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의 구국장정육천리> 자전거 순례를 떠나며
2013년
3월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공동위원회>는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감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의
정밀감식팀은 “장준하 선생이 머리를 가격당해 목이 손상돼서 즉사 했고, 이후 누군가 벼랑 밑으로 내던졌거나 추락해 엉덩이뼈가 손상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비록 민간 발표이나 이로써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에 있는 약사봉에서 실족해 죽었다는 정부의 공식보도를 37년
만에 부정하는 것으로,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진상을 규명해야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로 인정된다면,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국의 광복을 찾기 위해 한 몸을 다 바친 광복군 대위가 해방 후에 자신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조선인 출신 일본군 중위에게 오히려 죽임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찌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있는가? 독립투사 중에 독립투사이며 나라와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극우 보수주의자가 해방 정국에 기회주의자인 친일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다니.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은 당시 대통령에게는 군부정권 시절임에도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는 장준하 선생이 눈엣가시였으리라.
장준하 선생의
유해는 3월 30일 겨레장으로 다시 장례를 치르고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준하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들끓던 여론은 잠잠해졌다. 자전거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다음 목적지로 장준하 선생이 중국 서주에 있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간 길을 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장준하 선생의 삶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파주 탄현면에 있는 장준하 선생의 묘소
장준하 선생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학도병으로 끌려가야만 하는 환경에 놓이자 부인에게 탈출을 암시하고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에 지원했다. 중국
강소성 서주 쓰카다 부대에 배치 받은 후 중경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7월 7일 동료 3명과 함께 탈출한다. 갖은 고생 끝에 임천에 도착하여 중국
중앙군관학교 산하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소하여 소정의 훈련을 마치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한다. 11월 30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 등 50여명과
함께 남양과 노하구를 거쳐 새도 넘기 어렵다는 파촉령을 넘어 파동까지 걸어간다. 파동에서는 군함을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1945년 1월
31일 중경에 도착했다. 일행은 시내를 행진하며 임시정부 청사로 간다. 이 사실이 당시 국제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가
강압적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큰 힘을 보탰다.
강소성
서주에서 임천, 남양, 노하구, 파동 그리고 중경에 이르는 구간의 거리가 6천리 가까이 되어 이를 “장준하의 구국장정 육천리”라 한다. 이
구간을 장준하 선생처럼 걷기는 어렵고, 대신 걷는 것에 가장 가까운 자전거로 따라 가면서 장준하 선생의 그 힘들었던 장정을 몸소 되새겨 보고자
한다.
일정 : 6월
23일 ~ 7월 9일
동행 :
이규봉(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외 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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