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시민사회 신년인터뷰⑤]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이승빈 기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임헌영(73)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야당과 시민사회에서는 박근혜 당선인에 대해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임 소장은 <민중의소리>와의 ‘대선 평가 및 2013년 전망’을 주제로 한 인터뷰에서 “박 당선인이 유화 정책을 펼친다 하더라도 이명박 정권이 저지른 과오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먼저 이번 대통령 선거에 대해 “언론 등이 여론을 편파적으로 몰고 갔던 혼탁 선거”라며 “정의감이 사리진 ‘포스트 모더니즘식 혼성 부정 선거’라고 진단했다.
이어 “대선 패배 보다 답답한 것은 패배 이후에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별다른 대응이 없었던 것”이라며 “대선을 통해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지 제대로 분석하고 대응을 했다면 ‘멘붕’ 기간도 길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 소장은 특히 민주당에 대해 “이번 대선에서 48% 지지를 받았지만 당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은 것을 잘 분석해야 한다”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치인들을 다 모아야지, 자기 세력들만 가지고 당을 이끌어 가려고 해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시민사회에 대해서도 “모든 시민운동세력들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것에 목적을 둬야지 이념적인 순결성이나 자기 세계관을 강요해선 안된다”며 “유연성에서 시행착오를 한 것이 장애요인이 돼 이번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고 꼬집었다.
임 소장은 올해 전망과 관련해 ‘주역’ 택천괘(澤天?)를 들어 설명했다. “불의가 지배하는 상태에서 정의가 불의를 물리쳐야 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역사를 보면 8.15 해방 이후 늘 택천괘의 역사였다”며 “근본적인 질서가 뒤집혀 있는 사회라는 점을 인식하고 빨리 ‘멘붕’에서 깨어나 시민단체에 가입하는 방식 등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정치를 실현하자”고 강조했다.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이자 작가이며 사회운동가인 임 소장은 70년대 ‘문학인’ 사건과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번 인터뷰는 지난 15일 서울시 방배동에 위치한 임 소장 자택에서 진행됐다.
-이번 선거에서 야권은 왜 패배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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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제가 지금까지 겪은 어느 선거보다 부정, 혼탁이 많았다. 언론, 관, 재벌, 종교 등에서 여론을 편파적으로 몰고 갔다. 언론에서 편파 보도를 하더라도 야당 측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길 것이다’고 생각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한마디로 국가 전체가 ‘포스트 모더니즘 혼성 부정’에 감염되었는지 정의감이 사라져버린 선거였다. 신자유주의 체제, 경제만을 우선시하다보니까 시민들 사이에 윤리의식, 역사의식이 탈색돼 버렸다. 자신이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나라도, 역사도 팔아먹을 수 있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
박근혜 당선인이 누군가. 독재자의 딸, 다카키 마사오의 딸 아닌가. 역사적인 심판을 상징하는 정보가 마치 범죄처럼 여겨졌다. 독재를 옹호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 정당과 통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의 정책 차이를 국민이 이해 못하는 상태만큼 명백한 부정이 어딨는가.
김대중 대통령이 출마할 때도 ‘종북좌파’ 주장을 노골적으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지지자 전체를 종북좌파로 몰고갔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전까지 야당이 펼친 정책을 ‘빨갱이, 포퓰리즘’으로 몰고 갔으면서 정작 이번 대선에서 야당의 정책을 컨닝한 공약을 내놓은 것이 말이 되는가. 세금을 걷지 않고 복지를 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야당은 자기 정체성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데 실패했다. 현재 집권세력, 극우파들이 국가관을 묻고 있는데, 정작 국가관은 우파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 기관이 정해주는 것이다. 우리 헌법엔 상해임시정부와 독재에 항거한 4.19 혁명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정작 국가관을 의심받아야할 사람들은 현재 집권세력들이란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종북좌파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기 당 정체성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지 못했다. 여기에 가장 큰 패배 요인이 있다. 민주당은 국가관 설정에서 패배했다. 국가관을 아는 중산층은 민주당을 지지했고, 모르는 서민들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것 그대로 믿었다.”
-선거 결과를 예측하셨나
“우리 국민에게 최소한의 정의감은 살아있다고 믿었고 정권교체가 될 것으로 확신을 했다. 그만큼 지난 5년간 이명박 대통령이 저지른 과오가 많았고, 후보자도 전과 14범보다 결격 사유가 많았다. 승리할 수 있었던 선거다.”
-그만큼 이번 선거 결과가 답답하셨을 듯 하다
“선거 결과보다 더 답답한 것은 야권이 패배 앞에서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대선 결과에 대해 바로 결론을 내리고, 이번 선거가 어떤 의미가 있는 선거였는지 정리했어야 한다.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대응을 해야하는지 정리했다면 이른바 ‘멘붕 기간’도 길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놓는 평가도 진단을 잘못하고 있다. 상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식 혼성 부정선거’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고도의 정치공학적인 술수로 대응해왔는데 야권은 수공업적인 대응만 하고 있다.
-야당, 민중운동진영, 시민사회 등 이른바 진보진영 모두가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놓고 갈피를 못잡고 있다
“정치와 시민운동은 지향점은 같더라도 방법은 달라야한다고 본다. 시민사회가 현실정치에 뛰어들 경우 그야말로 굉장한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시민사회 전체가 반성할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의 경우도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노동자들의 의견을 모으거나 작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작 노동운동은 대중적 기반을 잃어버리거나 노조원들 자신이 지향하는 정치 세력을 지지하지 못하고 있다.
시민단체가 쉽게 정치에 뛰어들면서 혼탁 선거를 만드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대중들의 신뢰를 받는 자세를 유지해줘야 한다. 시민단체 신뢰받은 바탕 위에서 정치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 등 뼈를 깎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모든 시민운동세력들은 대중적인 지지를 확실히 받는데 목적을 둬야 한다. 이념적인 순결성이나 자기 세계관을 강요해선 안된다. 대중적인 유연성에서 시행착오를 한 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번 선가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민사회에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하셨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운동 방식을 바꿔야 한다. 현실 대응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교조 같은 경우에도 학생, 학부모,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입시제도에서 학생, 학부모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해주면서 자신들의 운동을 펼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학부모들은 자녀들 입시 공부시키기도 바쁜데, 학교에서 공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면 누가 좋아하겠나.
노동운동도 마찬가지다. 때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지나쳐 보일 때가 있다. 언론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운동단체들이 먼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언론이 노동운동 진영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어야하는데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승빈 기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민주당이나 진보정당 등 야당에서 돌아봐야할 지점은 무엇인가
“민주당은 집권하려는 투지가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개인의 탁월성에 기반한다. 이번에 48%의 지지를 끌어낸 것도 개인의 탁월성이다. 당 지지율은 올라가지 않았다.
민주당은 왜 자신들이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지부터 분석하고 출발해야 한다.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치인들을 다 모아야한다. 그런 정치인들을 배제시키고, 당을 만들려고 하거나 자기 세력들만 가지고 당을 이끌어 가려고 해선 안된다. 새누리당은 생각이 다른 사람마저도 끌어오려고 하는데 민주당은 전혀 못하고 있다.
유신 때 억압 속에서도 야당 지지가 많을 때가 있었다. 그만큼 우리 국민은 현명하다. 야당이 집권 투지만 있다면 독재도 불가능하다.
진보정당은 이번 선거에서 잘했다. 어려웠을 텐데도 흔쾌히 버리고 단일화에 참여했다. 이 점은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 분당 과정에서 부정적이고 따가웠던 눈초리가 있었지만 선거를 거치면서 진정성과 헌신성을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있었다.
보수언론은 이정희 후보 때문에 보수가 결집했다고 하나 사실이 아니다. 보수세력들이 토론회 때 나온 얘기에 대해 논의 자체를 원천봉쇄하기 위해서 벌인 선거공학에 말려든 것일 뿐이다.
오히려 이 후보가 토론회에서 얘기한 것을 가지고 모든 선거운동원들이 떠들어서 공격했으면 역전할 수 있었다고 본다. 네거티브와 역사심판은 구분해야 한다. 잘못한 것을 가지고 잘못했다고 얘기하는데 표 안나온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박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진 시점 중 하나는 인혁당, 장준하 의문사 사건이 논란이 됐을 때다. 민주당은 이 사건들이 왜 중요한지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정작 ‘복지’ 분야에만 파고 들었다.
이제 앞으로가 문제다. 우리나라 진보정당들은 한계가 있다. 언젠가 집권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장은 어렵다. 진보정당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자신들이 알아야한다. 그 범위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통해 개혁에 나서거나 국민들에게 훨씬 더 이익을 줄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당 내에서는 진보에서 중도로 가야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인들은 중도와 진보 자체를 정말 모른다.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사람들은 민주당이 어떻게 되든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자기들을 지지해주는 세력들의 이익을 위해 정당이 있다는 점을 모른다.
우니라나엔 중도, 진보 개념이 없다. 그 말 속에는 노무현, 문재인까지 다 좌파에 포함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현실 정치에서 잘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 말을 해서 표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일본 자민당 안에는 좌파, 우파까지 다 포함돼 있다. 일본 자민당의 좌파는 사회당, 공산당의 주장이랑 똑같은데 그렇게 다양하다보니 장기집권할 수 있었다. 민주당이 집권 의지가 있다면 이데올로기나 정책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얄팍하게 말해선 안된다. 새누리당의 2중대를 하려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박근혜 시대 어떻게 내다보고 있나. 일각에선 절반의 국민이 문 후보를 찍은만큼 유화국면을 조성할 것이란 의견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언론 독점 등 헌법을 위반해왔다. 이명박 정권이 저지른 과오 속에서 유화 정책을 펼친다 하더라도 올바른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박 당선인이 유화를 하려고 한다면 3권분립이나 언론정책에서 달라져야 한다. 당선인이 비민주적인 운영을 할 인사를 내세울 경우 어떻게 하겠나. 당선이 된 이후에 보여준 모습을 보니 당선인에 대해 요행수를 바라지 말고 야당이나 시민단체에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이명박 정권 백서를 발간 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이 저지른 과오를 새 정권이 올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민사회, 진보진영에서 시급히 해야할 일이다. 민주주의는 선물이 아니라 투쟁한만큼 얻고 성장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대선을 거치며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낙담하는 이들이 있다. 한마디 해달라.
=’맹자’를 보면 탕왕이 걸왕을 쫓아내고, 무왕이 주를 토벌한 것과 관련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나온다. 당시 누군가가 ‘신하로서 그 임금을 죽여도 되느냐’고 묻자 맹자는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殘賊)한 사람을 한 남성(一夫)’이라고 표현했다. 즉, 왕을 죽인 것이 아니라 남자를 죽였단 말로 왕은 올바른 정치를 할 때만 왕이지, 인과 의를 해친 사람은 왕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게 바로 역사이자 올바로 흘러가는 민족사, 세계사이다. 올바르지 않은 역사일 때는 상응하는 민족사적인 격랑(激浪)이 생길 수밖에 없다.
주역 64괘 중 43괘를 보면 ‘택천괘(澤天?)’라고 있다. 연못이 하늘 위에 있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상황을 말할 때 택천괘라고 말한다. 음(불의)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정의가 불의를 물리쳐야 하는 형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로 보면 8.15 이후 택천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항상 잘못된 ‘위’를 바꾸려고 하는데, 될 듯하다가 안되고 말았다.
착하게 살기가 얼마나 어렵나. 개인이나 나라, 세계사가 다 똑같다. 옳은 일 하기가 힘든 시기다. 근본적인 질서가 뒤집혀 있고, 불의가 정의에게 뒤집혀 있는게 우리 현실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인류 인간의 역사는 항상 착한 사람이 더 많았다. 아무리 세상이 더러워도 착한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 겨울이 괴롭고 추워도 봄이 되면 다시 꽃이 핀다. 올바른 사람들도 늘 생겨난다. 이제 다 일어나야 한다. 빨리 ‘멘붕’에서 깨어나서, 외롭게 혼자 술 마시지 말고 시민사회단체에 가입하자. 적어도 한 사람이 3개 시민단체 가입해서 우리가 바라는 정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민중의 소리> 201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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