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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흘러간 과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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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으로 현재 YTN 라디오 ‘권기봉의 걸으며 생각하며’와 MBC ‘도시탐험M’을 진행하고 있는 권기봉 회원이 최근 발간한 새 책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에 실린 것으로 전재를 허락해 준 권 회원께 감사드린다. – 엮은이


 


독재, 흘러간 과거가 아니다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과 신당동 ‘박정희 가옥’을 찾아


권기봉 서울서부지부 회원·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


 


유럽에서 가장 낙후했던 봉건국가를 단 30년 만에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세계 2위의 산업국으로 발전시킨 인물이 있다. 그는 중공업 위주의 발전 전략을 택해 중단 없는 경제성장을 도모했다. 부족한 노동력은 2500만 세대에 이르는 농민들을 도시로 이주시킴으로써 보충했다. 국산품 애용을 유달리 강조했던 그는 수입을 억제하는 동시에 강력한 수출드라이브를 걸기도 했다. 성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1928년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작한 이후 10년 만에 전력 생산량이 8배로 증가했으며, 철강과 석탄, 원유, 시멘트 생산량은 각각 5배, 4배, 3배, 2배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일본이 84퍼센트 성장한 데 반해, 이 나라는 무려 497퍼센


트의 성장세를 보였다. 통계가 과장될 수 있음을 감안해도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성장이었다. 심지어 1950년대 말에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까지 했다.


그 지도자의 이름은 바로 스탈린이다. 세계 정치 지도자 가운데 가장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해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처럼 탁월한 지도력의 이면이 폭력과 인권 탄압으로 얼룩져 있는 인물 또한 스탈린이다.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2000만 명에 이르는 반대파를 숙청했으며,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비밀경찰을 동원해 사회를 통제했다. 안보상의 이유로 카레이스키(고려인)를 비롯한 독일인과 체첸인 등 3000만 명 이상을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또 중공업 도시로의 이주 정책을 따르지 않는 농민들은 집단농장으로 끌고 가거나 아예 사살해버렸고, 그중 1000만명을 굶겨 죽였다. 그가 이와 같은 공포정치를 하면서까지 추구한 것은 바로 ‘경제성장’이었다.


사실 스탈린이 그토록 따라가려고 했던 서구 사회의 ‘근대’라는 것은 산업혁명을 통한 ‘경제성장’과 시민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함께하는 발전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서구를 추격하기 위해 택한 방식은 오로지 경제성장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행되는 여러 부조리는 그저 부수적으로만 취급되었다. 이것이 스탈린이 세계 역사상 만인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독재자 반열에 이름을 올린 이유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스탈린식 경제성장’을 그리워하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오늘날의 한국이다.


‘가운뎃점’을 넣기는 했지만…


2012년 2월 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와의 화해’ 차원에서 국고 지원을 결정한지 13년 만의 일이다. 기나긴 사업 기간과 여덟 차례에 이르는 공사 중단이 말해주듯, 그 과정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일제가 만든 꼭두각시 나라인 만주국 장교가 되어 항일 세력을 토벌하고 독재까지 했던 사람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교육시킬 수 있겠습니까”라는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의 지적처럼, 친일부역 외에 독재의 대명사와도 같은 박정희 대통령을 기념하는 시설을 짓는다는 것은 큰 논란거리였다. 박한용 실장은 이어 무턱대고 경제성장만하면 된다는 논리를 비판했다.


 


사진 설명 : 우여곡절을 거치며 사업 추진 13년 만에 개관한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인물에 대한 평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18년 6개월 동안이나 독재를 했어요. 독재의 명분으로 조국 근대화를 들었는데, 그럼 앞으로 근대화나 산업화를 이루려고 독재하겠다는 사람이 나와도 된다는 건가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이집트의 독재자 카다피도 모두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야기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이들에게 독재를 해도 기념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칠 수는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경제 발전의 주체는 시민사회와 노동자들이었지 독재자가 아니었습니다. 어서 폐관을 하거나 이름을 바꿔 시민들의 도서관으로 돌려줘야 합니다. 


건물 이름에 가운뎃점이 들어간 이유도 그 때문이다. 건립을 주도한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측에서는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이라 이름 붙이고 싶어 했지만, 서울시가 제동을 걸었다. 자칫 독재자를 미화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가운뎃점을 찍기는 했지만 박 대통령의 ‘과過’는 외면한 일방적인 우상화의 의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부 전시물들은 하나같이 박정희 전 대통령 찬양 일색이다. 새마을운동과 중화학공업 육성 그리고 경제성장의 성과만 내세우고 있을 뿐, 그 이면에서 벌어진 극심한 노동 착취와 인권 탄압, 막개발과 사회 불평등의 고착 문제 그리고 그가 정략적으로 조장한 이후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지역감정에 대해서는 일절 말해주지 않는다.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이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을 넘어 ‘박정희 미화도서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헌법을 부정하는 자, 누구인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맞닥뜨리는 거대한 ‘존영’을 지나면 ‘18년 6개월 동안의 업적’을 담은 동영상을 볼 수 있으며, 이어서 “5·16혁명은 민족중흥과 근대화혁명”이라는 문구가 적힌 전시물을 만난다.


 


사진 설명 : 한 국가의 지도자 치고 공功과 과過가 없는 이가 없지만,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은 오로지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3·15부정선거에 의한 4·19혁명으로 인한 자유당 정권의 붕괴와 이어진 민주당 정권의 무능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의 정풍과 정군이 절실히 요구되었음. 당시의 모든 정세와 환경이 혁명이 생길 수 있는 요인을 유발함.


4·19혁명 후 시위의 남발과 혼란으로 세계은행 가맹국 중 101번째의 빈국으로 가난과 굶주림, 실업에 시달려 퇴보와 좌절이 계속됨.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의 지휘하에 정치, 민족중흥과 근대화를 목표로 사회체제를 개혁함.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주장이며, 모순은 없는가. 일단 반민주적인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4·19를 “혁명”이라 표현한다면, 그런 민의의 결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을 뒤엎은 5·16은 “군사정변”이나 “반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반대로 5·16을 “혁명”이라 부르고 싶다면 4·19는 “폭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둘은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난 1999년 ‘장면 박사 탄신 100주기 추모미사’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진 설명 :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2공화국 출범 경축식에서 국군 분열식을 받고 있는 윤보선 대통령 내외(좌)와 장면 국무총리 내외(우).


5·16군사정변를 일으킨 사람들의 말처럼 5·16 직전에 나라가 붕괴 직전에 있었는가? 혼란의 위기에 있었는가? 정반대입니다. … 장면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1개월도 될까 말까 한데 어떻게 부패할 줄을 알고, 어떻게 무능할 줄을 알고, 어떻게 공산당이 나라를 지배할 줄을 알겠습니까? 이것은 나중에 군사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붙인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5·16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신문지 양면에 걸쳐서 깨알 같은 글로 민주당의 부패상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군사재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어느 장관이 외국 출장 가 있는 동안에 누가 중고품 냉장고 하나 갖다 놓은 것만 유죄가 되고, 나머지는 전부 무죄가 되었습니다. 5·16 직전에 그렇게 천하를 뒤엎다시피 떠들어댔던 사건이 결국 군사정권의 손에 의해서 무죄가 되었습니다. 부패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또 무능한 정권이 어떻게 질서를 회복해서 5·16 직전에 거의 안정된 나라를 만들었겠습니까? 무능한 정권이 어떻게 해서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겁이 나서 못하던 지방자치제를 과감하게 실시하게 되었습니까? 그뿐입니까? 장면 정권은 국토건설단을 발대시켜 전 국민의 에너지를 국토 재건에 투입하는 일을 시작해서 돌아가신 장준하 선생께서 그 단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5개년 계획을 수립해서 나라경제를 바로잡는 개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쿠데타가 났는데, 군사정권이 그 5개년 계획을 가져다가 표지만 바꾸어서 그대로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능한 정권이 어떻게 이런 준비를 하겠습니까? 모두가 나중에 붙인 이유가 된 것입니다.


1963년에 출판한 《한국군사혁명사》 제1집 상권을 보면 실제로 군사정변 세력이었던 김종필과 김형욱, 오치성, 길재호 등 한 무리의 군인들이 1960년 9월 10일 서울 충무로에 있는 요리집 충무장에 모여 정권을 뒤집을 모의를 했다고 적혀 있다. 그날은 장면 정권이 내각을 구성한 지 고작 ‘18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혁명’의 이유로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부패, 사회 혼란을 갖다 붙이기에는 누가 봐도 너무 일렀다. 혁명의 이유로 내세운 것들이 결국 핑계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 헌법조차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로 시작하는데도,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는 5·16군사정변을 시대가 요구한 ‘혁명’이었다면서 반헌법적인 강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외에 ‘생애’를 전시해놓은 제3전시실도 이곳이 ‘역사기념관’이 되기에 얼마나 함량 미달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소년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인간 박정희’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강력한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나라를 통치하던 통치자의 모습 뒤에는 사람을 좋아하고 아꼈던 인간적인 모습이 있다. 문경보통학교 교사 재직 시절 아이들을 교육하며 걱정하던 모습은 훗날 집권자이면서도 국민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눈물짓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농번기에는 농부들과 함께 농사를 끝내고 막걸리를 즐기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가족들과 함께 여가를 즐기거나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즐겼으며,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즐겨 편지를 쓰기도 했다.


어디에서도 그의 생애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일본군 장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를 테면 교사로 일하던 스물세 살 시절, 만주국 군관 선발시험의 응시자격 연령이 16~19세라 지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자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한 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써 보내는 등 ‘3수’를 하면서까지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혈서와 함께 보낸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하겠다는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도록 충성을 다 바칠 각오입니다. … 한 사람의 만주국 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쓴 편지 역시 이곳에는 전시되어 있지 않다.


 


사진 설명 :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혈서’ 지원한 사실을 보도한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滿洲新聞> 기사. 이 기사는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한 ‘유신’이후 그가 실제 즐겨 마신 술은 막걸리가 아니라 서민들은 구경하기도 힘든 양주 ‘시바스 리갈’이었다는 이야기도, 국민의 세금으로 궁정동과 한남동을 비롯해 모두 다섯 곳에 ‘국립 룸살롱’을 만들어놓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졌다는 이야기도 물론 없다. 해방 뒤에는 국군에 입대해 2년여 동안 남로당 활동을 했던 그였지만, ‘좌익’ 혐의로 체포되자 군 내부에 있는 남로당원 동료들의 명단을 군 수사기관에 넘겨 목숨을 부지했던 ‘배신의 역사’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축재蓄財’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없다. 외려 “박 대통령은 ‘자손을 위해 미전美田을 사지 않는다’는 일본 한시를 자주 암송하곤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이 1남 2녀의 자손을 위해 남긴 재산은 대통령이 되기 전 살았던 서울 신당동 집 한 채뿐이다”라거나 “박 대통령의 개인적 청렴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러닝셔츠가 해지도록 입고 허리띠도 너덜너덜할 때까지 바꾸지 않았다”는 문구만 써두었을 뿐이다.


그런데 과연 그가 돈을 몰랐을까. 러닝셔츠가 해지도록 입고 허리띠가 너널너덜해질 때까지 썼다는 것은 사실일 수도 있지만, 군사정변 직전에 단지 “집 한 채”밖에 없었다는 사람의 자녀들이 어떻게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대구 영남대학 등 10조 원이 훌쩍 넘는 자산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급기야 다툼까지 벌이게 된 걸까.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도 왜곡이지만,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스리슬쩍 빼는 것도 영락없는 왜곡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박정희 대통령의 ‘대인배적 면모’만을 반복해 틀어대는 동영상과 음성 방송이 한낱 박정희 우상화 방송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반동의 역사는 되풀이된다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이 말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일한 유산’을 찾아가봤다. 서울시 중구 신당6동 주택가에 자리 잡은 이른바 ‘박정희 가옥’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았던 곳이 여기만이 아님에도 유독 이 단층집을 눈여겨보는 이유는 박 대통령이 제7사단장 시절이던 1958년 5월부터 5·16군사정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관사로 이사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가족과 함께 거주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유자녀들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5·16군사정변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로서 한국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현장인 셈이다. 이것이 신당동 박정희 가옥이 2008년 등록문화재 제412호로 등재된 이유다.


 


사진 설명 :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정변 직전까지 살았던 집이자 사후에는 유자녀들이 거주했던 서울 중구 신당동의 박정희 대통령 가옥.


역사적 의미 외에도 응접실과 안방, 부엌, 식당 등이 1930~1940년대 건립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생활문화사적 의미도 적잖다. 내부에는 육영수 여사가 친정에서 가져온 수납장과 책상, 재봉틀 등 상당수의 유품이 이용 가능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어 생생함을 더한다. 그런 이유로 보수공사를 거쳐 2013년 즈음 일반에도 공개될 예정이다. 한국 현대사의 살아 있는 현장 하나가 또 시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관건은 과연 ‘어떻게’ 돌아오느냐다. 대통령 기념 시설, 나아가 역사기념관의 ‘존재 이유’는 기록물이나 사진, 동영상 등을 통해 단순히 재임 당시를 떠올려볼 수 있게 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집권기에 대한 평가를 역사적 맥락에서 조망하고 미래를 위한 가르침을 얻도록 돕는 데에 있다. 하지만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짚어보면 이 집마저도 박정희를 우상화하고 미화하는 현장으로 전락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가시지 않는다.


 


사진 설명 : 툭하면 국민이 뽑은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민간인을 고문·살인하는 반헌법적 범죄를 저지른 박정희 대통령의 가옥 내부. 보수공사를 거쳐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역사상 군사정변 세력을 확실히 단죄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홀로 비명횡사했기에 공식적인 처벌을 하지 못했고, 12·12군사반란의 주역이자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수많은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전두환 일당 역시 어설프게 사면되었다. 그 결과 옅은 역사적 감수성에 학연과 지연이 결합하면서 친일부역자들에 대한 미화는 물론 군사정변과 독재자를 찬양하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2007년 경상남도 합천군이 ‘새천년 생명의 숲’이라 불리던 공원을 전두환의 아호를 따 ‘일해日海공원’으로 바꾼 것을 시작으로, 2011년에는 서울 남산 한국자유총연맹 광장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다. 이는 4·19혁명 때 끌어 내려진 지 꼭 51년 만의 일이다. 같은 해에 경북 구미의 박정희 생가에는 박정희 동상이 들어섰으며, 이듬해인 2012년에는 전두환의 모교인 대구공고에 ‘전두환 자료실’이 마련되었다. 급기야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사관후보생들이 전두환을 비롯한 쿠데타 주역들에게 사열을 하는 진풍경까지 연출되었다.


박정희가 집권한 18년 6개월 동안 계엄령이나 긴급조치, 위수령 등 ‘비상체제’가 발동되지 않은 기간은 전체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김재규가 쏜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 무수한 반독재 민주화운동가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끌고 가 투옥시키고 살인하는 등 자신의 영구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박정희였다. 그런 박정희를 비롯한 독재자들과 친일부역자들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이들의 노림수는 분명하다. 그들은 수구 냉전 세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친일부역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거기에 “이만하면 살 만하지 않느냐” “이제 과거는 잊고 미래로 나아가야 하지 않느냐”라고 생각하는 시민들 스스로가 어떤 수를 써서든 부자만 되면 된다는 물신주의와 기회주의에 물들면서, 독재의 역사는 다 지나간 옛일 따위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래되지 않은 역사조차 망각하는 순간, 학교교육에서조차 홀대하고 제외하는 순간, 나아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듣는 순간, 반동의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된다. 정작 변변한 민주화운동기념관 하나 만들지 못한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 이제 남은 것은 ‘스탈린의 재림’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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