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 떠나는 두 역사학자 ②]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2>
한국 사회에서 현대사는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다.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현대사의 진실을 아는 걸 원치 않았다. 또한 두려워했다. 그래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을 힘으로 눌렀다.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 인사들이 참여한 교학사 교과서 논란이 있었다. 5월 31일엔 한국현대사학회와 아산정책연구원이 공동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 토론회도 열렸다. 안병욱 : 인터넷에서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이들이 일베에 모이는 것과 비슷한 형태로 지식인 사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옛날에 극우 세력이 이승만을 찬양하고 박정희를 찬양하고 심지어 전두환을 찬양하며 일대기까지 썼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왕에 대해 민족 반역적인 찬양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과) 내용은 다르지만 이처럼 지식인 사회에서도 상식을 벗어나는 게 있을 수 있다. 뭔가 돌출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과 한국 사회를 3당 합당 구조와 신자유주의 체제로 (계속)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연결돼 있는 측면이 있다. 그중 일부엔 친일파 청산처럼 지난 민주화 정부에서 이뤄진 과거사 정리 작업으로 불명예를 받은 사람들의 보복적인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2004년부터 목소리를 높인 뉴라이트 성향 단체들까지 포괄해 이야기하는 건가. 안병욱 : 그렇다.
“뉴라이트와 한국현대사학회, 그 가치관과 지향은 같다”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 측은, 자신들은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말한다. 안병욱 : 계파는 뉴라이트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5년부터 1987년까지의 역사에 대해,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은 그 시대의 위정자들이 반민주적이란 것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민주주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다른 공로가 있다’며 (독재를) 용인하고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합리화한다. 그런 것에 자기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중 뉴라이트라고 하는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통해 형성된, 나름대로 유형화할 수 있는 학자들이다. 한국현대사학회에는 그런 사람도 있지만 일제 시대에 대한 평가에서 초기 뉴라이트적인 것과 의견을 약간 달리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자기들은 뉴라이트의 후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뉴라이트가 일본 문제와 관련해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현대사학회 쪽은 자기들이 뉴라이트하고는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특히 해방 이후 역사에 대해) 주장하는 바는 큰 차이가 없다. 무엇을 내세우고 배척하려 하는가, 어떤 것에 이해관계를 두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옛날 우익이나 뉴라이트나 한국현대사학회를 중심으로 교과서를 편찬하려 하는 사람들이나 가치관과 지향은 같다. 덧붙이면, 2011년 한국현대사학회가 만들어질 때 한국 현대사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역사 전공자도 몇 명 안 됐다. 학문에 영역이 있어서 그걸 침범하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역사 전공자 대다수가 그 사람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건 중요한 지점이다). 인접 사회과학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것도 한국 사회학계와 정치학계 등에서 대체로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게 한국현대사학회다. 프레시안 : 반공, 반북, 자본주의 산업화 중심의 역사관으로 보인다. 안병욱 : 그 사람들의 핵심은 분단에 대한 평가다. 거의 모든 사람이 우리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으로 분단을 꼽는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것도 있지만 그건 일본의 침략과 조선 사회의 붕괴가 초래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 자신과 관련된 구체적인 책임 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현재는 없다. 그런데 해방 공간이 분단으로 귀결된 데에는 여러 대외적 요인이 있지만, 국내적으로도 분단에 일정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다.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현재 활동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분단은 살아 있는 문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핵심은 ‘이승만 등이 분단 정부를 세운 선택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평가할 만한 게 있다면 그건 단정 수립의 덕을 가장 크게 본 것이다’라는 거다. 뉴라이트든 한국현대사학회든 출발점은 바로 거기다. 4.19항쟁 이래 누구도 거부하지 못한 주된 축은 민족 통일이다. 민주 세력은 분단에서 비롯된 문제를 해결하고 장기적으로는 민족을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극우 세력은 분단 정부 수립(에 대한 찬양)을 통해 그 담론을 밑바닥부터 해체하려는 것이다. 그걸 뒤집어엎는 데 이승만의 단정 수립, 그리고 최악의 부시(Bush)식 표현에 따르면 ‘악의 축’ 북쪽에 대한 공격을 활용한다. 이게 그들에겐 가장 중요한 역사의식이고 그 틀 내에서, 그것에 맞춰 모든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망발도 그런 망발이 없다”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는 창립 때부터 일부 우파 성향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언론사들은 한국현대사학회의 주장을 크게 보도해줬다. 한국현대사학회의 ‘교과서 문제’ 토론회를 <조선일보>에서 후원한 것도 눈에 들어온다. 안병욱 : 시쳇말로 짜고 치는 노름 같은 모양새다. 한국현대사학회 창립이라는 게 언론에서 그렇게 큰 지면을 할애해 보도할 만한 사항인가? 언론의 횡포다. 그리고 학문하는 사람들은 학자적 양심과 학문적 소양에 기초해서 연구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수구 언론의 일꾼, 수구 언론의 전위부대, 그런 것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프레시안 : 문제의 토론회가 열린 날, <조선일보>는 ‘남로당식 사관, 아직도 중학생들 머릿속에 집어넣다니’라는 사설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좌파가 엮고 쓴 역사 교과서 채택률이 중·고교에서 90%가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안병욱 : (남로당식 사관이라니) 망발도 그런 망발이 없다. 백 보를 양보하더라도, 90퍼센트 이상의 교과서가 그렇게 돼 있다고 한다면 그건 학계의 폭넓은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둔 역사 인식이라는 걸 겸허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전문 역사 연구자도 아니면서 신문에 글 몇 줄로, 한마디로 재단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 아닌가. 무식하고 뻔뻔스럽고 목전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행태, 술 취한 사람이 뒷골목에서 흉기를 들고 난동 부리는 것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글을 보고 연구했는지, 참으로 납득할 수 없다. 극우적 논설을 펴는 사람들이 뒷날 자신들이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됐을 때 어떠하리라는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는지 의문이다. 역사에서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역사를 철저하게 평가하는 데서 미래 사회가 그만큼 더 열린다. “저들은 장기적이고 집요하게 역사적 반전을 꾀하고 있다” 프레시안 : 이승만·박정희를 비판적으로 다룬 <백년전쟁>을 둘러싼 논란도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이인호 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백년전쟁>은) 국가 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하겠다”고 이야기한 게 눈에 들어왔다. 이에 더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만나 <백년전쟁>에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안병욱 : 대체로 통치자가 일일이 지시하지 않더라도 그 의중에 맞게 주위 사람들이 행동하기 마련이다. ‘박근혜’로 표상되는, 지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어떻다 하는 걸 그 주위에 줄을 선 사람들이 누구보다 민감하게 파악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없다. <백년전쟁>의 내용이 그 사람들의 역사 인식과 배치된다는 건 분명하다. 과거 독재 정권 같았으면 검찰의 손을 빌려 하루아침에 통제하고 탄압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와 달리 고도의 수법을 쓴다. 그래서 국사편찬위원회 동원 의혹이 나오는 것이다. 그에 더해 한국현대사학회와 보수 언론이 나서서 역사적인 반전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것들에 따라 장기적이고 집요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구체적으로 박 대통령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과거사에 대한 모든 부분이 (저들의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청와대를 찾은 원로가 <백년전쟁>을 국가 안보와 연결해 이야기했다는 건 학문 세계를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가져가는 것 아닌가. 그것도 학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언어가 절제되지 않고 거칠게 마구 나가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본다. 프레시안 : 대통령 측근들의 역사 인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남재준 국정원장, 김장수 안보실장 등은 4.3을 “좌파의 무장 폭동”으로 서슴없이 규정해온 이들이다. 이들을 중용한 대통령은 4.3 위령제에 불참했다. 안병욱 :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역사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다. 또 얼마 전, 보훈처장은 (5.18과 관련해) 시쳇말로 알아서 기는 행태를 보였다. 국회 청문회에서 5.16쿠데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일국의 장관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소신 있는 답변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답변하는 건 부적절하겠다’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그건 보신주의다. 그런 보신의 달인들만을 장관으로 뽑는 것 같은 행태를 보였다. 프레시안 : 역사를 성찰하는 능력은 장관이 되는데 전혀 필요치 않다는 걸 입증한 셈이다. 안병욱 : 그렇게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역사에서 의미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많은 관료들이 임금 앞에서 자기 소신을 얘기했다는 것이다. 사약을 받더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양심에 따라 주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날엔 명령과 지시를 기능인으로서 수행해내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하나 더 이야기하면) 난 일부 진보적 학자들조차 ‘권위주의 정권은 문제가 있지만 그 덕분에 산업화했다’고 주장하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그런 허구적 논리를 빨리 깨야만 한국 현대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오도된 인식을 바꿔야” 프레시안 : 허구적 논리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안병욱 : 차관, 대일 청구권 자금, 월남(베트남) 파병 대가 등으로 1960년대에 자금이 흘러들어왔다. 이 중 월남 파병만 빼놓고 (대통령이 박정희가 아닌 다른) 누구(였더)라도 그런 자금은 가져올 수 있었다. 1960년대 경제 규모에서 그 정도의 자금은 엄청난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말 부정부패와 부실 차관으로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 그걸 박정희가 독재로 통제했다고 하는데, (반대로) 그런 부정부패를 독재로 키워준 것이다. 근대사를 살펴보면, 국민들이 각자 자율 의지에 따라 경제 활동을 할 때 그 사회가 발전한다. 박정희 체제에선 부정부패한 권력자들 및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만 개인의 자율적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특권을 가지고 만든 건 부실 기업, 부실 차관, 부동산 투기, 부패 구조였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우려한 건 감당하기 어려운 차관 그리고 20퍼센트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물가상승률이었다. 그게 박정희가 죽을 때 결산이었다. 이 두 가지는 1980년대 중후반에 해결됐다. 전두환이 독재를 했기 때문에 외채 문제를 해결하고 물가를 잡았나? 핵심은 1986년부터 지속된 3저(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호황이다. 이런 요인이 작용하면서 우리 경제가 그 두 가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다. 3저 호황 전, 외채가 400억 달러에 달했다. 그대로 갔으면, 한국 경제가 그야말로 와해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걸 누가 불러왔나. 독재자들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산업화의 공로는 독재자들에게 있다’고 하는 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계량적 지표에 입각해 천박하기 짝이 없게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고,철학이 빈곤한 데서 나오는 역사 인식이다. 결과가 이렇게 분명한데, 그걸 뒤엎고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오도된 환상을) 공인된 상식처럼 이해하고 있는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 상식 아닌 상식이 상식화돼 있는 구조를 올바른 인식 체계로 바꾸는 게 쉽진 않겠지만, 역사 연구자들이 꾸준히 작업해서 오도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아쉬운 건, 그런(3저 호황 같은) 절호의 기회를 맞았을 때 정치가 제대로 돼 있었다면 경제가 지금과 같은 불안한 상태에서 상당 부분 벗어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아마도 완성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사이에 잠시 호황을 누리다 말았고, 그 결말이 1997년 외환 위기였다. “과거사위 작업을 역사서로 만드는 일, 그게 내게 남은 하나의 소임”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정년 퇴임으로 강단을 떠나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퇴임 후 계획도 궁금하다. 안병욱 : 약간 모순되지만 아쉬움과, 행운을 누렸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지난 40여 년을 돌아보면, 어려운 시대였다. 어려운 시대였기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정치 현실이 무난한 때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랬다면 고고학이나, 역사를 했더라도 (근현대사가 아니라) 고대사를 했을 것 같다. 다른 면에서 보면 내 또래는 후배들에 비하면 굉장한 행운을 누렸다. 경쟁이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에,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요즘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학문적 업적을 쌓았는데도 취직을 못하는 걸 안타깝게도 주위에서 너무나 많이 본다.
현실적인 요구나 제약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현실과 무관하게 공부했으면 학문적으로는 지금보다 더 성과를 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그러나 지식인의 자기 책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비겁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정체성과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시간은 10년 남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 10년 동안, 미진한 걸 처리해야 한다. 지금까지 하지 못한 걸 갑자기 하겠다는 건 과도한 욕망이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단편적으로 써온 논문들과 사회적 발언들을 모아서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것, 이걸 하는데도 10년은 짧다. 새로운 연구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늙어서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거나 추해지는 일을 피하는 게 현재 내 최고의 관심사다. 프레시안 : 과거사 진상 규명과 관련된 저술도 준비하나. 안병욱 : 국정원 과거사위, 진실화해위를 거치며 현대사와 관련해 굉장히 의미 있고 중요한 문제 제기들이 많이 돼 있다. 지금까지 내가 한 건 보고서 작업이었다. 이걸 기술된 역사서로 만드는 일이 내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노추하지 않겠다는 것과 더불어 내게 남은 하나의 소임이라면 이 부분을 역사화하는 것이다. 그 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심하고 있다. 혼자 할 수는 없다. 후배들, 동료들과 함께 해나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의 동료들과 그 점에 대해 논의할 생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2013-6-20
[기사원문보기] “남로당식 사관? <조선>, 흉기 들고 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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