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는 어떻게 역사를 왜곡했나]<3> 항일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서술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친일·독재미화와 교과서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
1. 기본 입장
뉴라이트 교과서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의 전개'(112~133쪽) 서술은 간략하며 단조롭다. 기존의 교과서보다 그 비중이 크게 줄었는데, 이는 일제시기 역사서술이 지나치게 항일운동사 중심이며, 독립운동사는 이미 많이 언급되었다고 보고 상대적으로 소략하게 다루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교과서가 견지하는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기본입장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민족의 독립운동이 개인의 자유나 인권보다 하위개념이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현행 검인정 교과서가 민족주의적 입장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민족독립운동 서술을 사실보다 부풀렸다고 본다. 민족독립운동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민족감정에 치우쳐 사실을 왜곡 또는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적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교과서는 “민족중심의 역사관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썼으며”, “‘우리 민족’ 대신에 ‘한국인’을 역사적 행위의 주체로 설정하였다.”(5쪽). 개항 이후 130년간의 역사를 “자유와 인권을 갈망하고,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처지를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보통사람들의 역사”(5쪽)로 파악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민족보다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서술이 “기존의 역사 서술에 비해 꽤 큰 변혁”(5쪽)이기는 하나, 이러한 관점이 식민지지배라는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한 우리 역사에도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잘 알다시피 일본 제국주의 지배는 근대 사회의 핵심 가치인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였으며, 조선인의 정체성,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일제 파시즘의 폭력정치에 의해 일체의 권리가 무시되었고 복종과 굴욕의 노예적 상태를 강요당했다.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이에 따른 민족적 차별과 억압, 배제가 구조적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식민지시대에서 민족문제야말로 조선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본질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근대 시민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율성은 독립 이후 일제의 식민잔재를 극복하는 민주화투쟁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획득되었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의 신장은 민족의 독립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둘째, 민족독립운동이 연합국의 반파쇼연합전선의 하위개념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은 독립운동세력이 전취(戰取)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이 ‘선물’로 준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처럼 외인론(外因論)을 취할 경우, 민족독립이 미소 강대국의 승리에 힘입어서 주어진 것이기에, 독립 이후의 상황이 미소 연합국의 힘덕에 국제적으로 제약, 규정, 좌우되는 것 또한 당연하다는 타율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민족해방이 전적으로 연합국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타율적 해방론’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힘에 의한 독립운동은 절대로 불가능하였다는 입장에 따를 경우, 자주적인 힘으로 민족독립을 추구한 독립전쟁은 역량을 헤아리지 않은 무모한 투쟁이 된다. 교과서는 이러한 시각에 따라, 무장투쟁론을 배격하고 외교지상주의에 근거하여 활동을 벌인 이승만에 대해서는, “그는 유럽 신문들에 일본의 만주침략을 고발하는 글을 기고함으로써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한 각국 외교관과 언론인들 간에 반(反)일본 여론을 환기하고 한국의 독립에 대한 우호적 관심을 조성하였다”(127쪽)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반면, 김구에 대해서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 테러 활동을 시작하였다”(129쪽)라 하여, 역사학계에서 의열투쟁이라 부르고 있는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테러리스트의 테러활동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경교장 연못가를 산책 중인 김구 선생 ⓒ뉴시스 |
또한 교과서는 일제말기에 “해외 독립운동이 여러 분파로 나뉘어 서로 갈등하였다”(131쪽)고 하여, 독립운동세력의 연대와 통합의 움직임보다는 분파와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 후의 중국 관내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익적 세력의 통일전선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우익통일전선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두 갈래로 일단 통일되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워짐에 따라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통일시켜야 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져, 중국 관내 지역 민족해방운동전선의 통일전선운동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임시정부를 통일전선정부로 확대 강화시킬 수 있었으며(1944년 4월), 통일전선정부로 발족한 임시정부는 전체 민족해방운동세력의 통일전선에 의한 무장투쟁의 강화를 강조하였다(1944년 8월 9일)
한편 국내에서도 중일전쟁 이후부터 일제 패망까지 수많은 항일비밀결사가 조직되었고 태업과 징용, 징병 거부와 입산 활동, 유언비어의 유포 등 다양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교과서는 “국내에서 총독부의 폭압적인 전시동원정책에 대해 한국인이 정면으로 대항하기는 어려웠다.(……)과거 민족주의 활동으로 이름 높던 많은 지도적 인사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협력자가 되었다.(……)보통의 한국인들도 강제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전시체제에 참여하였다.(……) 일제의 광기 어린 전시체제에 저항하기는 어려웠다.”(132쪽)라 하여, 황국신민화와 전시동원정책은 조선인이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는 숙명적 패배론에 따라 독립운동사를 서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전개한 독립운동과 미국, 소련 등 연합군의 일본에 대한 군사적 승리의 결과였다(복합적 외인론). 설사 독립의 주인(主因)이 연합국의 승리라 할지라도, 독립에 기여한 조선민족의 자주적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조선민족이 항일독립운동을 지속해서 전개하지 않았다면 연합국이 독립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항일 민족독립운동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 후 자주적 독립국 건설운동으로 분출된 건국준비위원회와 같은 활동도 없었을 것이다.
셋째, 민족독립운동이 경제발전의 하위개념이다. 뉴라이트는 식민지시기가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으며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78쪽)이기도 하였다고 본다. 조선의 ‘독립’보다 ‘문명화’가 일제시기를 파악하는 중심 개념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명화란 자본주의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독립운동은 조선의 문명화를 방해하는 ‘악성종양’에 불과하다. 뉴라이트는 조선후기에서 식민지사회로의 이행은 근대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기였으며, 식민지기에 축적된 근대화 역량이 대한민국 발전의 역사적 기초였다고 본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구축된 인적·물적 인프라가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시기 고도성장의 역사적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일제하 조선경제와 해방 후의 한국경제는 연속적인 측면보다 단절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식민지기가 종료된 이후에는 해방과 분단 및 한국전쟁으로 기존의 제 제도가 근본적으로 흔들릴 만큼 큰 외부적 충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부충격을 무시하고 한국 근대의 역사 전체를 연속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시기별 특징이나 본질을 파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허수열, 2011, 33쪽).
또한 제국주의 침략을 경험한 나라가 독립을 되찾은 이후 자본주의적 발전을 지향한다는 것도 자기모순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 발전단계로서 경제적 본질은 독점자본주의이다. 제국주의란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들이 원료를 약탈하고 상품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약한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해 식민지로 삼는 것을 일컫는다. 제국주의의세계지배가 진전되면서 식민지에서는 노동자, 농민을 주축으로 한 민중세력이 제국주의의 지배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대부분은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자주정부를 세웠다.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세력이 독립국가 건설 방략으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실례로 1942년 12월 26일 약헌개정위원회(約憲改定委員會) 제5차 회의에서는 좌파정당의 대표였던 민족혁명당의 신영삼(申榮三)이 “토지국유 강령은 전 민족 동원에 방해가 된다”고 문제를 제기했을 때, 정부 측의 조소앙은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면 따라올 사람이 하나도 없다”(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 문서, 325쪽)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족독립운동의 맥락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기초를 두고 출범하였다는 뉴라이트 교과서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2. 서술 내용
뉴라이트 교과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오늘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어디서 왔는가?”, “오늘날 한국의 자유시장경제는 어떻게 성립하였나?”라는 질문에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서라고 하였다(12쪽). 이에 대한 해답으로 뉴라이트는 “개화기와 식민지시기에 걸쳐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해온 민족적 근대화세력”(134쪽)에 의해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근대사를 서술하면서, 동학농민항쟁과 의병운동 등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개화파를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1) 근대변혁운동
(1) 아래로부터의 움직임
19세기 후반 식민지 쟁탈을 벌이던 제국주의 열강의 손길이 마침내 조선에도 미쳐 민족 위기의식을 더해갔다. 조선은 봉건사회체제의 모순을 타파하고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 나라 안팎의 위기에 대응하는 움직임은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과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의 두 갈래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교과서는 “민족주의 역사학은 개항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주류를 동학농민봉기, 식민지시기의 항일무장투쟁, 4·19민주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역사관을 역사교과서를 통해 보급하였다.”(271쪽)며, “이러한 시각의 역사교육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근대화를 추진해온 개화파 이래의 근대화 세력을 반민족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았다.”(271쪽)고 비판하였다.
아래로부터의 흐름은 농민적 토지소유를 바탕으로 지주제를 해체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려는 움직임으로, 평안도농민전쟁→1862년 농민항쟁→1894년 농민전쟁→대한제국기 농민운동→의병전쟁→3.1운동→항일무장투쟁과 노동자?농민운동→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진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개항 이전의 농민항쟁에서 1894년 농민전쟁으로 이어지는 아래로부터 변혁운동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다. 민중이 주도한 근대적 변혁운동인 1894년 농민전쟁에 대해, 교과서는 “동학농민봉기는 기존 체제를 부정한 급진적인 혁명이었다기보다 유교적인 근왕주의(勤王主義)에 입각하여 서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복고적인 개혁의 성격이 강하였다.”(45쪽)라고 하여, 혁명적인 성격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1894년 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농민항쟁을 통해 성장한 농민대중이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사회를 변혁하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려 한 대규모의 반봉건·반침략투쟁이었다. 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은 경제적으로 농민층에 대한 봉건적 수탈을 제거하여 농민경제를 자립·안정시키고 봉건지배세력 및 외국자본주의세력의 침탈로부터 소상인과 다수 빈농층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또 사회적으로는 봉건적 신분질서를 해체하고 근대적 평등사화를 실현하고자 하였다.”(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 255쪽)라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갑오농민전쟁은 반외세 전쟁인 동시에 반봉건 농민전쟁이었으며, 지주적 토지소유제에 반대하고 농민적 토지소유를 달성하려는 전쟁이었다고 역사학계는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력으로 국권을 되찾으려 한 의병운동에 대해서도, 교과서는 “초기의 의병은 무기나 기율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전투보다는 상소나 시위를 위한 집단에 가까웠다.”(68쪽)라고 평가절하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계몽단체들이 “실력이 없다. 때가 아니다”라며 준비론 또한 실력양성론에 기초하여 의병투쟁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에 반해 공립협회는 의병전쟁을 독립전쟁으로 파악하고, “혹자는 (의병에게) 폭도의 악명을 더하(나)… 대의로 생명을 버리는 자 어찌 도적이며…”라고 하여 부정적 인식을 반박하였다. 아울러 “세상만사가 시세와 완급이 있나니 교육이니 양병이니 사업이니 정치니 종교니 하는 것은 태평시대에도 예비할 바이거니와 시기가 급박한 경우를 당하면 한갓 무예적 행동밖에는 방책이 없다”며 의병이 수행하는 독립전쟁을 높이 평가하였다. 실제로 의병은 1907년부터 1914년까지 무기를 들고 직접 일본군 등과 싸우며 저항하여, 10만 명 가까이 전사했다. 결국 일제는 의병의 격렬한 저항으로 때문에 조선병합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의병투쟁은 1920년대 만주 독립군과 1930년대 만주 항일유격대 그리고 1940년대 광복군 등으로 발전해갔다.
(2) 위로부터의 움직임
개화파를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은 개항을 불가피한 시대적 조류로 인식하여 봉건체제를 개혁하려고 한 개화운동이다. 이들은 지주적 토지소유를 바탕으로 지주의 부르주아로의 전환을 꾀하는 반봉건 개혁운동을 벌였다. 그 구체적인 흐름은 갑신정변(1884)→갑오개혁(1894)→독립협회(1896)→광무개혁(1897~1906)→애국계몽운동→실력양성운동과 민족주의운동(1920년대)으로 이어진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개항 이후 한국 근현대사는 한국의 우수한 전통 문명과 외래 근대 문명이 융합하면서 한국 나름의 형태로 정착하는 과정이었다. 대한민국은 이 같은 한국사의 기본 흐름에 부응하여 근대 문명을 도입하고 이식함에 있는 힘을 다하였던 개항기의 개화파에서 출발하는 독립운동세력과 근대화세력이 세운 국가였다.”(276쪽)라고 하여, 대한민국은 위로부터 개혁운동을 추진한 세력에 의해 세워졌다고 주장하였다. 교과서가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까닭은 “크게 보면 1876년 개항 이후 서유럽에서 발생한 근대 문명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유입되었다. 그에 따라 개별 인간이 근대적 사권의 주체로 성립하고, 사유재산권이 확립되고, 자유시장경제가 발전하고, 자유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276쪽)라고 보기 때문이다.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기초하여 출범하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그 연원을 추적한 결과 개화파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개화파의 운동의 사상적 기반은 사회진화론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진화론은 기본적으로 사회 강자(=부르주아)의 지배와 나아가 세계 강자(=제국주의국가)의 침략 지배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논리였다. “각 민족이 경쟁하는 세계를 당하여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멸망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진보하는데 내가 진보하지 못한 것, 다른 사람은 강한데 내가 강하지 못한 것을 오히려 탓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강대국 문명국의 발전이 약소국 미개국의 침략 위에서 가능하였던 당시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기에, 제국주의 침략을 받게 된 원인을 내부의 미개함으로 돌리는 패배주의적인 인식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개화파는 제국주의 침략이 ‘문명시혜’라는 주장을 하였다. 독립협회는 제국주의 이권침탈을 자원개발=문명화로 인식하였고, “하늘이 준 것을 능력이 없어서 쓰지 못하고 남에게 빼앗기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심지어 “조선이 몇 해를 청국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느님의 덕분으로 독립”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나라와의 조약에서 우리나라의 대청 종속을 폐기하고 자주독립국임을 명시한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우리나라를 보호국화하기 위한 조치를 오히려 독립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화파는 일본의 지배를 문명화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통감정치의 이른바 보호정치가 식민지 통치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내정개혁에 대한 기대로 보호국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개화파들은 민중은 늘 깨우쳐야 하는 계몽대상이라고 볼 뿐 변혁주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개화파들은 철저한 우민관과 민중불신관에 의거하여 무력항쟁을 반대하고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의병이 무력을 사용하는 데 대해, ‘비 문명화된 폭력적인 방법으로 문명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의병을 ‘무뢰배, 비도(匪徒), 불한당, 화적’이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의병운동은 “자국의 지위나 경우를 알지 못하고 상대 나라의 지위와 실력을 헤아리지 못한 망동이다”며 의병에게 무력항쟁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실력양성을 주장하였다. 모든 사회운동이나 활동은 철저하게 국가의 실정법 범위 안에서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사형 집행에도 의연했던 의병들. 26일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 등 사학과 교수들에 따르면 일제는 1909년 9월1일부터 같은 해 10월30일까지 전라도와 그 외곽지대에서 항일의병 초토화 작전을 진행했다. ⓒ뉴시스 |
개화파의 운동은 이후, 자강운동론→실력양성론과 구사상ㆍ구관습개혁론→문화운동론→자치운동론으로 발전하는데 자강운동, 문화운동, 자치운동의 밑바닥에 깔린 논리는 준비론, 실력양성운동론이었다. 1920년대에 들어 실력양성론자들은 독립운동의 유보와 실력양성을 위한 문화운동의 우선을 내세우면서 ‘선 실력 후 독립’을 주장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논리가 아니라 일제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 합법적으로 실력양성운동을 하자는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 등 문화운동의 좌절을 겪으면서, ‘한국의 독립 대신 우선 자치권을 얻어 독립을 위한 실력을 먼저 양성하자’는 타협적인 자치운동론으로 발전한다. 자치론자들은 총독부가 자치제 실시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925년경 말부터 ‘조선 현하의 상태에서 독립운동은 절대 불가능하니 차라리 자치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들은 ?현재로서는 독립이 불가능하므로 독립의 기회에 대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준비론과 ?독립에 도달하는 한 단계로서 자치권을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단계적운동론을 논리적 근거로 내세웠다. 타협적인 자치운동론은 앞서의 경제적?문화적 실력양성론과 비교할 때 그 타협성이 훨씬 강화된 것이며, 민족운동의 목표를 독립이 아닌 ‘자치’로 하향 조정한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반 자치론자들은 ?자치운동은 대중의 돌진적 또는 좌경적 기세를 누그러뜨리고자 하는 ‘관제적 타협운동’이며 ?총독부의 자치제실시설은 민족운동의 보조를 교란하는 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며, 기회주의와 우경적 타협운동에 반대하는 민족좌익전선 결성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 결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민족주의 좌파와 계급해방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자들 간의 협동전선론이 대두되어 1929년에 이르러 신간회가 결성된다. 반면 민족주의 우파인 자치론자들은 1930년대 들어 친일적 성향을 노골화하면서 일제의 추종세력으로 변질되어 간다. 이러한 역사 흐름에 비추어 볼 때, 개화파에서 출발하는 독립운동세력이 대한민국을 세웠다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독립운동 전선에서 탈락한 민족주의 우파 중심의 역사 인식인 것이다.
2) 독립국가 건설방략
뉴라이트 교과서는 “우리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태어나는 역사적 과정에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것은 이 국가가 인간의 삶을 자유롭게 풍요롭게 만들기에 적합한, 지금까지 알려진 한 가장 적합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6쪽)고 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기본이념으로 삼아 출범하였다는 교과서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대한민국이 제헌헌법을 통해 표방한 민주주의는 단순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아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한국적 현실을 반영한 역사성 있는 민주주의인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제하의 민족운동이나 해방 이후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꾸준히 발전되고 숙성되어온 역사적 실체로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 전통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민주공화국 수립을 향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해해야 한다.
한국 독립운동의 특성은, 국내는 물론 국외 각지 한민족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독립운동의 무대가 되는 광범성(廣範性), 무장투쟁인 의병전쟁으로 시작하여 1920년대에 만주·노령의 독립군 항쟁으로 발전하고 이어 1930, 40년대에 항일빨치산투쟁이나 조선의용대(군), 한국광복군으로 계승되는 강력한 투쟁성(鬪爭性), 그리고 대한제국시대의 전제군주국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국민국가 즉 민주공화국으로 새롭게 독립하려는 근대성(近代性)을 지녔다는 점이다.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이 높은 사상성을 갖고 독립투쟁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새로운 사상을 창조해가면서 수준 높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독립국가 건설 방략이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일찍이 독립운동세력이 끈질기게 추구해 왔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이었다. 민족독립운동은 비록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중요한 이념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제헌헌법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 백범 김구 선생의 사저이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 마지막 청사인 경교장이 광복절인 지난 8월 15일 오후 시민들에게 복원현장이 공개되고 있다. ⓒ뉴시스 |
(1) 공화주의 이념의 대두
우리의 민족독립운동은 대외적으로는 외세 특히 일본의 침략 앞에서 주권을 지키거나 잃었던 주권을 회복하는데 목적을 두었지만, 대내적으로는 군주주권의 전제주의를 청산하고 공화주의정부를 수립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오랜 역사 동안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적 담론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이념은 공화주의와 균등 즉 평등주의였다.
국민주권의 공화제를 수용하여 국민국가를 수립하려고 했던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는 미주에서 결성된 공립협회(共立協會:1905~1909)였다.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의 영문 제호는 “For the Koreans by the Koreans” 였는데, 이는 공립신보가 한국인의 국권회복사상과 민주국가(주권재민)을 지향하고 있음을 뜻한다. 국권회복 방략으로 독립전쟁론, 국력배양론을 함께 주장하였던 공립협회는 1907년부터 국민국가수립을 위한 국가체제의 변혁을 구상하고 있었다. 국가체제의 변혁을 구상하게 되는 근본 원인은 망국 사태가 전제정치로 인한 폐습의 결과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공립협회는 사회계급을 타파하고 자유평등주의로 국민을 깨우친 연후 공화제에 입각한 국민주권을 실시할 때만이 국권회복과 국력배양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공립협회는 국내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한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정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전제시대에는 제왕과 귀족이 평민에 대하야 의무는 조금도 없고 권리만 탐절하야 평민을 학대하니 이는 국가의 주권이 아니오 민적(民賊)이라 칭할 것이오, 평민은 제왕과 귀족에 대하여 권리는 조금도 없고 의무만 다하야 제왕과 귀족을 복종하니 이는 나라의 백성이 아니오 노예라 칭할지니”(1908년 12월 9일 논설 ‘국민론’)라 하여, 전제정치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군주를 통치자로서 부정하고 있다. 즉 국가의 구성요소를 국민, 영토, 주권의 3요소로 인식하면서 주권은 군주 또는 정부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음을 천명하였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주권사상은 국내 계몽단체들이 주권을 통치권으로 이해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진보적인 인식을 수용하고 있었다(김도훈, 1989).
내에서도 을사보호조약 이후 황제권을 부인한 공화제론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주권이 황제에게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황제를 협박하는 것만으로도 국민의 반대와는 관계없이 조약이 체결될 수 있음을 보게 됨으로써 주권재민의 절실함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 조약의 체결은 황실이 스스로 안전을 위하여 국민을 배반한 결과가 되었으므로 국민 일반의 황실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간 것이다. 황실과 국가를 구분하여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 점차 군주권을 타도하려는 방향으로 나갔다. 독립협회운동 때까지도 군주와 국가를 선명히 구분하지 못하고 군주의 지위를 높이거나 그 권력을 확고히 하는 것이 국가의 국제적 위치를 높이는 일이요 국권을 확고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는 국가와 군주를 동일시하는 것이 전제주의적 생각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군주전제체제를 타도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나타나게 되었다. 애국계몽운동단체 가운데 유일한 비밀단체이며 또 정치운동과 무장저항운동을 함께 추진하였던 신민회가 공화정체의 수립을 목적으로 한 것은 대한제국 말기의 민족주의가 공화주의를 지향함으로써 그 옳은 방향을 잡아가고 있던 구체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강만길, 1992).
1912년에 일어난 아시아 최초의 공화혁명인 중국의 신해혁명은 공화국 건설을 통한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제시하는 동시에 민족 간 평등과 호혜의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수립이라는 목표를 제기했다. 신해혁명과 이후 중국에서의 민주주의의 진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17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조소앙(趙素昻) 등 14명이 발기하여 작성한 ‘대동단결의 선언’은 국민주권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융희황제(순종: 필자)가 삼보(三寶: 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간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곧 신한국 최초의 날이니 무슨 까닭이오. 우리 한국은 무시(無始) 이래로 한국인의 한(韓)이오, 비한국인의 한이 아니라. 한국인 간의 주권수수는 역사상 불문법의 국헌(國憲)이오, 비한국인에게 주권을 양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효요, 한국의 국민성이 절대 불허하는 바이라. 고로 경술년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는 즉 우리 국민 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禪位)니 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고로 이천만의 생령과 삼천리의 옛 강역과 사천 년의 주권은 우리 동지가 상속하였고 상속하는 중이오 상속할 터이니, 우리 동지는 이에 대하여 불가분 무한 책임이 중대하도다.”
‘대동단결의 선언’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최고 권력인 국민주권은 양도되지 않으며 양도될 수도 없다. 주권은 양도될 수 없는 국민의 최종적 권력이다. 최고의사결정권한인 주권은 국민이 직접 보유하고, 불가분이며, 양도할 수 없다.
둘째, 국민은 군주와의 복종계약을 통해 자신의 최고 권력인 주권을 양도한 것이 아니며 단순한 신탁위임에 불과하다.
셋째, 군주가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 권력인 통치권을 일제에게 양도함으로써 군주주권은 상실되었으므로, 이제 최고 권력은 국민주권이다. 따라서 이제는 정체(政體)가 절대군주가 지배하는 군주독재가 아니라 국민의 일반의사에 따른 통치인 공화주의가 되어야 한다.
대동단결선언은 이어 융희황제가 포기한 삼보(三寶)를 상속하기 위한 완전한 통일조직의 필요성, 즉 ‘유일무이의 최고기관’인 정부를 조직하자는 주장을 하였는데, 그것은 3.1운동의 결과 임시정부의 수립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이듬해인 1918년 11월에는 만주 길림에서 국외 망명 독립운동가 39인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외교론을 배격하고 독립전쟁을 통한 독립운동노선을 천명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무력겸병을 근절하여 평등한 천하의 공도를 진행하는 것”을 복국(復國)의 사명으로 하였으며, “권리와 부를 모든 동포에게 베풀며 남녀 빈부를 고르게 조화하며, 등현등수(等賢等壽)를 지우노유(智愚老幼)에게 균등하게 하여 사해 인류를 건”지는 것을 건국의 기치로 삼았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독립군의 육탄혈전으로 나라를 되찾은 다음, 남녀 빈부가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겠다는 독립국가 건설 방략을 밝힌 것이다.
이후 민족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정치적 담론으로 자리 잡는 이념은 ‘대동단결의 선언’에서 밝힌 공화주의와 ‘대한독립선언서’에서 밝힌 균등 즉 평등주의가 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원 선거를 한데 이어 전문 10조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심의·통과시켰다. 임시헌장은 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하여, 왕정복고를 거부하고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임시헌장 1조에서 제기된 민주공화제는 당시 일본만이 아니라 신해혁명 이후 중국에서 나온 수많은 헌법안 가운데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 주창자인 조소앙에 따르면 민주공화제는 인민의 이익을 기초로 하여 정치적 권리를 균등화하고 국민을 균등하게 정치에 참여시키는 가장 좋은 제도였다(김정인, 2012).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은 이후 여러 차례(1925, 1927, 1940, 1943, 1944) 개정되었지만,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원칙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은 1948년 제헌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2조)라 하여, 민주공화국 및 인민주권을 선포하는 데로 이어졌다. 이처럼 식민통치기에 인민주권과 민주공화국에 대한 합의, 즉 군주주권과 왕정복고에로의 반동적인 흐름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사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3ㆍ1운동을 분수령으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가시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3ㆍ1운동 이후로 정의, 인도, 자유, 평등 등이 시대이념으로 등장하였다. 한용운이 조선독립의 이유로 “자유는 만유(萬有)의 생명”이라고 천명했던 것도 이런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다른 하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모든 사회세력들이 자신을 자각하고 자아실현이라는 공동 이상을 표출하였기 때문이다. 민중은 민족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 노동자는 계급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 여성은 성적 해방을 요구하는 이상을 분출하였다. 그리고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노동자는 계급적 자각을 통해 노동권 생존권 확보를, 민중은 민족적 자각을 통해 국권회복을, 여성은 성적 자각을 통해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3ㆍ1운동을 직접 체험하였던 청년 김산은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를 쟁취하였다”라고 시대분위기를 전하였다. 이처럼 개인이 자신의 인격을 자각하고 자유와 평등이 시대정신이 된 사회분위기 하에서 왕정복고사상은 발붙이기 힘들었다.
▲독립기념관의 독립선언도.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민족대표 독립선언도. 민족대표들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세계 만방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연합뉴스 |
대한민국임시헌장은 민주공화국을 선포한데 이어, 3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이라 하여, 새로 건국할 민족국가의 기본 방향이 평등사회 건설에 있음을 선언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공화주의의 전통을 이어 균등, 평등, 재산의 공공성을 강조하였으며, 인민의 기본권을 자유보다는 ‘균등의 원칙’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통해 균등한 사회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등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보존되어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과 관련된 사회경제적 권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민주주의이다. 임시정부의 정강과 헌법의 이념을 제공한 조소앙(1887~1958)에 따르면 우리는 고래로 이러한 이념과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국가 건설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 전통은 유학과 실학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이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강자를 존중하고 약자 보호를 거부하는 제국주의 원리는 분명 자본주의와 통하는 것이었다. 이에 맞서는 독립운동의 정신은 일본인의 침탈에서 조선인을 해방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강자의 침해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는 방향을 중시하고 있었다.
(2) 건국강령의 건국이념
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민족국가 건설이념을 담은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공포하였다. 건국강령은 대일 선전포고를 앞둔 시점에서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합의한 미래사회의 준칙이었다. 내용은 한국독립당의 기본이념이기도 한 삼균주의(三均主義)에 기초하여 전 국민적 데모크라시 국가인 신민주국 건설론에 입각해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가 해방되면 대한민국의 헌법과 통치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따라 삼균주의 원칙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건국강령은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와 평등을 기본원리로 하여 작성되었으며, 정치적 평등(均權), 경제적 평등(均富)과 함께 교육의 균등(均智을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3대 기본 권리로 간주하였다. 정치적 평등이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즉 국민주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에 가까운 개념인 반면, 경제적 평등과 교육의 균등은 평등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건국강령의 경제적 평등이념은 제 6항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건국강령은 “건국시기의 헌법상 경제체계는 국민 각개(各個)의 균등생활을 확보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과 국가를 건립, 보위함에 연환(連環)관계를 가지게”하되, 경제정책의 기본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한다고 하였다.
(가)대 생산기관의 공구와 수단을 국유로 하고, 토지와 어업, 광산, 농업, 임업, 수리, 소택(沼澤)과 육상?수상?공중 운수사업과 은행·전신·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공·상·기업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혹 중등기업은 사영으로 함.
(나)적의 일체 사유자본과 부적자(附敵者)의 일체 소유자본 및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다)몰수한 재산은 일체 무산자의 이익을 위하여 제공함.
(라)토지의 상속, 매매, 양도, 저당, 상속, 조차(租借)와 고리대금업과 고용농업을 금지함.
(마)국제무역과 전기, 상수도와 대규모의 인쇄, 출판, 영화, 극장 등을 국유 국영으로 함.
(바)노공(老工)·유공(幼工)·여공(女工)의 야간노동과 연령·지대(地帶)·시간의 불합리한 노동을 금지함.
(사)노동자, 농민의 면비의료(免費醫療)를 보급 실시하여 질병소멸 및 건강보장에 힘씀.
(아)토지는 자력자경(自力自耕)을 원칙으로 하되, 고용농, 소작농, 자작농, 소지주, 중지주순으로 우선 분급함.
건국강령은 중소기업만 사영으로 하고, 토지혁명을 통해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제도로 환원하고, 대 생산기관?대기업을 국유화 하며, 광산?어업?농림 등 자원성기업과 운수산업?은행?전신?교통 등 국가기간 시설을 국유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건국강령은 수정자본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정자본주의 노선을 건국강령은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에 역사적 근거를 두었”다고 하여, 전통이념에 근거하여 이끌어내고 있다(조동걸, 1995).
건국강령의 토지의 국유와 대기업의 국유화 방침이 가능했던 것은 좌우파의 구별 없이 독립운동의 공통이념으로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1930~40년대 해외에서의 민족독립운동의 발전은 독립국가 건설론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국가 건설 방안은 전 국민의 보통선거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의 수립과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처단, 대 생산기관의 국유화와 토지문제 해결, 8시간 노동제실시, 남녀평등과 의무교육제 실시 등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우파인 임시정부의 이념과 노선도 1930년대를 거치면서 점차 변화하여 사회민주주의 이념과 무장독립노선을 지향하게 되었다. 건국강령을 통해 드러난 임시정부의 독립국가의 체제 및 정책방향의 주된 내용은 보통선거제와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수립, 토지와 대 생산기관의 국유화, 지방자치제의 실시, 국비교육, 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이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가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표방했던 점은 식민지시기 우익 민족주의의의 질적 변화를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특히 주목할 점은 1948년에 제정된 제헌헌법의 기초위원이던 유진오 박사가 헌법을 기초할 때 참고한 10가지 문서 가운데 임시정부의 건국강령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박사는 대한민국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함께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입국의 기본으로 채택하였다”고 하였다. 자유방임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대한민국의 근본이념으로 채택했다는 것이다. 민족독립운동의 전통이 제헌헌법에 직접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3. 맺음말
뉴라이트는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국제(國制)가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체제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개화기와 식민지시기에 걸쳐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해온 민족적 근대화세력 즉 개화파에 의해 수립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개념으로 개항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민주주의 운동의 역사를 파악할 경우, 우리나라 근·현대 민주주의운동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역사를 제대로 포괄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것은 개화파의 흐름과는 다른 독립운동세력이 끈질기게 추구해 왔던 공화주의와 평등주의 이념이었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워 새로이 독립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은 미국식 형식적·정치적 민주주의와는 다른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대한민국의 정체(政體)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였으며, 경제 이념은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사회적 시장경제였다. 그리고 이런 헌정체제와 경제 질서를 수립케 한 것은 결코 일제 식민지 지배의 유산이 아니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일제에 항거한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제헌헌법 전문)한 결과였다.
참고한 글:
김도훈, 「공립협회(1905~1909)의 민족운동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4, 지식산업사, 1989.
강만길, ?독립운동 과정의 민족국가 건설론? ????한국민족주의론???? Ⅰ, 창작과비평사, 1992.
조동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한국의 독립운동과 광복 50주년』 광복회, 1995.
김정인, 「근대 한국 민주주의 문화의 전통 수립과 특질」 『역사 속의 민주주의』 제 55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문, 2012.
<프레시안>20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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