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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과 ‘3·1운동’의 개명을 추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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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과 ‘3·1운동’의 개명을 추진하자


 


신동진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사무차장, 연구소 경기동북지부 회원


 


먼저 간단한 질문 하나. 미국의 독립기념일 7월4일은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날일까? 1.독립선언서 채택 2.독립전쟁 승전 3.미합중국 제헌의회 수립 4.미합중국 정부 수립


정답은 1번이다. 그런데 왜 2,3,4번이 아니고 1번일까? 그것은 마치 성경에 천지창조의 시작이‘태초의 말씀’으로 시작되는 것과 같이 식민지 독립의 시작은 바로 독립 혼(spirit)을 심은 선언(말씀)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잠시 1919년 한반도 어딘가에서 만세 시위를 하며 일제의 총칼에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해보자. 그 분들은 ‘공화국 만세’,1) ‘독립 만세’를 외쳤다. 우리 민족이 언제 ‘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가. 중국의 속국으로 ‘천세’를 외치다가,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된 뒤라야 겨우 ‘만세’ 사용이 가능했고, 그 또한 황제를 향한 축원에나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이 ‘만세’를 ‘공화국’과 ‘독립’에 갖다 붙이는 놀라운 창조적 재해석을 했다. 더구나 그 ‘만세’의 주역들은 ‘공화국’에서 ‘독립’된 국민으로 단 한 순간도 살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만큼 큰 믿음은 없다. 그들은 간절한 염원을 담아 죽음 앞에서도 ‘공화국 만세’,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 ‘만세’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축원이었겠는가? 바로 우리. 그 분들의 후손을 위한, 대대손손의 행복을 위한 헌신의 축원 말고 무엇이었겠는가? 이것이 내게는 한없이 자랑스러운 우리 민주공화국 역사의 서막이다.


우리 헌법에 기록된 바와 같이 ‘3·1운동’은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모태다. 그렇다면 1919년 3월1일 선포한 독립선언문은 대한민국을 잉태시킨 헌전(憲典)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을 기념하는 명칭은 그저 숫자만 나열된 ‘삼일절’이다. 멀리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비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과 비교할 때도 ‘삼일절’의 이름은 애매하다. 더구나 요즘같이 역사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고, 개학 전이라 학교에서 관련 수업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삼일절’은 그냥 생경한 암호일 뿐이고, 봄방학의 하루연장 그 이상이 아니다. 명칭만 들어도 직관적으로 그 날이 무슨 날인지 알 수 있도록, 1919년 3·1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개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3·1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3·1운동’의 개명과 관련이 있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 제1장 총강 5항2)과 1943년 3월1일을 맞이해 김구 주석이 발표한 <석(釋) 3·1혁명정신>3)을 보면,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은 군주제와 제국주의를 극복하는 민주공화제를 향한 혁명의 한 과정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4)이런 공언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우리 민족 내재적으로 민주공화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갑신정변, 동학혁명, 갑오개혁,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의병전쟁 등을 거치면서 우리 민족은 천부인권과 자유와 평등 등 민(民)이 주인 되는 새로운 사상들의 세례를 이미 흠뻑 받았고, 입헌군주국을 넘어 공화국을 꿈꾸기에 이르렀다. 1907년 안창호의 주도로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등 당시 국내 애국계몽지도자들이 참여해 만든 <신민회>는 공화제로의 독립을 비밀리에 추진했고, 이후 중국이 신해혁명으로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자 우리의 독립운동가들도 독립한 국가의 정체로서 민주공화국을 세우겠다는 보다 구체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17년 선포된 <대동단결선언>은 그 꿈을 구현하겠다는 혁명선언이었다.


‘융희 황제가 삼보(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곧 신한국 최초의 날이다.’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 ‘신한국’ 수립의 공감 속에서 여운형의 주도로 만든 신한청년당의 당원들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것을 계기로 만주와 연해주, 일본 그리고 국내로 들어가 민주공화국으로의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적 궐기를 추진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기독교, 불교, 천도교 인사들과 사전 협의를 통해 전국적 궐기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기획된 노력의 결과로 만주의 무오독립선언, 도쿄의 2·8독립선언 그리고 결국 3·1독립선언이 연이어 선포됐고, 신속하게 전국적인 만세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은 동학세력, 위정척사와 의병운동 세력, 애국계몽, 종교 세력 등 당시 국내외 양심적인 애국세력이 사상, 신분, 빈부, 지역(해외까지도)의 차이를 극복하고 일심 단결해 일으킨 거족적 의거였으며, 그 내용은 일제에 대한 독립을 넘어, 한민족의 새로운 국체로서 수천 년 이어져온 전제국가를 폐하고, 민주공화국가를 수립하겠다는 것이었다. 3·1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과 동시에 연이어 만들어진 임시정부들[연해주(3.21), 상하이(4.11), 한성(4.23)]이 하나같이 모두 민주공화제를 국체로 삼았다는 점은 1919년 3월1일의 거사가 민주공화국을 세우려 한 애국지사들의 사전 공감 속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1919년 한민족이 주장한 독립은 조선 황제의 신민으로서 외세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주권자로서 황제도, 외세도 폐하는 진정한 독립이었던 것이다.


3·1만세운동은 조선후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속에서 축적되어왔던 한민족 민주공화의 흐름이 총화돼 분출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민주공화국 수립을 지향하는 독립운동 노선이 확립되었고,5) 이것은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변치 않았다. 왕조를 바꾸면 역성혁명이라 한다. 그렇다면 제국(帝國)을 민국(民國)으로 바꾸는 것은, 진정 한민족 역사상 수천 년이래 최대의 혁명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김구는 <석(釋) 3·1혁명정신> 글에서 ‘3·1 대혁명’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6)


이러한 민주공화정 수립의 역사적 과정을 박명림 교수는 1948년 헌법이 “근대헌정체제를 등장시키기 위한 한국사회의 거시적인 헌법혁명의 귀결의 의미를 갖는다”7)며 ‘헌법혁명’으로 규정했고, 서희경 교수는 “(1948년) 건국헌법이 소수의 권력자와 권력집단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점이 너무 과도하게 인식되어, 건국헌법 제정이 장기간에 걸친 집단적 의사의 결과물이라는 점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며 1948년 헌법 제정 당시 “‘민주공화국’,‘국민주권’과 ‘권력분립’이라는 근대 입헌주의의 핵심원리가 ‘자명한 것으로 전제’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기간에 걸친 한국의 헌법혁명의 역사적 진화로부터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8)라고 밝힌 바 있다.


제헌헌법에 새겨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주권재민의 조항 그리고 각종 국민의 권리 조항들, 권력분립의 정신은 결코 ‘공짜’로 또는 ‘해방 후에 미국이 갖다 준 것’이 아니라 한민족 민중이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피와 땀을 흘린 끝에 쟁취한 ‘혁명’의 결과물이라는 얘기다.9) 그렇다면 1919년 3·1독립선언과 이어진 만세운동은 한반도 땅에 수천 년 만에 최초로 민주공화국 수립이라는 혼(spirit)을 심은 역사적, 민족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그러한 의미를 담아 ‘3·1혁명’으로 불리던 것이 언제부터 ‘3·1운동’으로 바뀐 것인가? 살펴보니 1948년 제헌의회에서 헌법을 만들면서 그 헌법 초안 전문에 기재돼있던 ‘3·1혁명’이 ‘3·1운동’으로 바뀌었다. 회의록을 살펴본 결과 “나라를 되찾자는 독립운동이 왜 혁명인가?”라는 취지의 주장에 밀려 ‘혁명’이 ‘운동’으로 바뀌었다. 만약 앞서 언급한 <신민회> 결성, 대동단결선언, <신한청년당> 결성, 3·1만세운동의 추진, <대한민국 임시정부>헌법 제정과 이후 활동에서 주도적으로 또는 중복적으로 중요 역할을 했던 김구, 김규식, 김규흥, 박용만, 박은식, 신규식, 신석우, 신채호, 안창호, 안태국, 양기탁, 여운형, 유동열, 이갑, 이동녕, 이동휘, 이시영, 조동호, 조성환, 조소앙, 전덕기, 홍명희, 한진교 등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설계자요 실행자라 할 분들이 제헌의회의 주역이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래도 ‘3·1혁명’의 명칭이 바뀌었을까? 그러나 정말 공교롭게도 한민족 최초의 민주공화주의자라고 명명되어야 될 위 분들 가운데 단 한 분도 제헌의원이 되신 분이 없다. 이 분들은 해방 전 불사르듯 헌신적 활동을 하다가 이미 돌아가셨거나 해방 직후에 테러로 돌아가셨거나 아니면 제헌의회에 참여를 하지 않으셨다. 비록 시대정신의 힘으로 제헌헌법이 민주공화국 헌법으로 탄생은 했으나, 그 정신과 헌전(憲典)을 심고 만들었던 지도자들이 빠진 의회에서 3월1일은 그저 ‘어떤 독립운동의 거사날’ 또는 ‘여러 독립운동단체 중 하나처럼 취급된 임시정부를 만들어낸 운동’ 더 나아가 ‘남한단독정부 참여를 거부하고 있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과 더 관계 깊은 날’ 정도로 그 의미가 퇴색, 변형돼버린 것이리라.


이제 다시 ‘삼일절’과 ‘3·1운동’의 명칭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 명칭에 민족의 웅혼함과 절실함이 느껴지는가? 한반도 땅에서 제국(帝國)을 폐하고 최초로 민국(民國) 즉 민주공화국을 세운 것만큼 민족사적으로 더 큰 일이 있겠나? 그 역사적 크기가 ‘삼일절’과 ‘3·1운동’이라는 명칭 속에 담겨있다고 느껴지는가? ‘3·1운동’은 한민족 민주공화운동의 역사를 총화한 이름인 ‘3·1혁명’으로 복원되어야 한다고 본다. 미국, 프랑스, 러시아 어느 혁명도 십 수 년 또는 수십 년의 과정을 총괄해 혁명이라 하지 않는가? 그리고 ‘3·1혁명’을 기리는 기념일의 이름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뿌리를 느낄 수 있는 이름이면 좋겠다. 그래서 매년 3월1일은 채 1세기도 되기 전에 엄청난 성과를 이룬 대한국인의 승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민주공화국의 부족한 부분을 점검하는 기념일이었으면 좋겠다.


3·1 독립선언 속에 담긴 자유, 민주, 정의, 양심, 동양평화, 인류공영의 정신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발전을 가능하게 한 힘의 근원이며, 우리 민족의 양심적 집단지성이 만들어 낸 원천적인 민족혼의 보고다. 3·1 독립선언에는 좌우 이념으로 나눠지기 전 민족혼 그리고 민주공화의 정신이 담겨있기에 3월1일을 민주공화의 정신으로 기념하는 것은 국민통합 및 남북통일에도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삼일절’과 ‘3·1운동’의 개명을 추진하자. 그 승리한 혁명의 자랑스러운 표현을 이제는 되찾아 자유와 평등, 민주와 공화를 위해 투쟁하다 이름 없이, 무덤 없이 돌아가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탄생케 한 수많은 진정한 국부(國父), 국모(國母)분들의 넋을 기려드리자.


1) 3·1 만세운동당시 ‘공화국 만세’의 구호도 ‘독립만세’의 구호와 함께 외쳐졌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고, 3·1만세운동 당시 뿌려졌던 지하신문과 사용된 깃발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조선독립신문> 제2호 (1919년 3월 일자)에 ‘가(假)정부 조직, 가(假)대통령 선거’를 할 것임을 알려 민주공화제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임을 예고했고, 1919년 4월23일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시위 시 사용됐던 3개의 깃발 중 2개는 ‘국민대회’ 였고, 1개는 ‘공화국 만세’였다.


2)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 이른바 “우리 조국의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경계하여 민족자존의 정권(正權)을 영유케 하노라”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이 3·1헌전(憲典)을 발동한 원기이며 동년 4월 11일에 13도 대표로 조직된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만들어 반포 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전제를 전복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 우리는 대중이 핏방울로 창조한 국가형성의 초석인 대한민국을 절대로 옹호하며 확립함에 같이 싸울 것임.(강조 필자)


3) <석(釋) 3·1 혁명정신> (중경,1943년) ; 추헌수(편), ?자료한국독립운동 1?(서울 : 연세대학교출판부, 1971), 282-283면.


4) 임정의 이런 역사인식은 1930년대 중후반 ‘임정법통론’과 ‘임정해체론’의 논쟁 속에서 임정의 유일무이한 법통의 정당성을 3·1 만세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속에서 찾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5) 1910년대에 발표된 총 61개의 독립선언서를 분석한 김소진은 <한국독립선언서연구>(1998)라는 박사논문에서 한국의 민주공화정체 지향이 “갑오개혁 이후 독립협회를 거쳐 신민회에 이르는 동안 발전해온 내재적인 이념의 변화”라고 연구 발표한 바 있다.


6) “3·1대혁명은 한국민족 부흥을 위한 재생적 운동이다. 달리 말해 이 운동은 단순히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운동만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이 5천년 이래로 갈고 닦아온 민족정기와 민족의식을 드높이자는 것이다” (강조 필자)


7) <한국의 초기 헌정체제와 민주주의 : ‘혼합정부’와 ‘사회적 시장경제’를 중심으로>(2003)


8) <대한민국 건국헌법의 역사적 기원(1898-1919)>(2005)


9)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은 책들로 ?1898, 문명의 전환 – 대한민국 기원의 시공간?(2011. 전인권, 정선태, 이승원 공저, 이학사 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2012. 김육훈 저, 휴머니스트 간) 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회보 <민족사랑> 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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