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책임’ 3호 권두언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역사와 책임”3호”가 발간되었다. 이번 호에서는 <특집>으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과거청산의 과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난을 마련했다. 노무현 정권 때 집중적으로 설립되었던 과거사 위원회들이 달성한 성과와 한계, 과제 등을 다룬 평가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그간의 평가회에서 많은 이야기들은 오갔지만, 정작 남은 과제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토론은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부족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보수정권의 승리에 따른 패배주의,비관주의적 태도, 당면한 해결 과제에서 우선순위가 밀린다는 운동진영의 인식, 피해자와 유족회 등 해결 주체들의 이해관계 차이와 이로 인한 분열 등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서울시장 보궐 선거를 전환점으로 보수적 흐름에 제동이 걸림으로써 정치적 국면이 야당과 진보진영에 다소 유리하게 바뀌는 현상이 벌어졌다. 올 초부터 이러한 변화를 적극 활용하여 과거청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모색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올해는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있는 이른바 ‘정치의 계절’인 만큼 사회 현안들이 전면화되고, 이에 대한 정당과 후보들의 정책을 확인할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특집’의 첫 번째 꼭지인 ‘집담회’는 이러한 변화를 고려하여 과거청산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전문가, 활동가들이 모여 실질적인 방법을 모색한 자리에서 나온 고민의 성과물이다. 다만 과거청산 문제 가운데서 한국전쟁기의 집단희생과 인권침해 문제만 토론의 의제로 삼았다. 여전히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 많은 데다 진상규명 이후의 보상?배상문제, 유골 조사와 이후의 해결을 포함한 위령사업 문제 등 더 늦춰서는 안 될 현안들이 절실하게 제기되고 있어, 의제를 제한한 것이다. 집단희생과 인권침해 사건의 경우, 현안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나눌 수 있다.
추가 진상조사, 보,배상특별법 제정, 위령사업 등을 포함한 재단 설립. ‘집담회’에서 제기된 세 가지 문제는 이후 네 차례에 걸쳐 개최된 과거사 관련 활동가와 단체, 법률가들의 연석회의를 통해 큰 가닥을 잡고, 구체화되고 있다. 곧 마련될 대통령후보들에 대한 정책질의서도 이러한 성과의 한 결과물이 되리라 기대한다.
<특집>의 두 번째 꼭지는 총선 과정에서 각 정당에 제출한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정책제안서’를 일부 수정하고 요약한 것이다. 4.9통일평화재단이 제출 책임을 지고, 민족문제연구소와 포럼 진실과정의가 공동으로 작업했다. 식민지기의 강제동원 피해문제까지 포함해 각 정당의 공약 형태로 구성하였다.
세 번째 꼭지는 ‘과거사 위원회들의 주요 권고사항’을 요약해서 실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이 생산해 낸 보고서들은 매우 귀한 사회적 성과이다. 일회용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성과들이 축적되어 역사는 두터운 층을 형성하며 진보해 간다. 보고서의 권고사항들은 과거청산의 후속조치를 의미하는 것이자, 바로 그러한 층을 두텁게 해주는 매개이기도 하다.
축적의 두께만큼 한국사회도 성숙해 갈 것이다. 위원회의 권고사항들은 우리에게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가치와 민주주의의 성숙을 가늠하는 지표이다. 그것이 너무 쉽게 잊혀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진실화해위원회와 의문사위원회, 군의문사위원회의 주요 권고사항을 요약해서 소개했다.
<논문>에서는 네 꼭지를 다뤘다. 홍원표 한국외대 교수의 ‘한나 아렌트의 과거청산론 : 책임, 용서, 화해의 정치’는 과거청산 문제를 정치철학 차원에서 접근한 한나 아렌트의 주요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과거청산 문제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풍성하게 하는 데,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화해의 정치는 공동 세계에 대한 관심, 책임의 수행에 대한 냉정한 정치적 판단, 그리고 새로운 정치공간을 형성하는 약속의 제도화를 지속하는 과정”이라고 정리한 결론은 정치적 행위로서 화해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분단과 한국전쟁, 냉전체제 하에서 극단적인 갈등과 폭력적인 해결방식에 쉽게 노출되고 익숙해져 버렸던 지난 역사와 그 ‘과거의 짐’을 아직도 지고 있는 지금,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할 때이다. 비록 쉽게 읽힐 글은 아니지만, 현재의 논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는 데 기여하는 바 있어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이령경 릿쿄대학교 강사의 ‘그들은 어떻게 ‘간첩’이 되었나?’는 ‘재일한국인 간첩조작사건 재심과 7명의 가족사를 통한 고찰’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재정권 하에서 벌어졌던 재일한국인 간첩조작사건 중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 이후 법적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재심을 신청한 사건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사건의 역사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한국정부의 재일조선인 정책, 그리고 간첩이 양산되는 역사적 배경과 제도 등을 시간순으로 재구성하면서 피해자들의 구술을 함께 다루고 있어 제도사와 개인사가 잘 버무려져 있다.
조영선 변호사의 ‘유신헌법 및 긴급조치의 위헌성과 과제’는 유신헌법 제53조와 긴급조치 1호, 9호가 헌법에 위반한 것임을 주장한 글이다. 현재 헌법재판소에는 긴급조치와 유신헌법 제53조에 대한 최종적인 위헌심사가 계류 중에 있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헌법재판소가 국민주권주의, 3권분립, 법치주의 등 근대 헌법 원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과거 청산의 일환으로서 법적 청산에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강경민의 ‘야스쿠니 소송의 경과와 쟁점’은 일본사회, 특히 보수세력의 정신적 뿌리라 할 수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한국인 합사 철회를 요구하는 소송을 다루고 있다.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유사종교적으로 뒷받침했던 야스쿠니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된 한국인 피해자의 유족과 생존자 김희종 씨가 민족적 인격권 침해와 사자의 추모권 등을 이유로 합사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2011년 1심에서 도쿄지방재판부는 ‘종교의 자유’와 원고들의 피해가 ‘참을 수 있는 정도’라는 논리를 내세워 전면 기각했다. 일본사회가 여전히 과거의 식민주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소송이라 할 것이다.
<쟁점과 과제>에서는 후루카와 마사키의 ‘재한군인군속 재판 10년의 세월을 돌아보며’를 다뤘다. ‘재한군인군속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관서 사무국을 책임지고 있는 후루카와 씨가 지난 10년간 일본 ‘전후보상’ 소송의 총결산이라 불리는 재한군인군속 재판 지원 활동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1965년의 ‘한일협정 완전 해결론’이라는 거대한 벽을 결국 넘진 못했지만, 그간의 재판 지원 활동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모색을 하고 있는 일본 시민운동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현장>은 두 개의 글을 다뤘다. 김미정 고려대 박사과정생이 쓴 ‘죽어서도 나올 수 없는 곳-소록도’는 역사의 현장을 다녀온 기행글이다. 식민지기 한센병(나병, 문둥병) 환자를 격리시켜 악질유전자를 제거하겠다고 한 인종주의의 실험장이자 범죄의 현장이었던 소록도를 마치 안내인이 소개하듯 사진과 함께 잘 묘사하고 있다. 일제의 지배정책도 적절하게 다루고 있어 역사학도의 기행글로서 손색이 없다.
합천 평화의집 활동가 허미선의 ‘지금 함께 하는 사람이 당신의 희망입니다’는 2012년 홋카이도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공동워크숍’ 참관기이다. 1997년 7월 슈마리나이댐에 강제동원되어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한일대학생공동워크숍’이 개최된 것을 계기로 매년 열렸다. 2001년 이름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으로 바꾸고 여름과 겨울, 한일 공동의 유골 발굴을 비롯하여 동아시아의 인권 문제까지 시야에 두고 연대활동을 지속시킨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끝으로 <자료>에는 지난 호에 이어 안김정애의 ‘한국전쟁기 11사단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피해여성의 구술자료:산청,함양사건'(2)을 실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3명의 간접 피해자들이 겪은 비극과 신산한 삶, 그리고 상처가 구술에서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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