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부정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최근 조선학교를 고교무상화 제도에서 배제하고자 관련법령을 개악했다. 오만방자한 망언을 일삼고 있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시장 겸 일본유신회 공동대표도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 교부를 거부하는 등 재일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적대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재일한국인 인권운동가이자 한국근현대사 연구자인 후지나가 다케시(藤永 壯) 오사카산업대 교수가 일본 우익의 조선학교 탄압 배경과 실태를 조명한 글을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기고했다. 후지나가 교수는 조선학교 무상화 교육실현 운동을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재판을 지원하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홍길동 기금 http://www.osakahuminkikin.net/k/korea01.html참조).후지나가 교수는 우리 연구소가 편찬을 추진 중인 <재일조선인단체사전>의 오사카 지역 집필위원이기도 하다. – 엮은이
[기고] 제네바로 날아간 조선학교 어머니들의 두루미
후지나가 다케시 일본 오사카산업대 교수
1948년 4월의 교육투쟁
4월 24일은 재일한국인의 뇌리에 깊게 새겨진 날짜다. 지금부터 65년 전, 즉 1948년 이날, 민족학교의 강제 폐쇄에 항의해 수천 명의 재일한국인이 효고(兵庫)현청(고베시)에 몰려가 현지사로부터 민족학교의 폐쇄를 철회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이 투쟁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다. 일제식민지시대, 재일한국인은 일본의 동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자민족의 언어나 문화를 배울 기회를 빼앗겼다. 이에 해방을 맞이하자 일본 각지에 ‘국어강습소’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는데, 얼마 안 되어 체계적인 교육커리큘럼을 갖춘 민족학교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미소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일본을 점령하고 있었던 GHQ(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와 일본정부는 당시 최대의 민족단체였던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산하의 민족학교가 공산주의 교육을 실시한다는 의구심을 갖고 탄압에 착수한 것이다.
1948년 1월 24일, 일본 문부성은 각 도도부현(都道府縣) 앞으로 통달을 내려보내, 재일한국인 아이들을 일본의 소·중학교에 다니게 할 것, 민족학교의 정규과목에서 한국어를 제외할 것 등을 지시했다. 또한 문부성은 이 통달을 따르지 않는 민족학교는 폐쇄하도록 각 도도부현에 명령을 내렸고, 같은 해 3월부터 4월까지 야마구치(山口), 오카야마(岡山), 효고, 오사카, 도쿄의 민족학교에 대해 폐쇄 명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폐쇄 철회를 요구하며 민족학교 관계자와 학부모, 학생들은 격렬한 항의활동을 펼쳤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앞서 언급한 4월 24일에 이루어진 효고현 지사와의 단체교섭이다. 그러나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 제8군은 그날 심야에 효고현 지사의 약속이 원천 무효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고베시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 경찰과 MP(미군헌병)에 의해 재일한국인에 대한 무차별검거가 이루어져 나흘 동안 검거자가 1,973명에 달했다. 또한 오사카에서는 4월 26일에 오사카부청사 앞에서 항의집회에 참가하던 16세 김태일 소년이 경찰관의 발포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렇게 오사카와 고베에서 치열한 투쟁을 상징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에 당시의 항의행동은 종종 ‘4·24한신(阪神)교육투쟁’이라고 불린다. 그 이외에도 야마구치와 오카야마, 도쿄 등 학교 폐쇄가 강행된 지역에서도 항의투쟁이 전개되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미 극동군 총사령부는 재일한국인이 제주4·3사건 등 남한의 단독선거 실시와 단독정부수립 반대투쟁과 연대해 시위·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민족의 주체성 회복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과제에 직면한 재일한국인의 교육투쟁이, 조국의 분단 반대투쟁과 목표를 같이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5월 5일, 일본 문부성과 조련계의 ‘조선인교육 대책위원회’ 사이에서 각서가 교부되어 민족학교에 대한 탄압은 일단 정지되었다. 그러나 각서에 근거해 사립학교로 인가된 민족학교는 전체의 4할 미만에 지나지 않았고, 이듬해인 1949년 9월에 조련이 강제 해산되자 10월에는 조련 산하의 민족학교도 결국 강제 폐쇄 또는 개편에 내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1948년 4월 교육투쟁을 제재로 한 Unit ‘항로’의 마당극 ‘ Ø -제로’. 오사카 공연은 초만원을 이룬 관객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후지나가 다케시 |
최근에 일본정부에 의한 조선학교에 대한 탄압정책은 이러한 1948년 4월의 교육투쟁을 다시금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투쟁 65주년을 맞이해 올 4월, 총탄에 쓰러져간 김태일 소년이 잠든 도쿄 아오야마(靑山)묘지에서 교육투쟁을 마음에 새기자는 행사가 열렸다. 또한 오사카에서는 당시의 교육투쟁을 그린 마당극이 상영되어, 초만원을 이룬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Unit 항로-“제로” CM’).
‘고교무상화’제도의 개악과 재판 투쟁
그런데 지난번 기고에서 전한 바와 같이, 작년 12월 26일에 성립한 자민당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발족 직후 조선학교에 대한 ‘고교무상화’제도 부적용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재일한국인의 인권을 무시한 아베 신정권: 조선학교에 대한 ‘무상화 교육’ 배제의 부당성” <프레시안>, 2013.1.9). 이에 대해 오사카부 조선학교 10개교의 경영모체인 학교법인 오사카조선학원은 올해 1월 24일, ‘고교무상화’제도에 근거하는 취학지원금 지정의 신청에 대해 문부과학대신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위법이라며(부작위의 위법 확인), 오사카조선학원의 무상화 지정을 요구해(의무 지우기 소송) 일본국가를 제소했다. 또 같은 날, 나고야에서는 아이치(愛知)조선고급학교의 재학생과 졸업생 5명이 취학지원금의 지급 배제로 말미암은 정신적 고통에 대해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2월 20일, 조선학교를 ‘고교무상화’제도에서 배제하기 위한 문부과학성령을 개악해 일본 전국의 조선고급학교 10개교에 불지정 통지를 송부했다. 각 조선고급학교에 보낸 통지서에는 불지정의 이유로 ‘무상화’ 적용의 법적 근거가 없어진 것에 더해, 취학지원금이 수업료로 확실히 학생을 위해 사용된다는 확증을 없는 점을 거론했다. 후자는 불지정 통지서에 새롭게 덧붙여진 논점으로 금후 재판에서 일본국가 측이 어떤 주장을 전개할지 주시할 필요가 있다.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대신은 제도 개악에 앞서 조선학교가 일본의 학교교육법에 근거한 ‘학교'(소위 ‘일조교’)로 방향을 전환하면 ‘고교무상화’의 적용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下村博文文部科學大臣記者會見錄[平成25年 2月 19日]”). 그러나 이는 ‘일본어‘ 과목만 빼고 모든 수업을 우리말로 실시해 온 조선학교의 교육방침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계 민족학교 중에는 확실히 ‘일조교’를 선택한 학교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각각의 학교에 맡겨야 하며, 취학지원금 지급을 조건으로 ‘일조교’가 되라고 강요하는 방식은 마이너리티 교육권을 보장하는 국제인권법 규정에 분명히 위반된다. 시모무라 문부과학대신의 발언의 배후에 보이는 것은 조선학교에서 실시하는 민족교육의 골자를 빼고, 일본의 국가 권력의 관리, 통제 아래로 두려는 동화주의적 발상에 다름 아니다.
문부과학성령의 개악과 ‘무상화’ 불지정 통지를 받은 오사카조선학원은 3월 11일, 소송 내용의 일부를 ‘부작위의 위법 확인’에서 ‘불지정 처분 취소’로 변경한 가운데 제1회 구두변론이 이틀 후인 3월 13일에 열렸다. 또한 오사카 이외의 조선고급학교 9개교도 불지정 처분에 즉시 이의신청을 내고, 특히 도쿄와 히로시마에서는 현재 소송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작년 9월 보조금 교부 부활을 요구하며 오사카조선학원이 오사카부와 오사카시를 제소한 재판도 지난 4월 11일에 제3회 구두변론을 마쳤다(☞ “홍길동, 오사카부·오사카시를 제소하다: 법정 투쟁이 시작된 조선학교의 가을”, <프레시안>, 2012.12.2).
땅에 떨어진 일본의 인권감각
한편, 이러한 재판투쟁의 확대 움직임을 견제하려는 듯 작년 12월 26일, 이번에는 오사카시가 반대로 오사카조선학원을 상대로 나카오사카(中大阪)조선초급학교(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東成區])의 부지로 오랫동안 사용해온 시유지에 대해 명도요구 소송을 낸 것이 밝혀졌다. 나카오사카조선초급학교의 부지가 오사카시로부터 무상 대여된 것은 1950년부터 1961년까지 동교의 전신인 민족학교가 오사카의 시립 중학교로 운영되었던 역사적 경위에 따른 것이다. 그 사정은 약간 복잡하므로 자세한 경위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다만 여기서 지적해야 할 점은 오사카시는 지금까지 민족교육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보여왔는데 이번에 이를 전면적으로 뒤집었다는 것이다. 부지 문제는 2009년부터 오사카시와 오사카조선학원 사이에 협의가 지속되고 있었는데도 오사카시 측이 일방적으로 이를 중단하고 제소한 것은 민족교육의 권리를 바로 정면에서 짓밟는 폭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2013년 3월 31일, 도쿄 히비야(日比谷)야외음악당에서 개최된 ‘<조선학교 배제 NO! 모든 아이들에게 배움의 권리를!> 전국집회 & 퍼레이드’에는 약 7,500명이 참가했다. ⓒ후지나가 다케시 |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은 조선학교를 ‘고교무상화’제도에서 배제하기 위해 소급해서 규칙을 변경한 일본정부의 상식을 벗어난 처사가, “재일한국인은 차별받아 마땅하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일본사회에 발신하고 있는 점이다. 4월 4일, 도쿄의 마치다시(町田市) 교육위원회가 시내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배포하는방범버저를 북한의 정세 등을 이유로 조선초급학교 학생들에게만 배포를 중지한 사실이 밝혀졌다. 마치다시 교육위원회는 북한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는 ‘국민감정‘을 ‘배려‘해 북한과 관계가 있는 학교의 아이들은 안전상의 배려를 할 필요가 없다는, 정말 믿기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각 방면으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고 이 결정은 곧 철회되었다. 그러나 ‘국민감정’을 이유로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가 정당화되는 무서운 사태가 일본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음이 이 사건을 통해 명백히 밝혀졌다. 올 봄에는 도쿄와 오사카의 코리아타운에서 배외주의단체가 한국인에게 대한 ‘헤이토스피치(인종 등의 속성에 관련된 모욕적이고 공격적 표현)’를 공공연하게 자행했는데, 일본정부와 지방자치체에 의한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정책이 이러한 움직임을 조장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제네바에서 날아오른 어머니들의 두루미
일본정부에 의한 조선학교의 ‘무상화’ 배제와 잇따른 지방자치체의 보조금 정지에 항의해 올 봄에는 일본 각지에서 다양한 집회와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4일, 나고야에서는 약 500명이 모여 ‘조선고교 취학지원금 차별 헌법위반소송 궐기집회’가 열렸다. 같은 날, 오사카에서는 약 2,5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조선학교 괜찮잖아! 봄의 모아 퍼레이드’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3월 31일, 도쿄에서 개최된 ‘<조선학교 배제 NO! 모든 아이들에게 배움의 권리를!> 전국집회 & 퍼레이드’에서는 최근 일련의 행사에서 최대 규모인 약 7,500명이 참가했다. 이밖에도 나라, 교토, 후쿠오카, 히로시마, 홋카이도, 사이타마(埼玉), 야마구치 등에서도 항의집회 혹은 데모가 있었으며, 일본변호사연합회를 비롯한 각지의 변호사회와 시민단체 등에서도 잇따라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 3월 24일, 오사카 오오기마치(扇町)공원에서 개최된 ‘조선학교 괜찮잖아! 봄의 모아 퍼레이드’에는 약 2,500명이 참가했다. 사진은 간사이(關西)지방 조선학교 어머니회 대표들. ⓒ후지나가 다케시 |
특히, 올 봄에 폭넓은 공감과 지지 속에서 전개된 활동이 군마(群馬)조선초중급학교 어머니회가 발의한 ‘우리 꿈 우리 마음 프로젝트‘이다. 작년 9월, 도쿄에서 열린 제9회 중앙어머니대회에서 조선학교에 대한 ‘고교무상화’제도 적용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2013년 4월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중앙어머니대회는 일본 전국의 조선학교 학생의 어머니들이 주최하는 이벤트로 강연, 워크숍, 경험 교류, 연극, 비디오 상영 등 다채로운 기획으로 꾸며진다.
일본은 유엔의 사회권규약(국제인권A규약, 1966년 채택)에 가입하고 있으므로 규약의 실시 상황에 대해 정기적으로 사회권규약위원회의 심사를 받을 의무가 있다. 2013년에는 12년 만에 일본정부 보고서에 대한 심사가 예정되어 있고, 예비심사로 작성된 일본정부에 대한 질문사항은 2012년 5월에 공표된 바 있다. 거기에는 재일한국인 아이들이 적절한 경제적 부담으로 교육받을 수 있는 조치에 대해, 또 마이너리티의 학교에 실시되는 재정적인 원조에 대해 자세한 정보 제공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이에 대한 일본정부의 보고서가 심사되는 자리에 대표단을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우리 꿈 우리 마음 프로젝트’는 ‘고교무상화’ 실현을 기원하며, 조선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꿈’과 ‘마음’을 담은 색종이 두루미를 유엔과 일본정부에 보내는 기획이다. 군마의 어머니들의 호소에 부응해 일본 각지는 물론이고 한국의 시민단체 ‘몽당연필’에서도 3,770마리의 두루미를 보내오고, 그밖에 북한과 가나 등지에서도 두루미를 보내왔다. 각지에서 모인 두루미는 합계 38,582마리에 이르렀고, 대표단의 활동 자금을 위한 모금도 4월 30일 현재 589만 1288엔이 모아졌다고 한다(☞ ‘우리 꿈 우리 마음의 블로그’ ).
제네바에서의 활동에 앞서 4월 25일, 약 150명의 어머니들은 두루미를 손에 손에 들고 중의원 의원회관에서 열린 항의집회에 참가하고 문부과학성을 방문해 무상화의 즉각 적용과 보조금 부활을 요구했다. 그리고 두루미와 함께 제네바로 떠난 5명의 어머니 대표단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4월 29일, 사회권규약위원회 심사 전날의 NGO모임에서 조선학교를 둘러싼 일본 내의 차별적 상황을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인 4월 30일의 심사 당일 일본정부 대표단의 발언은, 조선학교는 조선 총련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소위 납치문제에 진전이 없기 때문에 ‘무상화’ 적용은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없다는 등의 종래의 견해를 되풀이했다. 화가 난 어머니들은 일본정부의 불성실한 진술에 항의하기 위해 두루미를 손에 손에 들고 제네바의 거리를 데모 행진한 뒤, 위원회 회장인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 주변에 주저앉아 조선학교가 처한 부당한 상황을 호소했다. 연좌 농성장에는 일본정부의 궤변을 부끄럽게 여기는 일본의 NGO 멤버들도 합류했다고 한다.
어머니들의 꿈과 마음을 실은 두루미는 이렇게 해서 대표단의 용기와 행동력에 힘입어 먼 스위스의 제네바 거리에서 형형색색 날아오른 것이다.
■ 오사카조선학원지원 부민기금(홍길동 기금) 홈페이지 바로가기
■ 조선고급학교의 무상화를 요구하는 연락회·오사카 홈페이지 바로가기
<프레시안>2013-5-17
[기사원문보기] 日 우익의 조선학교 탄압, 65년 지난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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