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논평

고소사건에 대한 역사단체 공동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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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고소사건에 대한 역사단체 공동성명

 

2012년
11월 말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일제강점기 행적과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을 다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그런데 서너 달이 지난 올해 3월부터 이 영상물이 보수언론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2일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족이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민족문제연구소를 검찰에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과정에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지 않은가
우려한다.

3월 13일
청와대 원로 초청 오찬에서 한 참석자가 <백년전쟁>이 “역사 왜곡이다. 국가 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한다”고 건의했고,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잘 살펴 보겠다”고 메모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에 일부 보수 언론과 종편 방송, 극우 인터넷 매체들이 비판적인
주장을 다투듯 내놓기 시작했다. 또 4월 16일에 안전행정부 장관은 국회 업무보고에서 “객관적인 검증이 없는 <백년전쟁> 동영상은
국민 통합을 저해할 소지가 있다”며 “한국의 정체성이 지켜지고 역사관이 올바로 설 수 있게 문제에 대응해 나가겠다”고
발언했다.

이후 5월
2일에 이승만 전 대통령 유족이 민족문제연구소를 고소했다. 그들은 고소 이유를 “허위 사실과 자료 조작”으로 만들어진 동영상은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한 인격살인”이자 “대한민국의 국격을 짓밟는 행위”이며, 민간연구소 주도 하에 “소위 국사학자들이란 사람들이 대거 협력해 만들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고 내세웠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영상물의 경우,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범위에서 일상적인 표현을 쓰거나 강조하려는 측면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풍자와 함께 역설적 표현이 어우러진 비판이 자유로운 사회를 사회 문화적으로 성숙시킨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 대중적 영상물을 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으며, 다양성을 관용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사회 문화의 지표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물이 새삼 논란이 되는 과정이 의아스러운 것이다.

역사에서
배우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교훈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20세기 역사에서는 인간이 간직해야 할 정의(正義), 정치사회 운영에서
추구해야 할 민주적 가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권리 등을 기준삼지 않고서 교훈을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역사를 연구하는 우리는 역사적
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기준으로 되묻고 싶다. 대한민국이 추구할 사회적 가치를 팽개치고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한 정권의 최고 책임자가
누구였는가? 이승만 전 대통령 유족의 주장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추구할 가치와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영상물 <백년전쟁>의
인터뷰에 응한 역사학자들의 학문적 판단을 모독하는 것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인 대한민국 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의 계승을 국가 정체성으로 명기하고 있다. 지난 세기
9차례의 개헌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헌법의 기본 이념과 정신이 부정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제헌헌법의 정신을 부정하고 장기 집권을 위해 헌법을 두 차례나 불법으로 고쳤으며, 부정 선거를 감행하다가 4월 혁명으로 국민에 의해 쫓겨났다는
사실을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다. 이렇게 헌정 질서를 두 차례나 파괴한 이승만을 ‘독립투사’, ‘건국대통령’, ‘국부(國父)’라고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역사 연구자들은, 이승만에 대한 비판을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고 몰아가는 일부의 움직임을 심각하게 주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기도가 역사를 거꾸로 돌려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우려하고 경계한다.

역사
연구자들은 영상물 <백년전쟁>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이 정치적 목적으로 언론을 호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에 반대한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는 이미 그 개인의 인격을 떠나 ‘역사적 해석’의 차원에 들어선지 오래이다. 이제 역사 연구자의 해석과 평가에 대해 언어와 영상을 통해
비학문적 비난을 가하고 심지어는 색깔론으로 몰아붙이는 행태는 자제되어야 한다. 더욱이 권력이 정치적 목적으로 부당하게 개입하려는 시도가 있어서도
안된다. 지난 세기에 대한 역사적인 판단은 다양한 학문적 논의와 연구 토론을 통해 이루어져야 마땅하며, 권력에 기대어 사법적 영역으로 가두려는
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 역사에 대한 지혜로운 해석은 학문과 사상 및 표현의 자유를 전제하며, 권력의 힘에 기댄 강압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2013년 5월 9일

 

한국역사연구회(회장 하일식)

역사문제연구소(소장 김동춘)

역사학연구소(소장 전명혁)

전국역사교사모임(회장 이성호)

역사정의실천연대(상임대표 한상권)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상임대표 안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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