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투사는 죽어서도 말한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 정면으로 맞서다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장준하 선생의 사인이 타살이라는 결정적 단서가 드러났다. 지난 8월 1일 고인의 유해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머리뼈에 누가 보아도 틀림없는 정교한 타격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장준하가 누구인가.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으나 목숨을 걸고 탈출하였으며, 6천리 고난의 장정 끝에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OSS 대원으로 자원하여 특수게릴라훈련을 받았으며, 광복군 대위로 국내진공을 준비하던 중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안타까움 속에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의 진면목은 기나긴 반독재 언론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1953년 사상계를 창간하여 당대 최고의 정론지로 자리잡게 하였으며,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한 공로를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 언론상을 수상했다.
▲ 16일 공개된 고 장준하 선생의 유골. 두개골 오른쪽 귀 뒤쪽에서 7X6㎝ 크기의 골절이 발견됐다ⓒ장준하기념사업회 |
5.16 쿠데타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인물의 숙명적 대결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광복군 대위와 만주군 중위, 그 출신만큼이나 장준하와 박정희가 걸어간 길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한 사람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재야의 대통령으로 칭송받았다. 다른 이는 파시즘의 신봉자로서 종신총통의 자리에 올라 이 땅의 민주주의를 뿌리째 파내 버렸다.
장준하 선생이 유명을 달리했던 1975년 8월 당시는, 유신정권이 최소한의 윤리마저 저버린 채 초법적인 강권통치를 자행하고 있던 때였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 10월 최종길 교수 의문사사건,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났다. 독재정권은 1975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8인을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시킴으로써 사법살인도 주저하지 않았다. 헌법이 아니라 긴급조치로 연명하던 불법정권은 납치·감금·고문·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극악한 범죄집단에 다름 아니었다. 독재자의 종신집권을 위해서 반인륜적인 국가폭력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던 암울했던 시기, 장준하 선생 또한 그렇게 정치테러의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부활하는 유신의 망령을 보았을까. 온몸으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선생의 유해는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분노하라! 저항하라!”고.
유골에 남겨진 선연한 만행의 증좌를 보고서도 또다시 침묵하거나 방관한다면 이는 선생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또, 한 가닥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흰소리만 늘어놓는 유신잔재들의 파렴치함을 징치하지 않는다면, 역사 앞에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37년간 밝혀지지 않았던 의문사의 진상이 10월유신 선포 40년이 되는 지금 드러난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역사에서 배울 것을 찾지 못하는 자는 영원히 암흑 속에 있게 된다는 괴테의 예리한 지적은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경구가 될 만하다.
유해가 웅변하는 전율할 수밖에 없는 메시지는 “유신시대로 회귀하는 잘못된 선택을 결코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영령의 경고일 것이다. 이보다 더한 역사의 준엄한 명령이 어디 있겠는가. 진실은 드러났고 남은 것은 최소한의 자숙조차 않는 유신세력에 대한 심판뿐이다.
한갓 자연인에 불과한 스탈린의 딸이나 프랑코의 딸도 독재자 아버지의 과오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했을 뿐만 아니라 비판에 앞장섰다. 박정희의 딸도 아버지가 남긴 영광에만 기대려 하지 말고 부정적 유산에 대해서도 용기있게 직시해야 한다. 그가 꿈꾸는 목표가 대권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나라를 이끌어나갈 지도자의 최고 덕목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신념과 실천의지다. 과거의 잘못을 언제라도 바로잡을 수 있는 도덕성과 용기다. 그런 깜냥이 되지 않는다면 스스로 그만 두는 것이 자신과 국민들을 위한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 201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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