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독립군 지도자 3500여명 배출한 ‘대표적 항일기관’
ㆍ민족문제연구소, 1차 명단 공개 “실체 재조명 기대”
1910년대 중국 지린성에 있던 대표적 항일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입학생·졸업생·교사 등 관련 인사 44명이 추가로 밝혀졌다. 학계는 신흥무관학교 관련 인사와 졸업생이 수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해 왔으나, 현재까지 정확하게 명단이 정리된 인사는 300여명에 불과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8일 공개한 ‘신흥무관학교 인명록 편찬사업 1차년도 기초조사보고서’에서 신흥무관학교 관련 인사 44명을 추가 발굴했다고 밝혔다. 연구소 이용창 박사는 “조사작업 첫해에만 44명을 발굴했기 때문에 조사가 끝날 때까지 수백명의 인사를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신흥무관학교 관련 인사들의 명단뿐 아니라 학교 설립 지원이나 자금 지원, 청년 모집 활동 등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 내역까지 알 수 있게 돼 신흥무관학교의 실체를 재조명하는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흥무관학교 인명록 편찬사업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의 지원을 받아 4개년 계획으로 지난해부터 시작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인 이상룡 선생 등 관련 인사의 회고록과 당시 신문, 일제 경찰 자료, 일제 비밀문건 등을 분석해 새로운 인사들의 명단과 활동 내역을 찾아냈다. 새로 밝혀진 44명 중 30명은 이미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이지만 나머지 14명은 새로운 인물이다. 이 박사는 “나머지 14명도 추가 조사를 거쳐 독립유공자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6월 이회영·이시영 선생 6형제가 만주 지린성 류허현에 세운 독립군 양성소 신흥강습소가 모체다. 이후 지원자가 많아지면서 신흥중학교라는 이름을 거쳐 신흥무관학교가 됐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일제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최대 3500여명의 독립군 지도자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군 양성기관으로는 최대 규모다. 하사관반·특별훈련반·장교반 등 근대적 군사교육과정을 거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청산리·봉오동 전투 등 독립전쟁 대부분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해 연구는 미진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자 수도 연구자마다 1500~3500여명으로 추정해 편차가 크다. 졸업생 외에 교사·교관·임원·지원인사 등에 대한 조사는 거의 없는 상태다.
신흥무관학교 관련 유족들은 새로운 인물들이 발굴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보다 심도 있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 이준식씨(57)는 “졸업생 중 이름이 확인된 분이 10%도 안된다”며 “외할아버지에게 배운 학생들이 매우 많았고, 그분들이 독립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음에도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냈던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 이항증씨(73)는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그간 연구가 없어 국가에 참으로 섭섭했다”고 말했다. 그는 “44명이라도 관련 인사들을 추가로 찾아 천만 다행”이라며 “나라를 위해 희생했던 분들의 이름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순봉 기자 gabgu@kyunghyang.com
<경향신문>2013-3-1
[기사원문보기] [단독]신흥무관학교 학생·교사 44명 명부 더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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