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는 어떻게 역사를 왜곡했나]
<1> 우리는 왜 뉴라이트를 수구세력이라 부르는가?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친일·독재미화와 교과서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
정부가 당초 일정을 바꾸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대통령선거운동이 본격화되는 11월 22일로 앞당겨 개관하기로 하였다. 역사박물관 건립위원 대부분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군사쿠데타를 미화하는 뉴라이트 계열 인사다. 게다가 초대 관장으로 유력시 되고 있는 인물은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자문위원 출신인 이배용 전 국가브랜드위원장이다. 그는 작년에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교육과정개정 초기단계에서 집필기준과 검정기준 마련까지 모든 단계에서 관여하였으며, 그 결과 이승만 독재, 박정희 중심 5.16군사정변, 전두환 신군부정권 등 독재와 관련된 기술이 사라짐과 동시에 민주화를 위해 국민들이 희생해온 역사인 제주 4.3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과 관련된 기술도 모조리 삭제되는 등 민주화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한 집필기준이 탄생하였다. 특히 현대사 부분에서 ‘민주주의’라는 표현이 ‘자유민주주의’로 바뀐 것은 정치편향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정감사 과정에서 드러난 전시 내용은 전체적으로 태동, 기초 확립, 성장과 발전, 선진화와 세계로의 도약 등 ‘성공신화’로 구성해,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역사박물관 개관 목적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폄하하는 한편 식민지근대화?개발독재?독점재벌을 미화하는 뉴라이트역사관을 국민들에게 홍보하려는 데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 해당하는 제3전시실(‘성장과 발전’)의 면적은 다른 전시실보다 40% 이상 규모가 크다. 역사박물관이 개관하자마자 박정희 홍보관으로 전락해 박근혜 후보 운동에 이용될 운명에 있다. 참으로 민주주의의 절체절명의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항일독립운동이 추구했던 공화주의와 평등주의의 정신, 그리고 제헌헌법이 표방했던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 내용 등을 소개함으로써 수구?냉전세력의 홍보관으로 전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자 한다. 글 구성은 다음과 같다. <뉴라이트 역사왜곡 비판> 1. 총론 2. 일제강점기 3.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이승만 정권 4. 박정희 정권 5. 북한에 대한 인식 필자는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 학술단체협의회와 친일·독재미화와 교과서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
– 총론
한국 근·현대 100여 년은 침략과 저항, 분단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 근대화와 산업화를 경험하였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뉴라이트를 비롯한 수구?냉전세력은 친일-친미-분단-반공-독재로 얼룩진 한국근현대사를 독립운동과 민족통일, 사회정의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역사인식이 좌경화되었다고 비난한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실패한 역사로 규정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의도적으로 훼손·폄하하는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 근·현대사를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20세기 세계사의 모범국가=성공국가라는 관점에서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에 기초를 둔 성공한 역사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인식을 담은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기파랑, 이하 뉴라이트교과서)가 2008년 3월, 이명박정부의 출범과 함께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뉴라이트는 친일·분단세력과 반공·독재세력을 한국 근·현대사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민주주의를 축소·왜곡하고 친일·독재를 찬양함으로써, 기억의 공공화와 역사정의의 정식화를 파괴하는 수구?냉전적인 역사의식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다.
1. 사회적 책임을 부정하는 원자론적 개인관
뉴라이트교과서는 책머리에서 “우리는 이 책에서 ‘우리민족’ 대신에 ‘한국인’을 역사적 행위의 주체로 설정하였다”(5쪽)라고 하여, 탈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민족보다는 자유, 인권, 시장 등 보편적 가치를 토대로 역사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역사의 주체를 민족이라는 집단보다는 자유를 본성으로 하는 개별 인간으로 보자는 입장이다. 이들이 말하는 역사 행위 주체로서의 한국인이란 근대적인 자아로서의 ‘개인’, 즉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적인 권리를 가진 존재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자유를 본성으로 하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해 놓고 그 전제 하에서 역사를 서술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이기적인 것이므로, 이 이기심을 살려 두어야 무한한 발전의 동력이 나온다는 입장이다.
뉴라이트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옹호하는 이기심이란 자본가의 탐욕을 말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긍정하고 이를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이윤의 무한추구’를 위해 끊임없이 경쟁자들을 도태시키고 자신은 살아남는 것이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다. 자본주의는 경쟁이 인간사회의 발전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며 무한경쟁을 당연시 하고, 경쟁에서 탈락하는 약자의 도태를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
경쟁이 자연의 법칙이고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이론은 18세기부터 부르주아 사상가들이 펼친 주장이다. 인간은 원래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존재이고, 박애나 도덕이나 사랑은 종교적 사상으로 본질을 숨기려는 위선이라는 것이다. 경쟁이 없던 사회는 없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에 들어서자 경쟁은 인간을 정의하는 이념이 되어버렸다. 경쟁의 논리가 자본주의의 독특한 인간 이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이 약육강식·적자생존의 자연과정을 인간사회에 적용한 사회진화론을 차용하여 자신들의 계급이익을 옹호한 것처럼, 뉴라이트 역시 시장경제체제의 작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신자유주의이념을 기본 신조로 삼아 1%미만의 재벌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독식구조를 자연의 질서로 옹호한다. 재벌중심의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승자독식의 경향이 강화되게 마련이지만,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이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명제를 뉴라이트는 고수한다.
그러나 이기심과 경쟁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는 입장은 인간을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로 떨어뜨리는 저급한 인간관이다. 인간의 행동을 물리학의 법칙과 유사한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충동과 욕망의 산물로 보는 인간관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칸트의 말처럼, 인간은 이성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능력이 있으며 이는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다.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 덕분에 인간의 삶은 특별한 존엄성을 지니며, 욕망에만 충실한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자아실현을 위한 노력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인간은 개인 이익의 극대화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인 사회성도 부단히 키워왔다.
뉴라이트는 개인들이 우선적 단위이고 사회를 개인들에 의한 2차적 산물로 보거나 혹은 개인들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을 견지한다. 고립적인 개인을 생각과 행동의 절대적 원천으로 간주하는 개인주의적 관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공동체와 전통이 요구하는 도덕을 거부하는 원자론적 인간관은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생각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타인과 연대의 필요성을 부정하며, 빈부의 격차를 포함하는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관점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나 이외의 타인을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의 일부로만 이해한 철학은 서구 근대 사회의 참혹한 억압과 폭력의 근거가 되었다.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현대 문명의 전체주의적 속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학의 기초를 제시한 이가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이다. 그는 서구 철학의 전통적인 존재론을 비판하며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윤리설을 발전시켰다. 그의 사상적 지향은 “윤리학은 존재론에 앞선다”라는 표현에 압축되어 있다. 레비나스는 인간이 의식을 통해 인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이 모든 의미 있는 것의 주체도 아니고 생각하는 자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식의 대상도 아니고 의지의 대상도 아니며 논리와 과학과 객관성으로 담아낼 수도 없다고 한다. 인간은 다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날 뿐이다. 인간에게 다가가는 길은 본질이나 본성의 추구로서가 아니다. 내가 인간으로 깨어나는 순간은 내 존재의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아니고,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내 존재의 권리가 추궁당하는 충격적인 깨달음의 순간이다. 타자는 단지 공존해야 할 ‘다른 자아’가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자이다.
나라는 인간이 나의 의식과 생각의 산물이 아니고, 세상과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주장은 개인은 원자론적 개인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개인은 사회적 전체와 유기적으로 연관된 도덕적 주체인 것이다. 사회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 이는 개인들이 없으면 사회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권리는 사회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의 권리는 사회와 별개의 개인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동 이익에 대한 책임 없이는 권리도 있을 수 없다. 특히 공동체로부터 혜택을 받은 자들은 그들의 이익에 상당하는 책임과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원칙이 중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체의 발전이 개인의 발전이 되고 개인의 발전이 전체의 발전으로 되는 사회적 원칙이 관철되어야 한다. ‘개인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2. 자유방임주의 옹호
뉴라이트는 국가가 시장의 질서를 왜곡한다며,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자유방임주의를 지지한다. 이들은 자발적 교환을 허용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길이며, 자유시장에 간섭하는 법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한다. 개인의 경제 활동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 사회적 부가 창출되며, 부의 공정하고 효율적인 배분은 시장기구에 의해 자동적으로 실현된다는 입장이다. 국가는 사유재산권과 계약의 자유 등 시장 원리를 보장하는 관리자의 역할에 그치고 경제주체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 ‘큰 시장,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자본주의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는 중상주의 시대에 국가가 적극적 경제 정책을 구사하는 풍조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걸쳐 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전개되어온 지적 운동은 자유가 궁극적인 목표이고, 개인은 사회를 이루는 궁극적 실체임을 강조했다. 자유주의는 대내적으로는 경제문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줄이고 개인의 역할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자유방임을 지지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세계 각국을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유무역을 지지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대의제 정부 및 의회 제도의 발전, 자의적 국가권력의 축소 및 개인이 누리는 시민적 자유의 보호를 지지했다.
그러나 19세기를 지나면서 산업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시장이 엄청나게 확대되고 국가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자유시장 원리가 거의 완벽하게 실현되는 단계에 이르자, 그 한계에 대한 성찰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시장에 대한 규제와 국가개입을 옹호하고 평등을 강조하면서, 급진적 자유주의라 할 수 있는 후기자유주의가 등장하였다. 후기자유주의는 전후 이른바 복지자본주의의 이론적 선구라고 할 수 있다. 즉 혼합경제와 복지국가를 통한 제어된 자본주의의 이상은 후기자유주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의 확산이야말로 복지와 평등을 진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도라고 보았다면, 20세기 후기자유주의자들은 복지와 평등이 자유의 전제조건이거나 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선진 각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영국에서는 노동당의 사회적 합의 노선을 통하여, 미국에서는 뉴딜자유주의와 존슨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노선을 통하여 구현된 바 있다. 독일에서는 이 급진적 자유주의 노선이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로 표현되었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시장질서의 기본적인 수용과 국가에 부여되는 시장질서 유지기능 강조, 국가에 의한 사회정책의 지속적 추구 등의 특징을 지니는 노선이다. 이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은 독일 사민당의 노력과 결합되어 전후 독일 경제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이태리에서는 새로운 자유주의적 관념을 수용, 이를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라 불렀다.
3. 기본권으로 격상시킨 재산권
뉴라이트는 재산권을 인간의 기본권 중 최고의 권리로 내세우며, 다른 권리들은 이 사유재산권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재산권을 역사 속에서 보장받은 권리가 아니라 초역사적 정당성과 규범성을 지닌 인간의 자연권으로 선언하고, 사적소유권의 신성함을 침범할 수 없는 성역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인간본연의 권리로 격상된 재산권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다. 국가권력은 이 천부의 권리를 보장하기에 적합하도록 작동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적소유권의 무제한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뉴라이트교과서는 “대한민국은 국민의 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시장경제체제로 출발하였다.”(148쪽)라고 하여, 마치 대한민국이 사유재산권의 절대성을 보장하는 이념을 근간으로 출범한 것처럼 주장한다. 심지어 제헌헌법의 재산권 조항이 식민지 지배유산, 특히 일제 민법의 연속이라는 주장까지 제기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근간이념인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박사는 “재산권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고 법률로써 재산권의 내용을 정하고 법률로써 그 한계를 정해 가지고 그 법률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재산권은 용인된다.”(헌법제정회의록, 147쪽)라고 하였다. 재산권의 사회적 통제는 사회적 자유를 위해 필수적이므로, 사적소유권은 신성불가침한 것이 아니며, 다수 대중의 이익에 배치되면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유재산권의 신성불가침을 주장한 원래의 근거는 사유재산이 약탈, 전쟁, 사기, 강제가 아닌 자신의 노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소유물에 노동이라는 정의가 구현되어 있으므로 보호받아야 할 신성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전하면서 자본주의적 사유재산권을 더 이상 자신의 노동에 의거한 것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서, 재산권의 사회적 의무성을 주장하는 사상이 19세기 말엽 대두하였다. 후기자유주의자의 지적 대변자인 홉하우스(Leonard Trelawny Hobhouse:1864-1929)는 재산권은 공동선의 요구에 종속되어야 하며, 개인의 소유권이 개인의 성장에 본질적이라면 모든 시민들은 그 소유권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재산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며 부는 부분적으로 집단적 창조물이며, 따라서 소득세는 개인 노동 산물의 국가 몰수가 아니라 노동 산물의 사회적 재흡수라고 주장했다.
영국 철학자 겸 정치 사상가인 그린(Thomas Hill Green: 1836-1882) 역시 재산권은 순수이 개인적 권리라기보다는 사회의 공동적 이해에 기초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린은 시장의 경쟁적 측면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시장의 자유경쟁은 사회적 약자를 더욱 더 낙오시키므로 책임능력이 결여된 사회적 약자에게 시장은 공정하지도 자유롭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린은 세상에서 살 길을 찾을 수단이 없는 인간은 자유롭지 않으므로, 도덕적 행동을 위한 개인의 자원을 해방시키기 위해 국가의 힘이 행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린은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총체적으로 계발하기 위해, ‘적극적 자유’ 즉 무엇을 하기 위한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자유를 구속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힘으로 규정하여, 그러하기 위해선 능력이 있어야 하며,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능력이 제한된 계층에게 국가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개입 문제와 관련하여, 그린의 우려는 너무 많은 개입이 아니라 너무 적은 개입이었다.
후기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한 ‘소유의 공공성’은 20세기에 들어 사회국가의 이념을 가미한 독일 바이마르 헌법(Weimarer Verfassung)에서 명문화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국가가 개입하여 부당한 사회질서를 수정하며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헌법적의무로 여겼다. 이를 위해 경제체제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주된 기본권은 사회적 기본권을 강조하였다. 사회적 기본권과 자유권의 조화를 꾀하며, 재산권은 불가침의 권리 즉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 상대적 권리로 간주하였다. 바이마르헌법은 19세기적인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면서 20세기적 사회국가 이념을 취하여 근대 헌법상 처음으로 소유권의 의무성(사회성)과 재산권행사의 공공복리 적합성을 규정하고, 인간다운 생존(생존권)을 보장하면서 경제조항을 별도로 규정함으로써 현대 헌법의 전형이 되었다.
바이마르헌법의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 제헌헌법 역시 재산권을 보장하되 소유의 공공성을 강조하였다. 헌법 초안자인 유진오박사는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언급하며 “재산권 절대불가침의 사상은 국민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153조를 들었다. 대한민국도 근대에 이르러 절대시되던 재산권을 상대화 하는 한편, 그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는 헌법적 의무를 지웠다. 따라서 뉴라이트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시장경제체제로 출발하였다.”라는 주장은 헌법정신에 대한 모독이다.
4. ‘냉전반공주의’로 전락한 자유민주주의
뉴라이트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조화로운 사회발전의 영원한 자연적 이상으로 간주한다. 한국사회 자본가 권력의 현재적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뉴라이트는 “식민지시기에 걸쳐(…)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해온(…) 세력과 해방 이후 미국을 따라 들어온 자유민주주의 국제세력의 결합으로 대한민국이 성립하였다.”(교과서, 134쪽)라고 하여, 대한민국의 출범이념이 자본주의 사회구성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고 주장한다.
뉴라이트는 한국 근·현대사를 자본주의 발전의 단선적 역사로 본다. 뉴라이트는 개항 이후의 한국사를 ‘문명화’의 역사라고 규정하는데, 그들이 제시하는 문명의 요건이란 사유재산권과 계약의 자유, 시장경제 등 바로 자본주의의 요건이다. 문명화된 사회란 곧 자본주의사회를 의미한다는 것이 뉴라이트의 입장이다. 여기서 뉴라이트가 말하는 한국의 문명화를 이끈 역사의 주인공이란 다름 아닌 자본주의화에 잘 적응한 자들을 일컫는다. 뉴라이트가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을 내세워 일본의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것도 조선에 자본주의 문명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뉴라이트는 역사 속에서도 승자의 입장을 떠받들고, 현실 속에서도 강자의 입장을 변호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뉴라이트는 현실의 자본주의사회를 초역사적 자연 질서로 보고, 이를 현재의 시점에서 무조건 그리고 영구히 동결시키려 한다. 동구혁명(1989-91년)과 소련의 해체(1991-92년)로 현실 사회주의가 사라진 것이 자본주의의 절대적 정당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자본주의는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변하지 않는 정당성이며, 세계사는 자본주의로의 일방통행만 있을 뿐이다. 변화의 관점을 중시하는 사회적 비판의식이나 창조적 부정의 정신은 초동단계에서 진압해야 한다. 더 나은 삶을 꿈꾸는 ‘불온한 현실’은 있을 수 없으며 또 있어서도 안 된다. 뉴라이트는 현실의 한 경향을 이상화·절대화하고 그것을 미래까지 확장한다. 이러한 인식을 담고 있는 뉴라이트교과서는 역사적 사실과 시대적 평가를 다루는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를 내세워 한국사회 자본가 권력의 현재적 이해관계를 옹호하려는 전형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담론매체이다. 이 때문에 뉴라이트를 수구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뉴라이트의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옳지 않다.
첫째, 대한민국이 제헌헌법을 통해 표방한 민주주의는 단순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는 2차 세계대전 후 냉전 상황에서 미국 중심의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체제수호의 이념으로 널리 사용되고 전파되었다.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주요 내용은 보통선거제도, 정당제도, 대의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국가권력의 제한, 개인주의, 다원주의, 시장주의, 재산권의 강조 등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제하의 민족운동이나 해방 이후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꾸준히 발전되고 숙성되어온 역사적 실체로서 이해해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한국적 현실을 반영한 역사성이 있는 민주주의인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전통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민주공화국 수립을 향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해해야 한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것은 바로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일찍이 독립운동세력이 끈질기게 추구해 왔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이었다.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박사는 대한민국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함께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입국의 기본으로 채택하였다”라고 하였다. 자유방임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대한민국의 근본이념으로 채택했다는 것이다. 제헌헌법은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을 구현하는 방법으로 사회적 시장경제질서 확립, 사회적 약자의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 사회적 강자의 재산권과 계약의 자유제한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둘째, 뉴라이트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존중하고, 다원성과 다양성의 존중을 기본으로 하는 리버럴 데모크라시(liberal democracy)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모든 억압, 착취, 배제, 차별 등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인데, 뉴라이트가 말하는 자유민주주란 민주주의 개념에 담긴 개혁성과 혁명성을 탈각시키기 위해 ‘자유’를 덧씌워 민주주의를 옥죄기 위한 것일 뿐이다. 뉴라이트는 자유를 반공으로, 민주주의를 반공주의와 동일어로 오용하여, 자유민주주의를 ‘냉전반공주의’와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 초대 대통령 이승만. |
실례로 뉴라이트교과서는 “이승만의 정치이념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였다.”(같은 책, 158쪽)라고 하여,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짓밟으면서 12년간 장기 집권한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미화하였다. 다 아다시피 이승만은 독재정치와 부정선거로 일관하다가 4.19혁명을 통해 권좌에서 쫓겨난 독재자이다. 4.19 당시 구호는 “민주주의를 사수하자”였으며, 이승만 독재정권을 물리친 4.19혁명은 한국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발적으로 전취한 자유민주주의혁명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전혀 자유민주주의적이지 않은 독재자 이승만을 뉴라이트가 자유민주주의자라고 하는 추켜세우는 까닭은,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에 철저했던 만큼,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같은 책, 158쪽)라는데 있다.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뉴라이트에게 있어, 자유민주주의는 반북·멸공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단지 반공주의가 갖는 부정적이고 진부한 뉘앙스를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긍정적 뉘앙스로 대체해보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뉴라이트를 냉전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구·냉전세력인 뉴라이트는 자유민주주의를 냉전반공주의로 치환하면서 고유의 성역을 만들었다. 이들은 반북주의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찬양하고 독재정권을 미화한다. 그리고 의회정치를 부정한 이승만의 독재, 초헌법적인 박정희의 유신쿠데타가 북한공산집단으로부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변호한다.
뉴라이트의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주의를 기본 동력으로 하며 억압과 배제를 기본 속성으로 하는 ‘전투적 민주주의’다. 체제수호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사고는 물론 역사의 진실까지도 지배한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인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고 지배체제에 무조건 복종하기를 요구한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며, 적과는 사생결단의 한바탕 싸움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저러한 적대범주를 제멋대로 설정한 다음, 누구든지 이 범주에 든다고 추정되면 설사 헌법의 틀 안에서 합법적으로 행동하더라도 관용의 손길을 거둔다.
뉴라이트의 냉전반공주의는 결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고 오히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배반이었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원리들은 희생되고 무시되었다. 예컨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늘 반북과 멸공을 통한 수호의 대상이었지, 결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할 민주주의로 간주되었던 적이 없었다. 대한민국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더 민주화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가자는 주장을 하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체제부정론, 혹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친북용공론으로 몰아가 탄압하였다.
5. ‘선 성장 후 민주화’론의 망상
뉴라이트는 대한민국 60년사를 ‘건국의 시대'(1948~1960), ‘산업화의 시대'(1961~1987), ‘민주화의 시대'(1988~2007)로 구분하고 2008년 이후를 ‘선진화의 시대’로 설정한다. 한국 현대사를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의 네 단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각각의 시기에 핵심 의제를 강조함으로써 해당 시기에 의제를 수행한 사람들과 그 정부를 높이 평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즉, 건국의 시기에 이승만 정부, 산업화의 시기에 박정희 정부, 민주화의 시기에 노태우 정부, 그리고 선진화의 시기에 이명박 정부가 바로 그것이다.
뉴라이트는 단계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산업화가 민주화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산업화가 되었기에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87년 6월항쟁에 대거 참여하면서 민주주의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선 산업화, 후 민주주의’ 도식으로, 결과적으로 노동자나 농민 등 민주화운동세력이 아닌 독재자나 재벌이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와 경제는 별개로서 서로 별다른 연관이 없다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하다. 양자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민주화와 산업화는 선후관계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선 성장, 후 민주화’론은 비현실적 논리이며 비상식적 도식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사실상 민주화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성장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양자가 동시에 병행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도 자명하다. 민주주의 발전과정은 이미 산업화가 발생되는 1960년대부터, 어떻게 보면 산업화의 본격적인 과정보다 더 먼저 이루어졌다. 4.19혁명은 1960년대 초반 이후의 산업화과정보다 더 먼저 일어났고,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민주화도 계속 진행되었다. 게다가 양자의 병행 발전은 사회적 비용을 덜 들일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민주화를 통해 사회구성원의 동의와 자발성을 촉진하는 사회 환경이 조성되면 노동생산성이 높아지고 사회적 비용이 감소한다. 경제발전이라고 할 때 외형적인 경제성장의 속도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지속가능성, 내적 토대의 안정성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민주화의 뒷받침이 중요하다. 민주주의 없는 경제발전은 정치, 사회적으로도 문제이지만, 경제적으로도 문제를 야기한다. 왜곡된 분배구조는 궁극적으로 경제발전을 저해하며, 그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은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에서 분배가 제일 잘된 시기는 통계상 1987년에서 1992년이다. 그때 분배도 잘 이뤄지고 경제도 연 7~8% 성장했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노동조합의 힘이 세져서 가능해진 일이다.
또한 민주화와 산업화를 분리해서 보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있다. 산업화가 되어야 민주화가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면, 산업화를 일구었다고 주장하는 박정희의 인권탄압과 독재는 민주화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시기에 자신들의 생존, 혹은 경제민주화나 사회변혁을 위해 투쟁한 노동자 농민들의 투쟁사는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뉴라이트는 산업화 시기 이른바 민주화운동으로 자처한 좌익 세력들의 발호는 산업화의 걸림돌이 되었을 뿐이라고 본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은 경제상 비용손실만 초래하여 산업화·경제성장의 장애가 되었다는 게 뉴라이트의 생각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이 근대문명화의 길로 발전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프레시안>201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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