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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치마 입으세요” 팻말 든 여성…누구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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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추억 ⑤] 노래, 문학, 머리, 치마… 단속으로 모든 것 해결




민족문제연구소는 유신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전국순회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다. 6월 9일부터 30일까지 부산 민주공원, 8월 8일부터 9월 9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특별전이 열렸다. 10월에는 고양, 광주, 인천, 울산, 춘천, 서울청계광장, 대구에서, 11월에는 창원, 진주, 원주에서 전시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전시회를 유치하려는 지역 시민단체들은 많지만, 예민한 전시 주제로 인해 예산확보는 물론 전시장조차 구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탓에 서울, 부산, 창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전시회가 패널 야외전시로 진행되며 실물자료는 전시되지 않는다. <오마이뉴스>는 실물전시를 볼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서대문형무소 제12옥사에서 열렸던 ‘유신의 추억전’을 지상중계한다. [편집자말]









  1970년대 미니스커트 단속. 위반하면 길에서 팻말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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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는 ‘금지의 시대’였다. 문화·예술·출판에 대한 각종 심의와 검열 제도를 두어 수많은 금지곡과 금서들이 쏟아졌다.

정권은 1975년 모든 대중가요를 재심사하여 225곡을 금지곡으로 묶었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발표 직후 우리 대중음악의 수준을 일약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명곡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대학가에서 운동가요로 불리자 곧 금지되었다. 










▲ 건전가요부르기 일제의 국민개창운동을 그대로 본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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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나라로>는 대한민국 말고 또 어디에 행복의 나라가 있느냐는 권력층의 불만이 작용해 방송 금지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가수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는 ‘불신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비관적’이란 이유로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건전가요 <나의조국>.박정희 대통령 작사·작곡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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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금지곡은 곧 애창곡의 다른 이름이 되었으며,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는 독재정권을 향한 저항과 풍자의 수단으로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 대응하여 유신정권은 일제말 국민가요 개창운동을 모방, 모든 음반에 건전가요 수록을 의무화하고 관제 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대중의 정서마저 통제하려 기도했다.










  1970년 4월부터 ‘우리시대의 예언자’로 불렸던 함석헌이 역사의 주인을 씨알(민중)이라고 주창하면서 발행한 월간지 <씨알의 소리>. 1970년 5월 2호를 펴낸 후 문공부로부터 등록취소를 받았다가 1971년 재발행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고 전투적인 잡지로 평가받았다. 특히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를 전후한 가장 엄혹한 시기에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1980년 7월 통권 95호로 등록이 취소되었다가 1989년 복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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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성립 이래 문인이나 언론인이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으며, 그에 비례하여 어용화하거나 변절한 경우도 많았다. 미군의 횡포를 고발한 남정현의 소설 <분지>는 최초의 문인 필화사건이었다. 김지하는 1970년 권력층의 비리와 부패를 풍자한 담시(譚詩) <오적>을 발표한 게 문제가 되어 구속되었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이래 반공법 및 긴급조치에 의해 판금된 출판물은 대략 50여 종이다. (음란도서 제외) <전환시대의 논리> <민족지성의 탐구>와 같은 교양서도 금서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금서일수록 베스트셀러가 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 위해 경찰은 불심검문을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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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의 경우 출판 전에 검열을 해 문제가 되는 내용을 빼고 재편집을 하게 해 흔적이 남지 않도록 위장했다. 검열을 통과한 내용이라도 출간 후 문제가 있다 싶으면 필자와 편집자를 처벌했다. 대표적인 반유신잡지인 <사상계> <씨알의 소리> <창작과비평>은 서점에서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권위주의 정권은 언론자유를 용납할 수 없었다.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전개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양심적인 기자들은 전원 해직당했고, 이후 족벌언론들은 권력이 베푸는 특혜를 누리면서 유신체제에 순응하는 길로 나아갔다.










  장발단속. 머리카락이 귀를 덮으면 위반이 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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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는 헌법상의 기본권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람의 취향과 정서마저 길들이려 한 폭력적 가부장제였다.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은 1970년대 세계사의 희극이었다. 경찰은 ‘장발장'(장발청년)을 잡아 머리 위에 ‘고속도로’를 내는가 하면 여성의 허벅지에 줄자를 대고 치마길이를 쟀다. 미니스커트 단속에 걸린 여성은 “긴 치마 입으세요”라는 팻말을 들고 길 한가운데 서 있어야 했다. 역에서는 경찰이 퇴폐향락풍조를 추방한다는 명목으로, 놀러가는 청년들의 기타를 압수했다.

이러한 폭력이 가능했던 것은 천황제 파시즘의 적자(갓난아기 : 백성)가 잘못된 길을 가면 이를 바로잡는 것이 아버지의 도리라는 기괴한 논리를 박정희가 신봉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의 풍속을 교화시킨다며 규제와 단속을 일삼은 조선총독부의 정책과 일본군부의 국가주의 통제를 내면화한 박정희는 국민의 방종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단 자신과 측근에게만은 예외적으로 관대했다. ‘방종’은 특권층에게만 허용되는 일탈이었다. 

유신시대 도입된 각종 규제와 검열은 국민 전체 삶을 획일화하고 황폐화시켰으나, 지금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면서 사회적 갈등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오마이뉴스> 20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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