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추억 ③] 70년대 학교, 그 잔혹한 풍경
민족문제연구소는 유신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전국순회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다. 6월 9일부터 30일까지 부산 민주공원, 8월 8일부터 9월 9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특별전이 열렸다. 10월에는 고양, 광주, 인천, 울산, 춘천, 서울청계광장, 대구에서, 11월에는 창원, 진주, 원주에서 전시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전시회를 유치하려는 지역 시민단체들은 많지만, 예민한 전시 주제로 인해 예산확보는 물론 전시장조차 구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탓에 서울, 부산, 창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전시회가 패널 야외전시로 진행되며 실물자료는 전시되지 않는다. <오마이뉴스>는 실물전시를 볼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서대문형무소 제12옥사에서 열렸던 ‘유신의 추억전’을 지상중계한다. [편집자말]
▲ 1974년 대학가에서는 일제히 교련과 학교의 병영화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일었다.
ⓒ 민족문제연구소
유신정권이 표방한 ‘국적 있는 교육’은 실은 ‘국적 상실 교육’이었다. 왜냐하면 일제의 황국신민화교육과 일란성 쌍둥이였기 때문이다. 유신교육은 놀라우리만치 일제의 전체주의 교육을 답습했다.
유신시대 학교는 국가와 지도자에게 절대 충성하고 복종하는 국가주의를 훈육하는 도구였다. 여기에 총력안보체제 수립이 강조되면서 학교는 병영으로 변모했고, 교과서 또한 영도자와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일제의 천황제 파시즘 교육에서 기본원리를 빌려온 유신교육은 정권안보의 버팀목으로 활용되었다.
▲ 일제시대 교과서에 실린 교육칙어.
ⓒ 민족문제연구소
▲ 일제 때 애국조회에서 교육칙어를 봉독하는 모습. 박정희 시대와 꼭 닮았다.
ⓒ 민족문제연구소
▲ 일제의 애국조회 장면 교육칙어와 황국신민서사를 외어야 했다. 천황에게 충성과 효도를 다하도록 충효교육이 강조되었다.
ⓒ 민족문제연구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학생들의 복장과 두발을 철저히 규제했다. 교복과 교모, 삭발은 획일주의의 상징으로 체제순응을 규율하는 기본적인 수단이었다. 역대 독재정권들은 교육현장의 일제잔재들을 청산할 의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가주의 교육을 강화해 이를 확대 유지시켰다.
교문에 들어서면 학생주임 교사와 규율부 학생들이 완장을 차고 복장 검사를 했다. 규정에 어긋나면 ‘원산폭격’ ‘왕복달리기’ ‘쪼그려 뛰기’ 등의 얼차려나 구타가 이어졌다. 학교 교문을 통과하는 일은 살벌한 군사훈련소 정문을 통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 일제의 애국조회 장면 교육칙어와 황국신민서사를 외어야 했다. 천황에게 충성과 효도를 다하도록 충효교육이 강조되었다.
ⓒ 민족문제연구소
▲ 1970년대 국민학교 애국조회 장면.
ⓒ 민족문제연구소
교실에서는 담임선생이 정례적으로 두발과 복장 그리고 가방 검사를 실시했다. 규정보다 길면 ‘바리깡’으로 여지없이 머리 가운데를 밀어 ‘경부고속도로’를 내어버리기도 했다.
자치조직인 학생회는 군사조직인 임명제 학도호국단으로 재편되었고, 학생회장은 연대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동등해야 할 학우들이 연대장-대대장-소대장-병졸로 계급이 나뉘어졌다. 일제강점기의 학교 군사교육도 다시 시행되었다. 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해야 했다. 1년에 한 번씩 실시되는 교련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전교 학생들이 최소 한 달 이상 방과 후 훈련에 매달려야 했다.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면 재검열을 받아야 했다. 대학 시험에 체력장 과목을 두어 일제시기 체력검사 항목의 하나였던 (모의) 수류탄던지기도 포함시켰다.
▲ 일제강점기 남학생 군사훈련 장면.
ⓒ 민족문제연구소
▲ 여학생들도 군사훈련을 받았다.
ⓒ 민족문제연구소
▲ 고등학교 군사훈련장면(1974년).
ⓒ 민족문제연구소
▲ 여학생들이 황국신민체조라는 이름으로 검도훈련을 하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유신체제는 애국조회를 특히 중시했다. 일제의 각종 국가주의 의례가 이름과 형태만 바뀐 채 다시 시행되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전교생이 집합해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창해야 했다. 그리고 충효나 반공 또는 시국에 대한 훈화를 반복해 들어야 했다.
교과서도 개편되어 철학 과목은 ‘반공도덕’ 또는 ‘국민윤리’로 바뀌어 안보와 충효가 이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화랑은 일제시기 친일파들에 의해 ‘상무정신’의 귀감으로 악용되었듯이, 이제 ‘멸공통일’의 표상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했다. 찬반 토론도 없이 사실상 만장일치로 대통령을 뽑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거수기 선거를 ‘한국형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억지논리로 정당화했다. 게다가 신라의 화백제도를 그 기원으로 끌어오기도 했다.
▲ 5 16혁명공약. 혁명의 발자취.
ⓒ 민족문제연구소
▲ 이승만 정권 때 나온 우리의 맹세.
ⓒ 민족문제연구소
반공소년 이승복을 비롯해 이순신 장군, 김유신 장군, 신사임당 등 호국을 상징하는 인물들을 충효 이데올로기 교육의 지표로 삼기 위해, 전국의 교정에 빠짐없이 조악한 동상을 세웠다. 이 모든 희극은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박정희의 가부장적 사고가 빚어낸 비극적 현실이었다.
결국 유신체제 하의 학교 교육은 개인 인격의 존엄성에 기반한 민주시민 양성 대신, 국가에 대한 충성이란 미명 아래 1인 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해 오로지 복종하는 기계를 만드는 국가주의 주물공장이었다. 여기에 만연한 군사문화와 체벌은 학생들의 정신세계마저 황폐화시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말죽거리 잔혹사> 등과 같은 문학과 체험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 1936년 부임한 미나미조선총독은 국체명징(천황중심의 국가체제를 분명히 하는 일)을 교육 지표로 내세웠다. 박정희의 국적 있는 교육을 연상케 한다.
ⓒ 민족문제연구소
▲ 황국신민서사(아동용).
ⓒ 민족문제연구소
- 49047548.gif (18.65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