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8년 만에 처음으로 장준하 선생 죽음의 원인에 대한 정부의 공식보도를 부정한 결과가 나왔음에도, 진흙탕 같은 정치 싸움으로 인해 들끓던 여론이 잠잠해졌다. 결자해지의 위치에 있는 대통령조차 일언반구 말이 없다. 진상규명은 물 건너간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자전거 여행을 좋아하는 50대 여섯 명이 나섰다. 장준하 선생이 중국 쉬저우(徐州)에 있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간 그 길을 따라 자전거로 다녀오자는 데 뜻을 함께한 것이다. – 기자말
6월 24일 날씨는 화창했다. 이른 아침에 갑자가 이봉원 회장이 한 말이 생각이 났다. “츠카다 부대는 지금도 그대로 있는데 무슨 공병부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던데” 그 순간 “그렇지. 쉬저우까지 왔는데 시간이 더 소요될지라도 장준하 선생이 탈출한 츠카다 부대가 있던 곳에는 가봐야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원래 계획은 호텔에서 바로 출발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하루나 반나절이 더 걸릴 수도 있어 일정에 차질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나의 의견에 동의하여 이봉원 회장에게 츠카다 부대의 현 주소를 한자로 알려달라고 바로 문자를 보냈다. 혹시 몰라 전 선생의 스마트폰 전화번호도 함께 알려줬다. 혹시 문자를 늦게 보면 어쩌나 하고 기다렸으나 다행히도 바로 회신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내 휴대전화로는 한자가 모두 깨져 들어와 알 수가 없었다. 전 선생에게 문자 확인해 보라고 하니 ‘공정병학원(工程兵學院)’이라는 문자가 제대로 들어왔다고 한다. 역시 스마트폰은 너-무 스마트(smart)해. 괜히 ‘스마트’란 이름을 붙였겠어!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전 선생이 프론트에 가서 물어보니 다행히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다. 오전 7시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8시에 출발했다. 우리가 오늘 가야할 반대 방향으로 한 5Km 정도 가니 왼쪽에 공정병학원이란 큰 건물이 나타났다. 이번 순례의 첫 출발을 알리는 단체사진을 찍으려고 했으나 정문에서는 사진을 못 찍게 하여 근처 부속건물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공식적으로 우리의 순례는 장준하 일행이 탈출한 전 츠카다 부대인 이곳 공정병학원에서 시작했다.
▲ 공정병학원. 장준하 일행이 탈출한 과거 츠카다 부대이다. | |
ⓒ 이규봉 |
▲ 전 츠카다 부대인 이곳 공정병학원에서 순례가 시작됐다. | |
ⓒ 이규봉 |
추잡하고 비굴한 조선인 해방 후 육군참모총장 되다
츠카다 부대에 배치된 이후로 장준하를 가장 괴롭힌 것은 같은 조선인들의 추잡한 행동들이었다. 배고픔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지만 일본 고참병들이 외식하고 돌아와서는 먹다말고 던져주는 그 밥그릇을 받아먹으려고 혈안이 된 조선인, 특히 대학교육까지 받은 그들의 행동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장준하는 일본놈들이 먹다 남긴 밥찌꺼기는 먹지말자는 ‘잔반불식동맹’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한 조선인은 고참병이 먹다 말고 던져준 밥그릇에 두 손을 집어넣어 밥을 움켜쥐고 먹었다. 그는 전에 함께 있던 부대에서도 탈주병 사고가 있자 같은 동료들 앞에서 “또 도망가는 놈은 내가 찔러 죽일테야” 하며 칼을 뽑아들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추잡하고 비굴하기 짝이 없는 그 조선인은 해방 후 육군 장교로 둔갑한 후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라갔다.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의 중추인물들이 이러한 인물들로 가득 채워졌으니 육군이 그 정통성을 광복군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에 두지 않는 것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장준하는 일본인들의 차별대우와 학대가 계속되자 지휘관들에 의한 조선인 차별대우와 학대를 견딜 수 없어 탈출하는 것처럼 꾸미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를 신뢰하던 한 일본군으로부터 가까운 중국군이 부대에서 120리 거리에 있다는 정보를 얻고 마침내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은 로마서 9장 3절을 인용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중일전쟁 7주년 기념일인 1944년 7월 7일 오후 9시경 자축의 분위기 속에서 경비가 느슨한 틈을 이용해 장준하는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과 함께 츠카다 부대의 높이가 3미터나 되는 철조망을 넘어 탈출했다. 이때의 긴박한 상황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걱정했던 것보다 쉽사리 나는 철조망을 넘었다. 그러나 다른 동지들은? 나 혼자만이 성공이라면 이제부터는 이 광막한 황야에 나 혼자다. 실은 이날 낮까지도 같이 탈출하기로 약속했고 또 중국어에 상당히 능통한 백이란 친구가 변심하여 저녁 탈출을 포기하는 배신을 할세라 불안도 생길만 했다. 이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털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쳐들었던 몸을 자라처럼 움츠려 몸을 깔고는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뒤따르지 않았다. 성공이구나, 그 누군지… 됐다. 이젠 최소한도 두 사람이면 된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이 발각되면 우리의 추격이 곧 뒤따를 것이다. 뛰어라. 나는 고구마밭 고랑을 따라 동쪽으로 달렸다. 고구마 줄기가 뚝뚝 발끝에서 끊어지면서 나는 고구마 밭을 날고 있었다. 옥수수밭에 들어서서 비로소 방향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느티나무 아래. 아아, 하나님, 거기엔 세 동지가 이미 모여 있었다. – <돌베게> 36쪽
추격대에 잡힌 것이 천만다행
공정병학원을 출발해서 안후이성(安徽省) 화이베이(淮北)로 향하는 서남 방향으로 시내를 지났다. 차도는 넓고 옆에 붙어있는 자전거 도로도 넓었다. 노면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자전거 도로에는 가끔 자동차도 들어왔지만 대부분이 전기자전거와 오토바이 그리고 삼륜차들이 오고 간다. 그러나 통행방식은 제멋대로이다. 역주행이 법으로 인정받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주 오면서 서로 잘도 피해 다닌다. 그러자니 경적소리의 시끄러움은 귀를 멍하게 만든다.
장준하는 탈출한 후 운하를 건너 북극성을 찾아 동북 방향으로 갔으나 밤새 일본군 관할 구역 안에서 맴돌았다고 한다. 그들은 몸을 숨기기 위해 수수밭을 헤치고 갔으며, 7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마실 물조차도 없어 함께 한 홍석훈은 결국 탈진해 기절했다. 그들은 목이 말라 구덩이에 고인 물을 무조건 마셨으나 바로 오물이었음을 알고 토해낸다.
아직 여물지 않은 작은 새끼 수박을 참외로 알고 따서 마구 먹는 등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려 일본군 관내를 벗어나려고 했다. 배고픔에 지쳐 옥수수 밭에서 잠이 들었으나 농부들에게 발견되었고 결국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큰길로 나갔다. 들킬 수도 있다는 걱정도 배고픔 앞에서는 사라졌다. 밭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 농부들에게 다가가 밥을 얻어먹고 그들이 잘 먹는 음식인 쨈빙을 사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총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몸을 숨기기 위해 수수밭을 찾아 달리며 도망갔으나 강을 만나게 된다. 지나가던 배를 불러 탔으나 함께 탈출한 김영록이 보이지 않았다. 강은 건너갔으나 결국 추격대에 잡혔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그 추격대는 장준하 일행이 가고자 했던 중국 중앙군 소속 유격대 사령부로 그들을 이송했다. 여기서 5개월 전 츠카다 부대를 먼저 탈출한 김준엽을 만났고 이어서 헤어진 김영록도 잡혀와 다시 만나게 된다.
김준엽은 츠카다 부대를 처음으로 탈출한 학도병으로 이곳 유격대 사령부에서 사령관의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자기들이 체포한 30여 명의 중국군 포로와 탈출병을 교환하자고 요구했으나 한치륭 사령관은 자기 부대에는 일본군에서 탈출한 사람이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참으로 장준하 일행에게는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을 들은 장준하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이정표를 세우며 나라 잃은 설움을 나라 찾기를 위해 몸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7월 12일 중국군 군복을 입은 그들은 부라오허(不老河) 강가에서 민요곡조인 애국가를 함께 부르며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랬다.
▲ 이 강의 어딘가가 애국가를 부른 부라오허 강이 아닐까? | |
ⓒ 이규봉 |
공정병학원에서 10여㎞ 가자 도시 한복판에 폭이 한 40m 쯤 되는 강이 나타났다. 강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이 강줄기 어딘가에 애국가를 부른 부라오허 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가 얼마나 크고 사람도 많은지 시내를 관통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비됐다. 공정병학원에서 한 25㎞쯤 갔을 때 사용하지 않는 낡은 철도가 보였다. 보아하니 장준한 일행이 유격대를 떠나 처음 만난 장애물인 진포선 철도 같았다.
실펑크에는 튜브를 가는 대신 패치를 붙여라
우리를 지원하는 차량이 없어 우리는 자전거에 모든 감각을 의지하며 달렸다. 복잡한 도로를 마치 곡예운전 하듯이 시내를 빠져나가니 도로가 좀 한가해졌다. 마침 길가 노점상에 수박이 보였다. 수박하면 장준하 일행과 얽힌 일화가 많다. 탈출하면서 익지도 않은 새끼 수박을 참외로 알고 서리해서는 실컷 먹고, 중경으로 가는 도중 원두막마다 수박을 사 먹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수박을 먹으면 배부르지도 않고 배탈이 안 난다나. 장준하 일행이 매일 수박으로 살다시피 했듯이 우리도 매일 수박을 먹었다. 갈증엔 최고거든.
▲ 갈증엔 수박이 최고, 노점상에서 수박을 사 먹다. | |
ⓒ 이규봉 |
달리는 데 뒷바퀴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멈추어 살펴보았다. 바람이 좀 빠져있다. 실펑크다. 너무 구멍이 작아 아주 조금씩 새고 있는 것이다. 새 튜브로 바로 끼웠다. 그런데 타이어 안쪽을 살펴보는 것을 잊고 끼웠다. 아니다 다를까 좀 시간이 지나니 또 바람이 빠졌다. 타이어에 아주 작고 뾰족한 이물질이 끼어 있을 수 있으므로 반드시 타이어 안쪽을 세밀히 검사해야 한다. 뭔가 만져졌다. 그것을 빼고 다시 새 튜브로 바꾸어 끼웠다.
한참 갔는데 또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연이어 세 번이나 펑크가 나다니. 튜브를 살펴보니 같은 장소에서 계속 펑크가 난다. 그 지점의 타이어를 세밀히 살펴보니 뭔가 있는데 뺄 수가 없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타이어 자체 철심이 아주 조금 빠져있었다. 그 철심을 밀어 넣을 수도 없고 그래서 튜브를 갈지 않고 그 지점에 펑크패치를 붙였더니 순례가 끝나는 날까지 다시는 펑크가 나지 않았다.
이제 생각을 바꾸었다. 보통 펑크가 나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새로운 튜브로 갈았었다. 그러나 펑크가 난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 하고 타이어에 있는 매우 작은 이물질을 제거하지 못하면 같은 자리에서 또 펑크가 날 수 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람 빠진 튜브에 바람을 다시 가득 넣으면 물이 없어도 쉽게 구멍을 찾을 수 있다. 그 자리에 펑크패치를 붙이면 웬만한 실펑크는 예방할 수 있다. 왜냐하면 펑크패치는 튜브보다 훨씬 두껍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