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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유신 선포… ‘천황파시즘’ 흠모한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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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추억①] 10월 유신은 일본제국파시즘 체제의 전면적 부활


 


민족문제연구소는 유신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전국순회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다. 6월 9일부터 30일까지 부산 민주공원, 8월 8일부터 9월 9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특별전이 열렸다. 10월에는 고양, 광주, 인천, 울산, 춘천, 서울청계광장, 대구에서, 11월에는 창원, 진주, 원주에서 전시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전시회를 유치하려는 지역 시민단체들은 많지만, 예민한 전시 주제로 인해 예산확보는 물론 전시장조차 구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탓에 서울, 부산, 창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전시회가 패널 야외전시로 진행되며 실물자료는 전시되지 않는다. <오마이뉴스>는 실물전시를 볼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서대문형무소 제12옥사에서 열렸던 ‘유신의 추억전’을 지상중계한다. [편집자말]










  지난 6월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린 ‘유신의 추억’ 전시 광경.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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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의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린 10월유신 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특별 기획전시가 민족문제연구소 주관으로 서울에서는 지난 8월 8일에 시작됐다. 이번 전시는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이란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애국지사와 민주투사가 목숨을 바치거나 고초를 겪었던 저항운동의 성지 서대문형무소의 한 옥사에서 열려 의미를 더해준다.

제목은 전시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식민의 유산’은 유신체제가 일제 천황제 파시즘의 사생아라는 점을 직설한다. ‘유신의 추억’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패러디해 왔다. 절대 추억일 수 없는 끔찍한 경험이지만,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과거라는 점에서 ‘유신’과 ‘연쇄살인’은 공통분모를 가진다. 어떤 이들의 추억은 다른 이들에게 악몽이자 트라우마를 의미한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추억’은 역설적이고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전시는 유신으로 가는 길, 조국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학교 그 잔혹한 풍경, 총력안보와 감시체제, 금지의 시대 등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유신주체의 의식세계가 천황제 파시즘의 영향 아래 놓여있었으며 통치시스템과 동원기제 또한 일제의 조선 지배와 만주국 경영에서 원리를 차용했다는 점이다. 즉 유신체제는 제3세계의 일반적인 군사독재와는 유형을 달리한다고 본다.

정통성을 결여한 반민주적 정권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체계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와 통치 메카니즘을 완비하였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별성이 있다는 해석이다. 달리 말하면 유신체제를 패망한 ‘식민지 모국=일본제국’ 파시즘체제의 온전한 복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유신으로 가는 길










▲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혈서 지원 보도 기사 (<만주신문> 1939.3.31)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혈서와 함께 보낸 편지 내용 일부)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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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게 5.16쿠데타와 10월 유신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으며 청년기 이래 오랜 로망의 실현이었다. 일생 동안 그의 의식세계와 행동양태를 지배한 이념은 소학교 훈도(교사)와 제국 장교로서 체화한 파시즘이었다. 분필과 총칼은 얼핏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으로 상징되는 교화와 무력은 파시즘을 지탱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철저한 파시스트가 될 기초를 충실히 닦은 셈이다.

무엇보다 그는 제국 일본이 만든 군인의 상에 매료되었다. 학생시절에는 일본 군인들의 무훈담을 읽으면서 열광했다. 교사시절에도 박정희의 영웅은 페스탈로찌가 아닌 나폴레옹이었다. 식민지 코르시카인이 장교가 되고 황제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출세는 전범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박정희의 이러한 야망을 일부나마 충족시킬 유일한 현실적 통로는 일본 군부였다. 당시 ‘상승’ 제국군대의 장교는 선망의 대상이자 출세와 권력의 표상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군인상은 풍찬노숙하는 ‘초라한’ 독립군이 아니라, 근사한 제복에 칼 차고 말 타고 천황을 위해 진군하는 ‘멋진’ 황군(皇軍)이었다. 이것이 박정희가 안정된 교직을 버리고 혈서까지 써가며 제국군대의 일원이 되려한 주된 이유였다.











▲ 박정희가 쓴 <국가와 혁명과 나> 이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명치유신이란 (중략) 아세아의 경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167쪽) “명치(메이지)유신은 그 사상적 기저를 천황절대제도의 국수주의적인 애국에 두었다.(중략) 명치혁명인의 경우는 금후 우리의 혁명수행에 많은 참조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171-172쪽)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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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 지도자들을 ‘지사(志士)’로 존경했다. 그가 롤모델로 삼은 청년지사들 중에는 정한론을 외친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의 사고체계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은 쇼와유신(昭和維新)이었다. 박정희는, 1930년대 일본 군부의 급진파와 우익세력이 추구한 천황 중심의 국가개조론인 쇼와유신의 이념에 몰입했다.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방종으로 여기고 정당정치와 언론자유를 사회혼란과 동일시하며 강력한 반공정책을 표방한 황도파의 쇼와유신은 비록 실패로 끝이 났지만, 군부의 정치개입을 일상화하고 천황제 파시즘을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쇼와유신에 의해 다이쇼데모크라시의 명맥이 끊어졌듯이,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는 쇼와유신을 흠모한 박정희의 5·16쿠데타에 의해 채 피지도 못한 채 저버리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박정희는 그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5.16쿠데타가 지향하는 바가 명치유신과 쇼와유신의 목표와 다르지 않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국가주의가 자신의 신념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친위쿠데타인 ’10월유신’ 또한 용어에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그를 답습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래 학생 또는 교사로서 박정희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체계적으로 수용하고, 전시체제하의 다양한 동원정책과 교육정책을 이론에서 실무까지 체득했다. 그는 체제교육의 중요성을 경험으로 확실하게 간파하고 있었으며, 집권 후 국가운영에서 이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1961년 11월 수상관저 만찬회에서 이케다 일본 수상과 담소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왼쪽은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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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직후의 국가재건운동과 1970년대 새마을운동 따위의 국민개조운동,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 또는 애국조회와 국기하강식과 같은 국가주의 의례 강요, 충효사상 보급과 교련, 체육 등 군사교육 강화, 라디오체조와 조기청소 실시 및 국민가요 개창운동, 퇴폐풍조 일소와 미풍양속 고취, 반상회의 정례화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국민의 일상을 지배했던 숱한 제도와 의식들은 하나같이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에서 실행했던 전체주의적 통치시스템을 그대로 본떠 부활시킨 것이었다.

한편 개발독재의 양축을 이룬 고도 국방국가를 목표로 한 총력안보체제 구축과 국가통제형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시행은 일제의 만주국 경영에서 그 기본구조를 빌려온 것이었다. 











▲ 미 중앙정보국(CIA) 특별보고서, <한일 관계의 미래> 1966.3.18.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일본 기업들이 1961-1965년 사이 당시 민주공화당 총 예산의 2/3를 제공한 바, 각 개별 기업의 지원 금액이 각각 1백만 달러에서 2천만 달러에 이르며 6개의 기업이 총 6천6백만 달러을 지원했다.(중략) 한일협상을 증진시키기 위해 김종필에게 지불되고, 또한 여러 일본기업들에게 한국 내에서의 독점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지불된 것뿐만 아니라 민주공화당은 또한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기업으로부터도 지불을 받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부방출미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의 한국회사가 민주공화당에 11만 5천 달러를 지불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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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는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미명으로 포장되기도 했다. 이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메이지유신-쇼와유신’으로 이어지는 일본 극우세력의 국가주의 전통에 근대화론을 접합시킨 시대착오적 전체주의의 산물이었다.

‘최후의 제국군인’ 박정희가 일으킨 10월유신 친위쿠데타로, 한국사회는 해방공간과 정부수립 이후 진행된 친일인맥의 화려한 복귀에 이어 파시즘 체제의 전면적인 부활이라는 역사의 반전을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사회 요소요소에 구조화한 뿌리 깊은 ‘박정희주의’는 지금까지도 민주주의의 정착을 가로막는 최대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특별담화문- 헌법개정안 공고에 즈음하여, 1972.10.27.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오마이뉴스> 201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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