 뜻있는 행동을 기억해 주니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유 선생의 외아들 유민(54)씨도 “아버지가 평소 애청 동지들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고, 당시 뜻을 같이한 동지들을 무척 그리워하셨다”면서 “아버지는 ‘조선인으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생전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고 회상했다. 이런 까닭에 부민관 의거는 유 선생 사후인 1977년에서야 독립운동사(史)로 공식 기록됐다.
자리를 함께한 손자·손녀들도 할아버지들의 뜻을 잇겠다는 포부를 내비쳤다. 강 선생의 손녀인 김승렬(26)씨는 “할아버지 세대가 목숨을 걸고 나라와 주권을 지켜낸 데 대해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라면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유 선생의 손녀 유지형(24)씨는 “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도 누구보다 강한 애국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할아버지 덕분”이라며 “다음 기념식에는 내가 사회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살아계신 독립지사들이 많지 않다”며 “이미 세상을 떠난 독립지사의 후손 2·3대의 만남은 선조의 뜻이 후대에도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고무적인 일”이라고 밝혔다. (세계일보, 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