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이름 넣은 상 제정 추진 이어 백 씨 군복 문화재 등록 논란
박근혜 정부 들어 만주국 장교 출신 백선엽 씨에 대한 ‘미화’가 도를 넘고 있다. 백 씨의 이름을 넣은 상을 제정하기로 한 데 이어, 백 씨의 군복을 문화재로 등록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 6월 21일 백선엽 군복 등 총 11건, 76점에 대한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백선엽 군복은 대한민국 육군 장군을 역임한 백선엽(白善燁, 1920∼현재)이 착용한 하예복(夏禮服), 동정복(冬正服), 동만찬복(冬晩餐服), 동근무복(冬勤務服)과 트렌치 코트(Trench Coat)로 대한민국 장군복의 각 유형별 복식 형태를 알 수 있다. 또 계절이나 착용 목적에 따른 형태 비교도 할 수 있어, 현대 군사복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대 군사복의 변화를 알기 위해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판명된 백선엽 씨의 군복을 굳이 문화재로 등록해야 하느냐는 반론이 나온다. 백선엽 씨는 일제 말 일본이 세운 괴뢰 정부 만주국에서 간도특설대 장교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간도특설대는 거물 친일파인 간도성장 이범익이 항일 저항 세력 탄압을 목표로 일제에 건의해 창설됐다.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잡는다’는 논리를 토대로 하고 있어 ‘조선인 특설 부대’로도 불린다.
실제로 백 씨는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회고록 <대게릴라전>을 통해 “우리(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췌한 백선엽 회고록 <대게릴라전>의 일부. ⓒ민족문제연구소 |
이처럼 논란이 있는 인물인데도, 그의 군복을 문화재에 등록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그에 더해 그의 이름을 딴 상까지 제정되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달 16일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이해 추진하기로 한 10대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백선엽 한미동맹상’을 제정키로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비슷한 논란이다. 친일파 출신 인사임이 명백한데 과거사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없이 ‘6.25전쟁 영웅’으로만 지나치게 미화하는 게 옳으냐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백 씨 외에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민철훈, 윤웅렬, 윤치호, 민복기 등의 의복과 유물에 대한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 민철훈은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 “천황의 성은에 감읍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귀족회 이사를 역임했다. 윤웅렬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민복기는 경성지방법원 판사 재직 시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이초생, 남국태, 이찬우, 문세현 등의 재판에 관여했던 인사다. 특히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5년 ‘인혁당 판결’ 당시 재판관이자 대법원장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두 개의 판결이 존재한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놓았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유족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던 그 판결이다.
▲ ‘조선인 토벌 부대’ 출신인 백선엽 씨는 보수 언론으로부터 ‘6.25전쟁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사진은 재향군인회 행사에 참석한 백선엽 씨. ⓒ프레시안(최형락) |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매헌 윤봉길 월진회,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보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차이석선생기념사업회 등은 8일 오전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화재청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을 배반하고 친일 행위를 저지른 자들의 물품을 문화재로 등록한다면 이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모독이자 ‘문화유산 헌장’의 기본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모순된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들 단체는 “설령 이들의 의복과 유물이 보존해야 할 일말의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소장처나 관련 박물관 등에서 잘 보존하고 관리하여 연구 등에 활용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그 표면적 가치에만 주목하여 문화재로 등록한다면 그들의 역사적 죄과를 희석시키고 심하게는 면죄부를 주는 구실로 악용되는 등 역사 왜곡의 소지가 다분함을 경계하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앞서 민주당 김광진, 김기준, 박지원, 부좌현, 배재정, 윤관석, 이원욱, 이학영, 정성호, 최민희, 한명숙, 한정애, 홍의락 의원과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은 백 씨 의복 등에 대한 문화재 지정과 관련해 문화재청에 반대 의견서를 제출했다.
백선엽, 박정희 ‘생명의 은인’…”살려달라 했지만 비굴하지 않더라”
백선엽 씨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친일파 출신이라는 점도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맺은 특별한 인연 때문이기도 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48년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14연대의 일부 군인들이 우익 인사와 경찰을 사살한 ‘여순 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구형받았다. 처형 날짜를 열흘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이 백 씨에게 “한번 살려 주십시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을 “한번 살려”준 이가 바로 백 씨다. 반면 당시 박 전 대통령과 함께 연루됐던 최남근 중령, 오일균 소령 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군내 남로당 조직원 이름을 써내는 등 ‘밀고’를 한 뒤 감형을 받게 된다.
백 씨가 2010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회고록에는 당시 사정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다음은 2010년 8월 3일 자 “지리산의 숨은 적들…박정희와의 약속”이라는 제목의 글 일부다.
“이제 10여 일이 지나면 수색의 처형장으로 끌려갈 박(정희) 소령이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왠지 모르게 말이 없었다. (…) 이승과 저승으로 엇갈릴지 모를 운명에 놓인 박 소령과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는 시간으로는 꽤 길었다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박 소령의 얼굴이 잠시 움직였다. (…) 그의 말은 간단했다. 아무런 수식이 없었다. “한번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이 박 소령의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 그의 눈에는 눈물이 도는 듯했다.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도 내 눈에 들어왔다. 꼭 할 말만을 강하게 내뱉었지만, 그는 격한 감정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의연(毅然)하기도 했지만, 처연(悽然)하기도 했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선 사람임에는 분명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반드시 해야 할 말 한마디만 얼른 내뱉는 점에서 그는 꿋꿋했다. 비굴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제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그는 많은 감회에 휩싸여 그를 끝내 이기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 군대 내부의 좌익을 척결하는 것은 신생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려 있는 중차대(重且大)한 작업이었다. 그 숙군을 지휘하고 있는 내가 사형이 확정된 사람을 살려주는 일에 아무런 생각 없이 앞장설 수 있는 처지가 결코 아니었다. (…) 그러나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
이 글을 통해 백 씨는 동료를 밀고하고 “살려 주십시오”라며 눈물을 비치는 듯했지만 “꿋꿋했다”거나 “비굴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등의 말로 박 전 대통령을 미화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생명의 은인’인 백 씨는 승승장구한다. 프랑스·캐나다 주재 대사를 역임한 후 1969년에는 제19대 교통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이후 충주비료 사장, 호남비료 사장 등을 지내며 부를 축적했다.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인사들이나 ‘유신 독재 시절’ 인사들이 주목받고 있다. 유신 헌법을 기초한 김기춘 전 의원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박정희 정부에서 활약한 정치인·관료 2세들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이 같은 상황에서 ‘좌익으로 몰려 처형당할 뻔한 대통령의 아버지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 백선엽 씨의 군복이 문화재 등록 절차를 밟고 있는 게 과연 우연일지 의심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프레시안>2013-8-8
[기사원문보기] ‘독립군 토벌대’ 백선엽 거듭 미화…박정희 구해준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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