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 비난에 대한 반론

3421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 비난에 대한 반론

이승만 지지자들은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이 공개되자 ‘건국대통령에 대한 모독’, ‘허위사실과 조작 그리고 왜곡’으로 가득 찬 내용이라면서 격렬한 비난을 쏟아냈다.


이성을 잃은 듯한 원색적인 공격에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자라 할 이승만 기념단체들은 물론 조선일보/뉴데일리/종편방송 등 수구언론과 보수단체까지 전면적으로 가세하고 있다. 그러나 폭언에 가까운 형태로 몇달째 계속되고 있는 이러한 비난들은 대부분 사실에 어긋나거나 백년전쟁이 제기하는 내용과 무관하다고 판단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당초 이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협박 또는 광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토론을 기대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승만 지지세력들이 백년전쟁을 반박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고 나선 이상, 각자의 입장을 전파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정은 시민들의 몫으로 돌리면 될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연구소가 불가피하게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최근 연구소에 대한 공격은 색깔론이나 인신공격 수준이 아니라 폭파 방화를 거론하는 테러 위협에까지 이르고 있다. 특히 국가안보차원의 대처를 주문한 청와대의 원로회동 이후 이 같은 양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으며 광기마저 띠고 있다.


민간이 제작한 역사다큐를 둘러싸고, 청와대가 정부 산하 기관장들을 불러 대처를 지시하고, 여당 국회의원이 압력용 대정부 질의를 하고, 인터뷰에 응했다는 이유만으로 국사편찬위원회의 현대사 편찬위원들이 좌익의 굴레를 쓰고 축출당하고, 이를 방영한 R-TV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회부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현상들을 목도하면서, 누구든 지금이 이승만 시대인지 박정희 유신시대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가권력까지 나서 민간의 역사문화운동을 이렇게 옥죄는 것이 과연 정상인지 묻고 싶다. <백년전쟁>을 빌미삼아 과거 이승만시대의 광기어린 ‘빨갱이 사냥’이나 ‘유신체제의 폭압’을 연상케 하는 퇴행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부족해서 이승만 지지세력은 ‘민사소송으로 기둥뿌리를 뽑고 형사소송으로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는 참으로 듣기 민망한 명목으로 소송비용과 이승만기념관 건립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대규모 모금 광고를 게재했다. 그리고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씨는 백년전쟁 제작자측을 형사고소했다.


이명박정부 이래 한국근현대사 전공자들을 싸잡아 좌익으로 매도하면서, 권력과 수구세력의 입맛대로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폭거가 일상화하고 있다. 상식적인 비판마저 공안적 대응으로 압살하려는 미증유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 방치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정의의 실종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는 절박한 위기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백년전쟁>의 제작 취지와 기본 내용은 물론 이승만지지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 또는 해명과 함께, <백년전쟁>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일제강점기 이승만 관련 사료와 연구성과 등을 주제별로 정리해 기자회견의 형식을 빌어 그 내용을 공개하고자 한다.


쟁점1 미국 박사학위 취득과 관련해 → (상세보기)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백년전쟁>은 이승만의 박사학위 취득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악의적으로 묘사했다. 이승만의 박사학위가 엉터리인 것처럼 묘사하는데 이승만박사의 논문은 프린스턴대학에서 출판되었고, 저명한 학자가 여러 번 인용할 만큼 가치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불법적이지는 않지만 불과 5년 5개월 단기간에 미국 유수의 대학 석·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의아해 한 부분으로, <백년전쟁>은 이 대목을 이승만에 대한 미국 개신교계의 전폭적 지원과 자신의 집요한 노력이 결합한 것으로 설명했다. 목적을 향한 놀라운 집념이 학위 취득과정에서도 확인된다는 의미였다. 논문 내용은 다루지 않았으므로 논문의 수준은 다큐와 무관한 지적이다.


쟁점2 이승만이 일제의 고문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문제
(상세보기)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이승만은 미국 명문대학 박사학위 취득자이자 젊은 혁명가로서 이미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미화하기 위해 일제의 고문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그런 적도 없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이승만이 불굴의 독립운동가로서 미주 한인에게 강한 인상을 준 요인 가운데 하나가 당시 한인사회에 떠돌았던 ‘일제에 의한 감옥 후유증’이었으며, 이승만 또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 당시 이승만을 만났던 다수 미주 한인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된다.


쟁점3 친일로 오해할만한 이승만의 대일관
(상세보기)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호놀룰루 스타블러틴지의 기사 내용은 이승만이 ‘일본 국가에 대한 반대를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뜻이 아니라 ‘일본인에 대한 인종 혹은 민족적 증오를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백년전쟁>은 신문기사의 부분적 인용과 악의적 편집을 했다. 또 워싱턴포스트 기사(1912.11.18)에서 이승만의 인터뷰 중 : ‘지난 3년동안’을 <백년전쟁>에서는 ‘한일합방 이후’라고 해석했는데 틀렸다. 이는 기독교 및 YMCA에 의한 자조자립운동의 전성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호놀룰루 스타블러틴지의 기사는 이전 ‘이승만이 반일교육자다’라는 보도에 대한 이승만의 반박 기사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 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 신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말기 바란다”(호놀룰루 스타블러틴)라는 내용이다. 이 신문은 기사 제목을 “Dr.Rhee denies that korean school teaching ‘anti-japanese’”로 뽑았다.


워싱턴포스트지 이승만 인터뷰 내용은 “3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이다. 당연히 한일 강제병합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이며, 이어 “전차 레일이 깔리고, 도시마다 전기 불빛이 들어오고, 공장과 백화점이 곳곳에 생기고 있다”는 그의 발언은 미국 개신교의 지원에 따른 조선의 발전상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요컨대 1910년대 우호적 미일관계 아래 이승만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함으로써 ‘친일파’로 오해받을 수 있는 위험한 발언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일 뿐이다.


쟁점4 하와이 교민사회의 갈등과 일본군함 ‘이즈모호사건’
(상세보기)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1918년 하와이 법정에서 이승만이 박용만에 대해 ‘일본군함 이즈모호가 입항하면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운 위험한 인물’이라고 밀고하는 증언을 한 적이 없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당시의 주요 사료인 <신한민보>와 <(국민회)공고서>, ‘재미한인사’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오십년사>(김원용)에도 나오는사실이다. 이후에도 이승만이 다른독립운동가를 공산주의자등으로 모함했다는 기록이나 증언, 연구도 있다.


쟁점5 무장 의열투쟁을 부정한 이승만
(상세보기)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백년전쟁>은 외교독립노선을 부정하고 무장독립·의열투쟁만을 인정하고 있다. 이승만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무장봉기론에 맞서 장기적인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던 것으로 노선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독립운동 방략으로 전쟁, 의열투쟁, 외교투쟁, 문화운동 등 여러 유형이 있기 때문에 외교노선 자체를 부정하는 학자는 없는 게 상식이다. 다만 이승만의 외교노선이 유달리 무장투쟁, 의열투쟁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은 학계의 상식에 속하며 <백년전쟁> 또한 이를 거론한 것이다.


쟁점6 독립운동자금을 둘러싼 상해임정과의 갈등→ (상세보기)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독립운동 노선투쟁의 일부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임정 대통령 시기 이승만이 대통령 직함을 자의적으로 행사하고 그 직위에 집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그는 재정부장의 고유 권한인 재정문제(특히 미주 한인사회의 재정)까지 자신이 직접 관할함으로써 임정요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독립자금 모금 중단하라. 정부에서 걷은 돈도 다 나에게 넘겨라.”)


더 큰 문제는 임정 대통령이 된 후 미주 한인독립모금은 대부분 이승만의 외교활동이나 구미위원부와 관련해 사용되었다. 또한 1924년 상해 임정 개혁파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려 하자 임정으로 보내던 소규모의 독립운동자금마저 끊어 버렸다. 이는 이승만의 독단적 행정 처리와 재정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비롯한 갈등이지 노선투쟁으로일어난 문제가 아니었다.


쟁점7 복잡하고 이상한 부동산 거래→ (상세보기)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교육운동을 헌신적으로 전개했으며, 그 결과 8년제 남녀공학 기숙학교인 한인기독학원이 탄생했다. 이승만은 영수증 하나도 놓치지 않았고, 재정보고서도 투명하게 공개했다. 횡령은 없었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이승만 측은 이승만의 부동산 구입자금의 출처, 연8% 대출이자의 조달과 교육시설 운영자금, 부동산 매매과정에서 발생한 차액 등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자금들의 사용처에 대한 구체적인 입증자료를 하나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다만 이승만은 영수증을 잘 모을 정도로 알뜰했고, 대출금 등은 학교에 모두 투자했다는 막연한 설명만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한 후 회계보고를 하지 않아 한인사회의 많은 비난을 받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공적성격의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고, 그 대출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회계기록은 없다면, 그 재정을 운용한 자는 당연히 횡령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수는 없다 하겠다.


쟁점8 이승만과 김노디의 Mann법 위반 문제→ (상세보기)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이승만과 김노디는 무고하게 고발당했고, 무혐의 처리된 사건을 ‘뽀샵’과 기소를 통해 불륜으로몰아갔다. 이는 이승만과 김노디에 대한 명예훼손이며 인격살인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1. 이승만과 김노디의 관계를 불륜이라고 한 적 없다.


2.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 의문 제기


– 이승만과 김노디는 맨액트 위반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 즉 함께 주 경계를 넘는 장거리 여행을했다.


–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서 추방절차에 돌입하는 허가를 내렸으며, 미국 이민법에 의해 추방절차가 진행되었다.


– 추방을 전제로 한 법적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위증을 하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을 하고 진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법적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위증을 했다.(만약 위증이 밝혀졌다면 형사처벌까지 받은 후 추방됐을 것이다.)


3. 풍자를 위한 표현기법


– 이승만과 김노디의 이미지는 1920년대 시기 두 사람의 사진을 합성해 만든 패러디물로 단지 풍자를 위한 표현기법일 뿐이다. 일종의 포토 몽타쥬로 메시지를 쉽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이다.


쟁점9 이승만에 대한 CIA문서의 평가에 대해→ (상세보기)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백년전쟁>은 이승만에 대한 CIA문서를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이 목적을 추구하면서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라는 부분만 발췌해 확대해석했다. 이 문서는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과는 절대로 거래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심각한 이승만의 권력욕을 보여주는 사례로, CIA조차 이승만을 태생적 반공주의자로 신뢰한다는 내용과 함께 특별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승만의 권력욕을 거론할 정도였다. 이승만의 독선, 권력욕 등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와 증언이 있다. CIA문서의 사례는 보고 내용의 핵심과 무관하게 그의 권력욕을 특별히 지적할 정도였다는 게 오히려 핵심이다.



▲ 백년전쟁 보급 경과 →
(상세보기)


▲ ‘백년전쟁’ 관련 편향 왜곡보도와 연구소에 대한 압박 →
(상세보기)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