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추억④] 전국민을 통제하는 시대…노래 ‘거짓말이야’가 간첩 신호?
민족문제연구소는 유신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전국순회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다. 6월 9일부터 30일까지 부산 민주공원, 8월 8일부터 9월 9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특별전이 열렸다. 10월에는 고양, 광주, 인천, 울산, 춘천, 서울청계광장, 대구에서, 11월에는 창원, 진주, 원주에서 전시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전시회를 유치하려는 지역 시민단체들은 많지만, 예민한 전시 주제로 인해 예산확보는 물론 전시장조차 구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탓에 서울, 부산, 창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전시회가 패널 야외전시로 진행되며 실물자료는 전시되지 않는다. <오마이뉴스>는 실물전시를 볼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서대문형무소 제12옥사에서 열렸던 ‘유신의 추억전’을 지상중계한다. [편집자말]
▲ 민방위훈련 중 대피장면.
ⓒ 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는 1972년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국민이 스스로 자유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하며, 비상사태에 순응하지 않으면 계엄령을 각오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이러한 위협적 분위기 아래 ’10월유신’을 단행했다. 유신체제는 ‘고도국방’과 ‘총력안보’를 앞세워 1인 종신집권의 길을 열었다.
고도국방은 만주국이 강력하게 표방한 안보개념인 ‘고도국방체제국가’에서 따왔다. 대한민국도 이른바 누란지세(累卵之勢)라 할 안보위기에 처해 있으니, 모든 국민이 전시하의 비상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총력안보’는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에 돌입하면서 구축한 전시총동원체제(총후국방)와, 현대전은 전선과 후방이 따로 없는 총력전이라는 개념에서 나왔다. 총력안보란 ‘군관민(군인, 관료, 국민)’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것을 의미했다.
▲ 일제하 민방공훈련과 군사훈련.
ⓒ 민족문제연구소
이를 위해서는 이른바 국론통일이 필요했다. 반대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동원된 수단은 냉전 이데올로기였다. 유신의 최후 보루로서 반공·방첩은 정권안보를 위한 무소불위의 도구로 기능했다. 유신정권은 문인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일동포유학생간첩단 사건 등 수많은 조작사건을 통해 위기감을 조장했다.
한편으로 불평불만 한마디에 간첩이 되는 세칭 ‘막걸리 반공법’의 피해자도 무수히 생겨났다. “간첩 잡는 아빠 되고 신고하는 엄마 되자” 또는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등 불신을 조장하는 웃지 못 할 각종 안보 표어가 난무했다. 반공을 주제로 한 표어 짓기, 포스터 그리기, 글짓기와 웅변대회를 무더기로 열어 정권안보에 악용했다. 직장이나 학교 그리고 반상회에서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식별하는 요령을 배우고, 수상하면 즉각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이웃이나 친척이라고 신고하지 않으면 불고지죄로 처벌받았다.
▲ 유신시대 반공표어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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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이웃은 서로 감시하는 관계가 되었다. 대학도 사찰대상이었다. 기관원들이 구내에 상주하면서 수업을 참관하고 교수와 학생을 감시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는 불신사회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있었다.
1975년 남베트남이 공산화하자 유신정권은 총력안보 태세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때 민방위기본법을 시행하여 전 국민적인 동원체제를 완비하였으며, 이듬해부터 반상회를 정례화하여 일상적인 주민통제가 가능하도록 조치하였다.
주민등록증은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특정번호를 부여해 ‘요람에서 무덤까지’ 철저히 감시 통제하는 장치였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62년 1월 인구동태 파악과 간첩은신 방지를 구실로 처음 제정된 주민등록법은 1975년 개정을 통해서 현행 ‘생년월일-부여번호’의 13자리 고유번호로 자리 잡았다. 이 제도는 행정편의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통제시스템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 매월 15일은 민방위의 날로 각종 경보를 발하고 대피훈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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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등록이란 괴상망측한 것까지 태동 중이란 사실이다.(중략) 마치 국민을 요시찰인 또는 우범자로 다루려는 것 같은 극히 불쾌한 인상, 심하게 공포심까지 갖게 한다.” – <동아일보> 1965. 12. 8
이런 보도는 일반 시민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었다. 일제의 악법도 반공을 명목으로 부활했다. 치안유지법을 모방한 국가보안법이 한층 개악되었다. 전향공작전담반이 가동되면서 폭력으로 사상을 개조하는 ‘피의 전향공작’도 다시 등장했다. 일제의 보호관찰제도나 사상범예방구금령을 본떠 사회안전법을 시행했다. 만기출소한 비전향자들을 재심사하고 전향을 거부하면 재수감함으로써 장기수를 양산했다.
▲ 일제 말 국민정신총동원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이라는 전시총동원기구가 만들어지면서 10개 가구를 단위로 애국반을 조직했다. 매월 1회 개최되는 애국반회의(반상회)를 통해 각종 시책을 전달하였으며, 그 이행 여부를 검사하고 주민들끼리 서로 감시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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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은 이성마저 삼켜버렸다. 가수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노래 추임새가 간첩과 접선하는 수신호라는 유언비어가 돌아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포장지에 뽀빠이가 그려진 과자 ‘라면땅’이 한동안 가게에서 사라지자, 아이들 사이에는 뽀빠이가 입은 붉은 상의와 푸른 바지가 각각 북한과 남한을 상징하고 팔뚝의 닻 문신이 남침을 의미해서 판매금지 되었다는 ‘걱정스런 소문’도 나돌았다. 정상적인 언로가 봉쇄되면서 ‘카더라 통신’이 유행하는 폐쇄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 5.16군사쿠데타 직후부터 반상회가 운영되었고, 1976년 5월 말부터 매월 25일 ‘정례 반상회의 날’로 지정,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참석하도록 했다. 1면에는 대통령의 담화를 실어 정부시책을 주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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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는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개인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대신 오로지 국가(지도자)에 대한 충성만을 요구했다. 일제시기 각종 협력단체들이 총독부의 시책 홍보에 앞장섰듯이 자유총연맹, 대한반공연맹, 새마을운동본부, 구국여성봉사단, 새마음봉사단 등 다양한 관변단체들이 유신의 외곽 조직으로 충성을 다했다. 국가와 개인을 연결하는 국가동원기구와 어용단체만 존재했을 뿐,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 시민, 또는 단체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이 박정희의 눈에 벗어난다면 가차 없는 박해가 이어졌다. 박정희 시대에 ‘시민’ 아닌 ‘재야’라는 독특한 저항 진영이 형성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오마이뉴스> 2012-11-2[기사원문보기] 간첩잡는 아빠, 신고하는 엄마… ‘살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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