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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일 고발의 숙명을 타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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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대신 송병준 평전> 출간한 임혜봉 스님


 


광복 후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좌우 이념 대결로 치달았다. ‘먹고사는 문제’에 봉착하면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소홀히 했다. 이 틈을 탄 친일파들은 ‘반공’의 가면을 쓰고 기득권 세력으로 탈바꿈했다. 위정자들은 ‘친일 청산’ 대신 친일파들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거나 유지하려고 했다. 친일파들은 친일의 대가로 얻은 엄청난 재산으로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반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에게는 가난과 고통이 대물림됐다. ‘친일파 집안은 3대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독립운동가 집안은 3대가 고통받는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12월29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대통령 직속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까지 발족했다. 광복 후 60년 만에 친일의 대가로 축적한 친일파들의 재산을 국고로 환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친일파 후손들의 저항은 거셌다. 이들은 정부가 재산 환수에 나서자 집단으로 반기를 들었다. 자신의 선조는 “친일파가 아니라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하는 후안무치한 후손도 있었다. 이들의 뻔뻔함은 독립운동가 후손과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시사저널>은 친일파들이 전국에 소유하고 있는 땅과 후손들의 재산 내역 등을 추적했고, 이를 2007년 12월 기획 기사로 보도했다.


기사가 나간 후 한 스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취재 자료를 제공받을 수 없느냐”고 해서 만나게 됐다. 임혜봉 스님이었다. 스님은 친일파들, 특히 송병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시사저널>을 읽고 책을 쓸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왜 송병준이냐고 묻자 “친일 매국노 제1호인 그가 누구이고 뭘 했는지를 후세에 남겨야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올해 8월 <망국대신 송병준 평전>(도서출판 선인)이 출간됐다.


송병준은 1858년에 태어나 1925년까지 67년을 살았다. 그가 죽은 지 82년 만에 개인의 일생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고증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쓸 만한 자료가 별로 없었다.










   
ⓒ 시사저널 임준선
4년 자료 수집, 1년 집필


하지만 임혜봉 스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산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송병준 흔적’을 찾아 발로 뛰었다. ‘송병준’이라는 이름 석 자만 있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일본에 가장 비판적인 논조로 발행된 것이 대한매일신보였다. (송병준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에 몇 개월 동안 출근하다시피 하며 전량을 한 장 한 장 열람해 관련 기사를 복사했다.”


송병준이 망명 시절 살았던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야마구치 현 하기 시를 찾아가 그의 자취를 추적했다. 하기 시는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등 일제 관료들의 고향이었다. 하지만 희미한 흔적뿐이었다.


이렇게 자료 조사에만 꼬박 4년이 걸렸고, 1년간의 집필 과정을 거쳐 5년 만에 100년 전 망국의 주역 송병준의 생애를 살려냈다. “이완용과 친일 매국 경쟁을 한 송병준은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에 적극 협력하며 일왕으로부터 자작에 봉해졌다. 기생의 몸에서 태어난 서자로 수표교 다리 밑에서 거지 생활을 한 미천한 자가 조국을 짓밟은 일제에 빌붙어 일약 귀족이 됐다. 송병준은 나라를 판 대가로 거액의 은사금을 받았고, 은인과 친구의 재산을 빼앗는 등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해 부귀영화를 누렸다.”


송병준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독살설’과 ‘뇌일혈로 죽었다는 설’만 있다. 스님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보다 죽는 날까지 총독부의 중추원 고문이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는 그가 죽는 순간까지 일본에 충성을 바친 매국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임혜봉 스님의 ‘친일 조사’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스님의 이력을 잠시 들춰보면 여느 출가자와는 다르다. 안동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10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입산 출가했다. 여러 절에서 수행하며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스님은 2005년 친일 승려들의 행적을 고발하는 <친일 승려 108인>을 출간했는데, 최범술(전 도솔사 주지 1904?1979년)의 후손에게 ‘사자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지만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3년에는 <친일불교론>을 펴내는 등 친일 불교 연구에 매진해왔다. 현재 경기도 이천 부석암에서 지내며 <망국대부 15인>(가제)을 집필 중이다. 스님은 ‘친일 고발’을 통해 생생한 역사의 기록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있다. 이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생각한다. 


<시사저널>201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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