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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의 씨네포커스] 왜, 지금 ‘백년전쟁’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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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의 씨네포커스] 역사 해석은 역사가의 몫… 


<생명의 길>엔 사료조차 없는 반박 동영상일 뿐


 


많은 사람들은 오해를 한다. 다큐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장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나 세상에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매체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 특정 사람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선택에서 이미 감독의 선입관과 편견이 개입된다.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카메라 앵글과 피사체와의 거리 때문에 감독의 주관과 해석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촬영한 씬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다큐라는 장르가 기본적으로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객관적인 척 위장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다큐는 극 영화와 마찬가지로 허구인가? 그렇지는 않다. 실화에 바탕을 둔 극 영화와 다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다큐에서 하는 재연을 위한 연기와, 극 영화에서 하는 배우의 연기는 그 목적이 분명 다르다. 다큐는 특정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재연을 할 따름이고, 극 영화는 극적 효과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연기를 한다. 이렇게 보면 극 영화에 비해 다큐는 객관적인데, 이 점 때문에 다큐가 객관적이라고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오해하지 말기를. 다큐는 극 영화보다 객관적이지만 다큐 역시 특정인의 시각에 따라 만들어진 결과물일 뿐이다.

이렇게 말을 길게 한 것은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백년전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이승만 양자가 “허위 사실과 자료 조작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인격 살인하는 동영상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앞에 저희는 분노를 금치 못합니다.”라며 2일, 검찰에 이 다큐를 만든 제작진을 고소했다. 이 다큐를 만든 민족문제연구소도 5월 9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승만을 옹호하는 이들이 이 다큐의 문제라고 제기한 것에 하나하나 답하면서 공식적인 학술대회도 함께 개최해 진검승부를 벌이자고 했다.

여기서 드는 첫 의문 또는 소망. 언제쯤 우리는 법에 의존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고 볼 수 있을까? 미국의 마이클 무어는 당시 대통령이던 부시를 노골적으로 풍자하고 비판해도 아무런 사법적 대응을 당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죽은 지 50년이나 지난 사람을 다큐로 만들었다고 법적 대응을 당해야 하나?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과 <프레이저 보고서>로 구성된 <백년전쟁> 1부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승만과 박정희를 재조명하고 있다. 재조명한다는 것은 기존의 평가와 달리, 새롭게 조명한다는 뜻이다. 이 영화에는 명백한 목적이 있다. ‘근현대사 진실 찾기 프로젝트.’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인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 교과서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다큐를 통해 알리겠다는 것. 그것도 딱딱한 형식이 아니라 수많은 영화와 영화음악을 영화 속에 끌고 들어와 재밌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백년전쟁>이 내용과 형식 면에서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두 얼굴의 이승만>에서는 이승만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다루고 있다. <하와이신문>, 여러 역사학자들의 인터뷰, 미국의 여러 증언들, 국내의 자료들, 신문 등 수많은 자료에 기대어 이승만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이승만이 실제로는 미국에 머물면서, 자력으로 하는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비판하면서 오직 미국에 의존하는 외교로 일관했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승만을 비판하는 꼼꼼한 사료들이다. 누구나 이승만을 비판할 수도 있고 옹호할 수도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런 주장이 일관되게 작동할 수 있도록 꼼꼼히 사료를 검토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두 얼굴의 이승만>은 이 원칙을 지키고 있다. 대부분의 사료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사료이다. 

<백년전쟁>을 본 이들은 알겠지만, 내용을 떠나 스타일에서도 신선한 시도를 했다. 기존의 영화들을 인용하고 변용하면서 희화화한다. 서부극, 쿵푸영화, 갱스터 필름 등을 영화 속에 녹여내고, 더 나아가 <대부> <유주얼 서스펙트>, <아비정전>, <당산대형>, <슈퍼맨> 등 수많은 영화를 패러디한다. 이뿐 아니다. 기존의 다양한 영화음악을 활용해 이 영화가 희화화하는 영화라는 것을 명백히 한다. 이렇게 보면 <백년전쟁>은 단순히 역사를 해석하는 다큐를 넘어 자의식적으로 스타일 실험을 하면서 감독의 창작력을 한껏 높인 영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보고 분노했기 때문일까? 이승만을 옹호하는 편에서도 다큐를 만들었다. <생명의 길>. 이 다큐는 <두 얼굴의 이승만>이 대부분의 사실을 왜곡하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다큐에는 <두 얼굴의 이승만>의 내용이 왜곡이라는 말을 할 뿐, 사료가 극히 드물다. 몇 부분의 사료만으로 반박할 뿐이지, 대부분은 주장에 그친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학자들이 아무도 이 다큐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역사학계를 왜도한다. 스타일 면에서도 고루한 선전영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어떤 신선한 시도도 없다. 

<생명의 길>은 남한과 북한의 관계를 대립의 관계로 보면서 북한이 죽음의 길로 갈 때 남한이 생명의 길로 간 것이 이승만 때문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니까, 북한과 비교해 이승만의 존재를 부각시켜, 대결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생명의 길> 후반부는 이승만에 대한 노골적인 찬사가 이어져 보기에 거북하다. 구한말의 독립운동에서부터 해방, 이후 4.19에 이르기까지 이승만이 현대사의 전부일 정도로 주장한다. 4.19로 이미 평가가 끝난 마당에 이런 낯뜨거운 동영상을 보는 것은 거북하다. 3.1운동에 이은 임시정부의 정신과 4.19정신을 대한민국 헌법의 법통으로 정해 놓았는데, 그 4.19 때문에 떠난 이승만을 이렇게 평가하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지금 누가 국격을 훼손하고 있는가?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
 

원론으로 돌아가자.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역사가도 자신의 입장에 따라 특정인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다큐에서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고 사용하느냐의 권한은 철저하게 감독의 몫이다. 어떤 스타일을 구사하느냐도 전적으로 감독의 몫이다. 이를 두고 비판하면 안 된다. 정말로 이 <백년전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료로 인격 살인을 했는지, 존재하는 사료로 독창적으로 재구성을 했는지는 법의 판단에 맡길 것이 아니라 학계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근현대사를 연구한 학자보다 이승만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패러디와 희화화한 것을 두고 명예훼손이라고 비판해서도 안 된다. 만약 이게 문제가 되면 일간지의 만평 화백들은 당장 감옥에 가야 한다.  

마지막 물음. 이번 사태를 보면서 나는 정말로 궁금한 것이 있다. 왜, 지금, 논쟁이 되고 있는 대상이 박정희가 아니라 이승만일까? 왜 박정희 유족은 가만히 있는데, 이승만의 양자가 고발한 것일까? 박정희는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눈에 보이는 업적이 있지만, 이승만은 4.19로 불명예스럽게 조국을 떠난 사람 아닌가? 나는 여기서 뭔가 개운치 못한 뒷맛을 느낀다. 그렇기에 <생명의 길>이라는, 거친 주장과 미화만 존재할 뿐, 정작 중요한 사료는 없는, 노골적인 정치 다큐를 급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 진짜 목적이 나는 궁금하다.


<미디어오늘>201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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