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는 한국에 비해 표현의 자유가 폭넓게 인정된다. 그러나 최근 독일 법원은 극우 성향 인터넷 사이트 운영자들에 대해 잇따라 엄중한 판결을 내렸다. 5월22일 로슈토크 시 검찰은 회원 수 3만명, 게시물 100만개를 헤아리는 독일 최대 규모의 극우파 사이트 ‘티아치넷(thiazi.net)’ 운영자들을 기소했다. 유대인과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게시물을 집중적으로 올린 혐의다. 이들은 법망을 피해 미국에 서버를 두었지만, 검찰의 끈질긴 추적 끝에 네 명의 운영자가 모두 법원에 출두하게 됐다. 검찰은 서버의 모든 자료를 증거물로 확보한 뒤 사이트에 대한 접근을 차단했다.
이러한 강제적 규제가 가능한 이유는 국민에 대한 선동(Volksverhetzung)이 독일에서는 형법상 처벌 대상이기 때문이다. 독일 형법 130조는 ‘국민 일부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거나 모욕 및 악의적 명예훼손을 통해 인권을 침해할 경우 최소 3개월에서 최대 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특이한 점은 나치에 의한 유대인 집단 학살을 부정하는 행위도 처벌 대상으로 명시돼 있다는 것이다. 나치의 폭력을 정당화하면 희생자의 존엄성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
||
지난 1월12일,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한 시민단체가 네오나치주의자들의 행진을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원 안의 그림은 현재 접근 차단된 극우 사이트 티아치넷. ⓒ DPA 연합 |
독일 헌재 “극우 행위, 표현의 자유 아니다”
독일에서 극우주의를 제재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청소년 보호법이다. ‘유겐트슈츠넷(Jugendschutz.net)’은 인터넷에서 청소년 유해 콘텐츠를 감시하는 대표적인 시민단체다. 이 단체의 크리스티아네 슈나이더는 “사이트 내용이 명백하게 법에 저촉되는 경우 곧바로 경찰에 신고해 사이트를 폐쇄하도록 하고,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면 인터넷 접속 서비스업자에 알린다”고 말했다. 이 단체가 차단한 웹페이지 중에는 “2012년 8월까지 독일에서 나가지 않는 유색 인종은 살해하겠다”는 선동을 벌이는 곳도 있었다. 이렇게 폐쇄된 사이트가 1500여 개에 달한다.
제재는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논쟁’과 닮았다. 실제로 극우주의자들은 자신이 검열의 피해자이며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한다. 쾰른 시 행정법원의 콜야 나우만 판사는 강력한 제재가 불러올 역효과에 대해 우려했다. “민주주의에서 표현의 자유는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선동 혐의가 확실하지 않은데 사이트를 폐쇄할 경우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마지노선은 있다. 나우만 판사가 말하는 독일의 마지노선은 ‘타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는 행위’다. 이런 행위는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장받을 수 없다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례도 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표현의 자유를 구실로 인종 차별과 나치 찬양을 일삼던 독일 극우파에 날벼락과도 같았다. 판결이 나온 후 극우파는 전략을 바꾸었다.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내는 대신 ‘미끼’를 던지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전략을 포기하고 대신 은근함을 택했다. 크리스티아네 슈나이더는 “최근에는 얼핏 봐서는 극우 콘텐츠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어려울 정도”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극우파가 경제난, 실업, 성폭행 사건 등 사회적인 이슈를 미끼로 ‘외국인은 비호감’이라는 인식을 광범위하게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은근한 선동에 가장 취약한 쪽은 청소년들이다. 극우파의 핵심 역시 청소년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슈나이더는 “청소년은 극우파의 타깃인데, 최근에는 소셜 미디어를 이용해 청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세를 넓히고 있다. 청소년들이 유해한 콘텐츠에 노출되기 전에 신속히 삭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겐트슈츠넷의 활동은 일종의 응급 처치다. 증상의 악화를 막는 빠르고 효과적인 대응책이다. 그러나 응급 처치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좀 더 근본적인 치료가 뒤따라야 한다. 극우주의라는 병에 대한 근본적 치료 방안은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시민들의 민주의식을 확립하는 것이다. 독일 내무부 산하 연방시민정치교육센터(bpb)가 탄생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bpb는 1952년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이해를 돕고 정치 참여를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bpb는 학술 행사와 대중 강연 행사, 출판, 견학 등의 활동을 개최하면서 정치 현안과 역사적 주제에 관한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기관이 발행하는 정기 간행물은 다섯 종류인데 전체 발행 부수는 연간 100만부에 달한다. bpb의 활동은 초당적으로 이뤄진다. 정당의 간섭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이런 일을 하는 기관을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bpb에는 극우주의 분과가 따로 있다. 10여 년간 극우주의 분과를 담당한 울리히 도버만은 “bpb는 어떤 정치적 성향이 옳다고 가르치는 대신에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입장을 소개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극우주의 역시 정치 성향으로 인정된다는 뜻일까. 도버만은 단호하게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극우주의는 보수주의와 확연히 다르며 인종, 성별, 성 정체성, 종교 등을 구실로 타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다양성’의 스펙트럼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버만은 ‘애국 보수’를 자처하는 한국 사이트 ‘일베’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고 있을까. 그에게 이 사이트가 최근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폄훼하고 ‘리틀 싸이’ 황민우군에게 댓글로 인종주의적 폭언을 퍼부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됐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일베 이용자들의 행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언어폭력은 범죄가 아니라는 생각부터 잘못됐다. 물리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인권 침해는 분명한 범죄 행위다.”
“극우주의 반대 명목으로 일베 모독은 곤란”
‘일베’에 빠진 청소년들에게도 ‘출구’를 만들어줄 수 있을까. 도버만은 “나는 한국의 청소년들이 어떤지 전혀 모른다”고 전제하며 설명을 이었다. “독일의 경우 극우주의에 빠지는 사람의 60~70%가 남성인데 이들은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대단히 강하다.” 이런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경우 왜곡된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경향이 독일에서 나타난다는 이야기다.
도버만은 뜻밖에도 이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우주의에 빠진 이들도 우리 사회의 누군가에게 소중하고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확실히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테러리스트가 되려던 청소년들을 만났을 때 “너는 우리 사회의 일원이고, 너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네 주변에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자기관이 변해야 세계관이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도버만이 자신의 경험에 빗대 강조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회가 이들을 ‘어른’으로 받아들이되, 어른답게 자기 행동에 마땅히 책임을 질 것을 분명히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극우주의를 반대한다는 명목 아래 일베 사용자를 인격적으로 모독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가 공격받고 있는 한국과 독일의 동병상련. 독일은 우리에게 “상대가 누구든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강성운│독일 통신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