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유신 40주년 ‘끝나지 않은 유신’ 좌담회
박정희 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해 만들어낸 ‘유신체제’가 올해로 선포 40주년을 맞았다. 40주년이어서라기보다 유신체제의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덕분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최근 박 후보의 유신체제 관련 발언 하나하나가 도마에 오르는 것은 여전히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과 유신체제의 그늘 아래 있다는 방증이다.
과연 유신체제는 박 후보나 지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경제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었’으며, ‘90%가 넘는 지지를 받았기에 합법적’이었고, 훗날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하는 것일까. 민족문제연구소는 유신 40주년을 맞아 지난달 23일부터 ‘끝나지 않은 유신’이라는 기획강좌를 열고 있다. 강사로 참여한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정근식 서울대 교수, 김재홍 경기대 교수가 박정희와 유신체제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이들은 유신체제가 ‘현재진행형’임을 강조하면서, 한국전쟁과 더불어 현대사의 가장 큰 역사적 손실을 불러왔지만 낮은 역사 인식이 유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박정희 서거 이후 ‘서울의 봄’으로 불렸던 1980년 5월15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대전 시내에서 ‘유신잔당 척결’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유신체제의 불법성과 폭력성
김재홍(사회)=지난 6일 김황식 국무총리는 대정부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유신체제는 자유민주주의를 벗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합법적이었다고 표현한 건 심각한 문제다. 대통령인 박정희가 국회를 해산시켰는데,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이 없었다. 또 유신헌법은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했는데,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권력을 강화하는 헌법을 의결한 거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할 때도 계엄령이 그대로 있었고, 찬반토론과 언론 비판이 금지됐다.
서중석=유신은 오로지 박정희만을 위한 독재체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 사람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체제는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다. 구소련의 스탈린 독재를 비난하지만, 소련이 스탈린만을 위한 독재체제는 아니었다. 그러니 박정희 서거 직후에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가 빠른 시간 내에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한 것이다. 유신은 박정희만을 위한 옷이었다. 그래서 보수 세력 내부에서도 동의받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극단의 소수만이 지지했다.
정근식=말씀을 들으니 1979년 이후 5·16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도 갈라져서 유신공화당이랑 민주공화당은 다르다고 서로 구분했던 기억이 새롭다. 유신체제는 정보기구, 군대, 경찰의 삼박자로 운영됐다. 그리고 박정희와 가장 가까운 경호실이 세 개의 권력기구를 지배하다가 문제를 빚어낸 우스꽝스러운 권력구조였다. 그때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설마 그랬겠는가 믿을 수조차 없는 지배체제였다.
임헌영=유신은 제2의 5·16 쿠데타라고 본다. ‘5·16 혁명공약’의 마지막 구절이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신체제로 들어섰다는 건 결국 과업을 전혀 성취하지 못했다는 걸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결국 그 정치적 한계를 메우기 위해 일제 때 배웠던, 파시즘 중에서도 가장 졸렬한 파시즘을 한국사회에 적용시킨 것이다. 세계 역사상 가장 반역사적·반민족적 파시즘이다. 어떤 파시즘은 민족, 국가의식도 있는데, 그것조차도 없다. 이름조차도 쓰지 말아야 할 ‘유신’이란 용어를 썼다.
김재홍(왼쪽)·서중석 교수
▲ 김재홍 경기대 교수
“박정희 시대의 탄압 너무 가혹… 투신 등 저항 방법도 극단적
민주적 정치문화 발전 저해”
▲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박근혜는 유신 지탱의 중요 축…
설득력 있는 해명도 없이 공인으로 활동은 심각한 문제”
■ 5·16 쿠데타와 유신은 다른가
김재홍=일각에서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에서 유신 전까지는 순수하게 조국근대화를 위해 일했지만 유신체제는 문제라고 한다. 저는 5·16 쿠데타가 장면 정부의 혼란과 무능, 부패 때문이 아니라 박정희의 권력욕 때문에 일어났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가 언젠가는 쿠데타를 할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때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건의하기도 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4·19 혁명의 느슨한 틈바구니에서 반란을 감행한 것이다. 유신체제도 그 연속선상이라고 본다.
서중석=박정희는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을 숭상한 사람이다. 강력한 지도자에 의한 능률적인 정치를 해야 한다, 정당정치를 배격해야 한다는 사고가 젊었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그게 1972년이라는 시점에서 구체화된 것 같다. 4월 혁명 이후 그 민주적 분위기 속에서도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을 때 일부 언론인들과 얘기하면서 군국주의 정신이 최고로 발현된 일본의 1936년 2·26 쿠데타를 찬양한다. 박정희는 4·19 이후 장면 정권이 혼란투성이였다고만 하는데 역사적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이승만 정권 때 군경에 의한 집단학살, 김구 암살을 비롯해 얼마나 의혹사건이 많았나. 당연히 진상규명 요구를 할 수 있었는데 그걸 혼란이라고 봐서는 안된다. 통계를 보면 대부분의 데모는 1960년 4월26일에서 6월말까지 일어난다. 1960년대 데모의 80%다. 5·16 직전이 되면 데모는 거의 없어진다. 더구나 4월 혁명 직후에는 무법탈법폭력이 판쳤던 이승만 시대에 비해 법치주의도 자리잡기 시작했고, 새로운 공채제도로 관료사회에 신선한 분위기가 불었다. 경제중심주의 정책도 이때 나온다. 4·19 이후의 이런 분위기를 박정희가 만들어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김재홍=유신 이전 제3공화국에서는 그래도 선거가 있었다고 하지만, 선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당정치와 국회운영과 언론은 어땠나. 민주공화당의 창당 자금은 4대 의혹 사건으로 충당됐다. 정당 내부의 자율성도 없었다. 1971년 10·2 항명파동을 보면, 내무장관 오치성 해임건의안을 일사불란하게 부결시키지 못했다고 공화당의 김성곤·길재호 의원 등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했다.
임헌영=5·16 쿠데타를 그야말로 ‘구국의 혁명’ 때문에 일으켰다면, 적어도 국민들의 힘으로 타도한 이승만 세력, 친일파 등을 써서는 안됐다. 그런데 바로 합법정부의 정치인들을 다 묶어놓고 그 세력들을 그대로 데려다 썼다. 불법 쿠데타 자체는 어떤 역사가나 정치철학자도 옳다고 하지 않는다. 쿠데타를 옳았다고 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그래도 박정희만 옳다고 하려면, 5·16 이후 행적을 따져볼 수밖에 없는데 결국 구악을 일소하기보다 권력의 발로 삼았다.
■ 박정희는 한국경제 성장에 기여했는가
김재홍=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에 의해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이뤘는가, 아니면 국민들의 피땀 속에 경제성장의 동력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양론이 있다. 박정희 시대가 외형적 지표나 성장률은 높았지만 국민실생활과 직결된 물가상승률, 실업률은 역대 정권 중 최악이었다.
서중석=유신체제를 합리화하는 유일한 논리는 경제발전이다. 그런데 유신체제 몰락의 가장 큰 원인도 경제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박정희를 경제대통령이라고 하는데, 경제 때문에 망한 건 아이러니 아닌가. 부마항쟁이 왜 이렇게 거대하게 발전하나.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 시위는 4·19 이후 처음이었는데, 전반적으로 경제가 너무 나빴기 때문이다. 80년에는 물가가 40% 정도 올랐고,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5%대였다. 한국은 1952년부터 79년까지 한 번도 마이너스 성장을 한 적이 없다. 4·19 직후 그렇게 어려운 시기에도 성장했다. 특히 유신 후기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중복투자는 걷잡을 수 없는 후유증을 낳았다. 박정희 경제발전이 재벌 중심의 부익부빈익빈 정책이라는 것을 장준하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다. 박정희를 경제대통령으로 보는 건 망하는 과정을 못 본 탓이다.
김재홍=박정희 정권에서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배경 중 하나로 해방 이후에 실시된 교육의 영향을 드는 분도 많다.
서중석=사실 박정희는 굉장히 행운아다. 1960~80년대까지 경제발전할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이 많았다. 단군 이래 최대라는 1986, 1988년의 호황을 전두환이 잘했다고는 안 한다. 만일 박정희가 경제발전을 시켰다는 논리라면, 전두환의 독재 덕분에 최대 호황이 가능하다고 해야 하는데, 이건 3저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얘기한다. 박정희 시대에는 특히 해방 전후 어느 정도 교육을 마친 한글세대가 탄생했고,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노동력이었다. 국제적으로 봐도 60년대는 자본주의 팽창의 시대였다. 서유럽, 미국, 일본경제뿐만 아니라 스페인, 대만, 싱가포르 등 그 다음 단계의 자본주의 국가들도 대단한 발전을 이뤘다. 그런데도 5·16 쿠데타 초기에는 경제정책이 잘못돼 계속 실패를 거듭했다. 64년까지도 한국경제가 상당히 나빴다.
정근식=언제부턴가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을 대비시키는데, 이는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산업화세력이란 일부 재벌이나 경제관료들이다. 그러나 산업화의 주체는 새로운 교육을 받고 자기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불철주야 일했던 사람들이다. 하루에 12~13시간 노동하면서도 임금수준은 형편없었다. 산업화 세력에 중요한 공이 돌아간다면 이 분들에게 70~80% 돌아가야 한다.
임헌영 소장(왼쪽)·정근식 교수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5·16이 구국의 혁명이라면
적어도 국민 힘으로 타도한 이승만 세력·친일파 뺐어야”
▲ 정근식 서울대 교수
“한국전쟁 이은 커다란 손실… 인간성·창조적 문화력 파괴
역사적으로 큰 죄악이다”
■ 박정희는 그래도 청렴한 독재자였나
김재홍=일부 경제에 성과가 있다고 해도 박정희 정권 때부터 시작한 권력형 비리, 부패는 아직도 문제다. 그런데 해외 경제학자일수록 전두환, 노태우와 박정희는 다르다고 한다. 박정희는 그래도 근검절약했고 사명감이 있는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판을 받은 전두환에게 재판장이 왜 기업인들에게 검은돈을 많이 받았느냐고 물으니 ‘과거 관행대로 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박정희 시대 방식 그대로 했다는 거다. 10·26 사건이 나고 전두환이 청와대를 수사하는데 집무실 금고에서 현금 9억원이 나왔다. 지금으로 치면 90억~100억원 정도 되는 돈이다.
서중석=한국인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사실과 동떨어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박정희 시절 부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다. 박정희에 비해 대만의 장제스, 스페인의 프랑코, 싱가포르의 리콴유는 같은 독재정치라도 훨씬 깨끗했다. 박정희는 정권을 처음 잡을 때부터,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다. 1963년 대선에서도 겨우 이긴 게 그 이유다. 아무것도 없었던 군인들이 정권을 잡자마자 얼마나 호화로운 특권층이 됐느냐는 비판이 인 것이다. 1971년 10월15일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군인들이 고려대에 난입했는데, 그 이유는 고대생들이 부패분자 명단을 쫙 공개해서 학교에 내걸었기 때문이다. 71년 대선에서 박정희가 크게 곤혹스러워했던 것도 야당에서 부정부패, 정경유착, 부익부빈익빈, 재벌중심 경제정책을 공격하는데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집권 고위층의 부정부패가 박정희와 연관돼 있지 않으면 어떻게 가능했겠나. 박정희는 부패의 고리와 깊숙이 연관돼 있었다.
■ 왜 아직도 박정희의 유령이 어른거리나
김재홍=그럼에도 왜 아직도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가 가장 인기가 있을까.
임헌영=박정희가 선호도 1위를 하는 건 당연하다. 4·19혁명 뒤 1년과,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기간을 합쳐 11년을 빼면, 그 외에는 전부 일제와 이승만, 박정희 독재 미화 정권이다. 그 집권 세력들이 모든 힘을 미화에 동원했다. 그게 어떻게 없어지는가. 50년 동안 우상화해 놓으면 지우는데 100년이 걸린다.
정근식=박정희 유신체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혜를 주고 어떤 사람은 배제함으로써, 특혜를 받는 사람이 충성을 바치는 구조였다. 그것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또 아시다시피 육영수 여사도 그렇지만 박정희 본인도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런 종말의 형식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비극적으로 보인다. 유신체제가 민주주의 혁명의 방식으로, 혹은 스스로 물러나는 방식으로 끝났다면 덜했을 거다. 그런데 비극적 방식으로 끝나니 어떤 향수가 생겼다. 원래 파시즘은 특별한 형태의 미학적 감성과 연결된다.
서중석=지난해 ‘자유민주주의 논쟁’은 박정희 시대를 합리화, 미화시키려는 것과 관련이 깊다.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이승만 살리기와 함께 박정희 유신체제를 적당히 넘어가려는 것이다. 유신체제의 잘못에 대해 가르치기보다 유신체제도 자유민주주의였다, 꼭 독재만 한 건 아니다라는 식으로 호도하는 방편이 아닌가 싶다.
■ 박정희가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김재홍=박정희 시대에는 너무 가혹한 탄압이 있었기에, 저항하는 방법도 극단적이었다. 투신, 분신, 단식투쟁 등 타협과 협상을 거부하는 극단적 저항의 정치문화가 뿌리내렸다. 지금도 정치권에서 여야 간에 대화와 협상, 타협을 주장하면 배신으로 비쳐진다. 민주적 정치문화가 발전할 수 없는 유산을 남겨놓은 것이다.
서중석=극우적, 파시즘적 활동이 최근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것도 유신체제와 관련이 있다. 남북관계만 보더라도, 천안함 사태 이후로 단절됐다. 이런 분위기는 유신시대, 특히 1975년대 인도차이나 사태(베트남 공산화) 이후 극단적인 반공반북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승복 동상이 전국 초등학교에 쫙 깔리던 시대의 긴장고조와 닮아 있다. 박정희는 어떻게든 긴장고조를 시켜서 유신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남침 위협을 과장하고 한국전쟁의 만행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TV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냉전이 무너지는 데탕트 분위기였다.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는데도 되레 유신체제로 가는데 악용됐다.
김재홍=박정희는 데탕트지만 국지전 위험은 더 높아졌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때 박정희가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하니까 뉴스위크 아시아판이 뭐라고 썼느냐면, 박정희가 얘기한 비상이란 ‘상상적 비상’이라는 조롱기사가 나왔다.
정근식=유신체제는 한국전쟁에 이어 크게 역사적 손실을 입혔다. 한국전쟁의 폐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유신체제가 가져다 준 인간성과 창조적 문화력 파괴도 역사적 죄악이다.
■ 유신체제와 박근혜는 무관한가
김재홍=박정희 정권 중에서도 가장 극악스러운 독재체제인 유신체제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퍼스트레이디를 했다. 구국여성봉사단 등의 총재를 맡으면서 이른바 국민통합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박근혜 의원이 지금 유력 대권주자가 돼서 5·16 쿠데타가 구국의 혁명이고, 유신도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고 한다. 4·19혁명을 짓밟은 5·16 쿠데타가 정당하다고 하면, 3·1운동과 4·19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셈이다.
서중석=박근혜 후보는 유신체제 지탱의 중요한 축이었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최태민 목사와의 관계 등 수많은 얘기가 나온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게 해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지 않고 공인으로서 활동하겠다는 건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지금 모 후보에 대해서는 술집 간 것조차 시비를 걸고 있는데, 그런 사소한 문제들과 달리 박근혜의 유신체제에서의 역할은 질이 다르다.
정근식=박근혜 후보는 유신후기 역할에 대한 자기 고백이나 반성, 유신체제에서 희생됐던 사람들에 대한 진솔한 사과와 제도적 뒷받침에 대한 얘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유신체제에서 노골화된 두 국민 정책,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끌어안고 어떤 이들은 배제했던 정책에 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
임헌영=이번 대선은 63년과 비슷한 분위기다. 쿠데타 직후 정치 탄압의 분위기는 MB정권과 비슷하다. 민간인 사찰이나 야당정치인에 대한 간접적 압력은 5·16 직후보다 더 야비하다. 그런 분위기에서 선거를 하고, 유신 때 정치수업을 한 박근혜 후보가 나온다. 사실 63년 선거에서 국민들은 야권에 더 많은 표를 줬다. 국민 전체도 쿠데타를 반대한 셈이다. 그런데 야당정치인들이 썩어빠져서, 지금의 야당처럼 정신을 못 차려서 쿠데타 세력의 집권을 초래했다. 올바른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서 어떤 보수주의 정치인도 국민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된다는, 최소한도의 민주주의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경향신문 2012. 9. 11 >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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