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 학살, 첫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이번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서중석 : 우리가 해방을 감격스럽게, 꿈같이 맞이하지 않았나. 그런데 학살이라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다. 분단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참혹한 학살은 인간 사회에서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부 극우는 신생 국가에서는 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까지 참혹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프레시안 : 한국의 전 역사에서 이때처럼 대규모 학살이 이뤄진 적도 없는 것 같다.
서중석 : 그렇다. 주민 집단 학살로 표현되는 이런 비극은 전근대 시기에도 찾아보기가 아주 어렵다. 현대에 들어와서 너무나도 큰 잘못을 저지른 거다.
프레시안 : 이 시기 내내 학살이 같은 강도로 일어나는 건 아니다. 주로 언제 일어났나.
서중석 : 1945년에서 1948년 사이 미군정 시기에도 학살 비슷한 현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큰 규모의 주민 집단 학살이 주로 일어나는 건 1948년 11월(4.3사건 당시 학살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기)부터 1951년 봄까지다. 전쟁 때도 전체에 걸쳐 학살이 일어난 게 아니다. 주로 1951년 1-2월(거창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때가 1951년 2월이다)까지 일어난다. (물론 그해) 3월에도 조금 있긴 하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학살 규모, 10만에서 50만 사이로 봐야”
프레시안 : 학살 규모도 논란이다.
서중석 : 학살당한 사람이 전부 몇 명이나 되느냐, 이것도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그러나 자료를 제시해 가면서 (명확히) 이 정도 된다고 얘기할 만한 정도의 조사나 연구가 돼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어림 추산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해방 후 집단 학살당한 사람이 한 100만 명 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100만 명 정도 학살당했다는 학자도 있다.
이런 부분은 참 얘기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과연 100만 명까지 학살됐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보다는 적을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프레시안 :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아까도 얘기했지만, 학살은 1948년에서 1951년 사이에 주로 일어났다. 그리고 남북한 전체에 걸쳐 일어나기는 하지만, 주로 논의 대상이 되는 건 남한에서 일어나는 학살을 가리킨다. 100만 명이라고 추산하는 사람들의 주장에서는 인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구가 예컨대 해방된 해에 몇 명이었는데 1952년, 1953년엔 몇 명이다, 이런 걸 가지고 얘기한다. (물론) 인구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전쟁 시기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다 계산에 넣어도 학살당한 사람이 100만 명은 될 것이라고 추정하는 거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무척 많아 보인다. 또 전쟁 시기에는 출산율 저하가 심했다. 베이비붐이 (전쟁이 끝난 후) 1950년대 중반부터 아주 크게 일면서 1960년대까지 이어지지 않나. 그것엔 전쟁 시기에 아기를 많이 못 낳았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학살과 관련해 제일 알기 어려운 부분이 공습 피해다. 전쟁하다가 비행기에서 폭탄이 떨어져 (군인이) 죽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민간인이 폭격기에 의해 죽어가는 기록도 꽤 나온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어느 정도 되느냐, 이건 아주 알기가 어렵다. 공중 폭격으로 죽은 사람은 대개 피란 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공중 폭격이 아니라 군경에 의해 죽은 사람 중에서도 (그 규모를) 제일 알기 어려운 게 피란민이다. 피란민이 명찰을 달고 다니는 건 아니지 않나.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중에 죽은 것 아닌가. 그래서 이걸 조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렇다고 폭격을 한 미군이 그걸 잘 기록해 놓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앞으로 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있어야 한다. 학살로 이 시기에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인원을 더 정확하게 추정하려면 조사와 연구가 더 많이 이뤄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학살 규모를 수십만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적잖은 것도 그런 사정 때문으로 보인다. 수십만이라 하면 최소 10만 명은 넘는다는 뜻이다.
서중석 : 아, 10만이 넘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까 수십만이라고 하는 게 맞을 거다. 10만에서 50만 사이로 봐야 하지만, 거기서 어디쯤 해당하느냐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조사와 연구로는 알 수가 없다.
프레시안 : 이 시기 전체 사망자에서 전투 중 죽은 군인, 그리고 민간인 사망자 중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죽은 사람 등을 제외하고 학살된 인원을 골라내는 문제로 보인다.
서중석 : 그렇다.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 피난살이하다가 피치 못할 일이 생겨 죽은 사람은 학살 피해자라고 보기 어렵다. 그건 다른 걸로 분류해야 한다. 학살은 가혹한 행위를 통해 다수를 죽이는 걸 주로 가리킨다. 거기에는 불법이라는 의미가 진하게 깔려 있다.
▲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 ⓒ연합뉴스 |
희생자=빨갱이? 억울한 죽음 후에도 당해야 했던 마녀사냥
프레시안 ; 학살 피해자는 어떤 사람들이었나. 희생자들이 시쳇말로 빨갱이였던 것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극우 반공 세력은 (희생자들을) 빨갱이로 몰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해방은 혁명적인 성격이 강했다. 시민 혁명, 사회 혁명적인 성격이 대단히 강했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면서 단체를 만든 경우도 많았다. 예컨대 농민들은 ‘소작료를 낮추거나 없애기 위해서는 단결해야 한다. 농민 조직에 들어와라’ 그러면 거기에 들어갔다. 또 부녀동맹 같은 단체에서 ‘여성이 과거에 학대당하지 않았느냐. 여성의 지위를 찾아야 한다. 이젠 인권을 주장해야 하는 거다’ 이러면 또 거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수많은 단체에 수많은 사람이 가입해 집회도 열면서 활동을 많이 했다.
(희생자 중엔 이런 사람들도 많은데) 이 사람들이 어째서 빨갱이냐. 이건 빨갱이다 하는 것을 떠난 문제다. 해방 직후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특히 우리나라처럼 일제 때 오랫동안 투쟁했고 일제의 침략이 워낙 심해 그것에 대한 반발이 굉장히 컸던 곳에서는 그만큼 해방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었다. 해방 후 변혁적 열망, 사회 혁명적이고 시민 혁명적인 변화가 굉장히 크게 일어났던 거다.
또 단일 지역으로는 학살이 제일 많이 일어난 제주도 같은 경우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이 정말 우리 제주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냐’, 이런 생각을 (사람들이) 많이 했던 것 같더라. 육지에 대한 반발심도 강했다. 육지에서 온 경찰이나 (우익) 청년단이 제주도에서 심하게 횡포를 부린 게 크게 작용했다. 이것에 대한 반발로 제주도 사람이 단결한 측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집단 학살이 일어날 때는 아 군경 보는 게 제일 무섭잖나. 어떤 일이 있어도 군경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중산간 마을로 도망친다든가 산으로 피신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나타났다. 강요배 화백 그림에 그런 장면들이 얼마나 잘 그려져 있나.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빨갱이로 볼 수 있나.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프레시안 : 정부 말을 믿고 따랐다가 학살된 이들도 많았다.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발생한 보도연맹원 학살도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서중석 : 4.3에 대한 연구도 많지만, 보도연맹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참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가입했느냐에 대해서도 그렇다. (좌익 활동에 앞장선) 남로당원 등은 이미 많이 도피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역별로 (보도연맹 가입) 할당 인원 같은 게 작용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일종의 관제 빨갱이 비슷한 식으로 됐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보호해준다’, ‘여러 편익을 준다’ 같은 얘기 때문에 가입한 경우도 있다. (이에 관한) 증언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자료도 나오고 있고.
(다시 강조하지만) 해방 후 역사적인 분위기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런 속에서 독립 운동. 민족 해방 운동이 추구했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지향이 아주 강한 평등주의로 이어질 때 사회주의와 맞닿을 수 있는 측면은 있다. 또 친일파에 대한 강한 반발이 단정 세력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면 단정 세력에서는 ‘저게 바로 색깔 가진 놈들 아니냐’, 이런 식으로 몰아세웠다. (학살 문제에는) 이런 측면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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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식조차 몰라야 했던 사회
프레시안 : 용어 문제도 짚었으면 한다. 과거에는 양민 학살이라는 표현이 주로 쓰이다가, 연구가 축적되면서 민간인 학살로 많이 바뀌었다. 누가 누구를 ‘양민’으로 규정할 것인가, 그리고 ‘양민’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죽여도 된다는 말인가 하는 점 때문으로 보인다.
서중석 : 용어와 관련해서도 살펴볼 문제가 많다. 양민 학살이란 말이 사람들 귀에 익었다. 그런데 (1987년) 6월항쟁 이후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면서 민간인 학살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늘었다). 2000년대에 민간인 학살 문제가 본격적으로 조사 및 연구되는 시점에 와서는 거의 다 민간인 학살로 통용됐다.
이유는 간단하다. 설령 빨갱이라고 하더라도 불법적으로 죽인다는 게 말이 되느냐,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민간인을 그런 식으로 죽인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거다. 양민이란 것은 과거 특수한 환경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한 표현이니까 이젠 보편타당한 학문적 용어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서 민간인 학살로 대세가 굳어진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난 민간인 학살이란 말을 쓰면서 주민 집단 학살, 양민 학살을 병용하는 게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프레시안 :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양민 학살, 양민 학살 하지만 6월항쟁 이전에 양민 학살이라고 하면 주로 거창 양민 학살을 가리켰다. (당시엔 잘 알려진) 다른 양민 학살이란 것은 별로 없었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창 양민 학살을 빼놓고는 양민 학살이라고 얘기한 것도 그렇게 없다.
제일 큰 학살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보도연맹원 학살은 6월항쟁 이후에 최초로 언급됐다고 볼 수 있다. 월간 <말> 1988년 12월호에서 김태광 기자가 보도연맹 학살 문제를 다뤘다. 현지 취재를 통해 확보한 증언 등을 토대로 한 기사였다. 그때까지 30대, 40대, 그리고 20대 젊은이들 대다수가, 어쩌면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은데, 그렇게 광범위한 보도연맹원 학살이 있었다는 걸 몰랐다. 그러니 양민 학살이란 말이 생길 수가 없었다.
난 당시 이런 현상을 보고 정말 놀랐다. 그래서 강연 같은 데서도 많이 역설하고 그랬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전국 각지에서, 거의 한 지역도 빠지지 않고 일어났다. 그래서 그 당시를 산 일정한 연령 이상의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 가짜설을 거의 모든 사람이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믿었듯이, 40대 이하 연령층은 1988년 김태광 기자가 얘기하기 전까지는 보도연맹원 학살을 거의 알지 못했다. 그만큼 안 알려졌다. 이게 가능한 건가. 도대체 그렇게 많은 학살이 일어났는데, 사람에겐 양심이란 게 있는 건데, 학살처럼 무섭고 잘못된 게 없는 건데, 그런 큰 학살이 일어났는데도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 정말 두려운 일이다. 이런 사회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보도연맹원 가족조차 ‘네 아버지가 보도연맹원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그 자식에게 안 해준 경우가 많았다.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는 이야기를 안 해준 거다. 다만 전쟁 때 돌아가셨다, 병으로 돌아가셨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거다. 그러니 자식조차 자기 아버지가 보도연맹원으로 죽었다는 걸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참 무서운 사회였다. 보도연맹이라는 게 뭔지 자식이 물어보면 설명해줘야 하는데, 그 어머니나 고모가 제대로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프레시안 : 그런 엄청난 일을 겪고도 30년 넘게 침묵해야 했다는 것 또한 비극이다.
서중석 : 그렇다. (상황이 그랬으니) 양민 학살이란 말이 한국전쟁 전후에 저질러졌던 학살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경우도 많지 않다. 제주 4.3 학살과 보도연맹원 학살이 양대 학살인데, 그것에 대해서 양민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어디 있느냐’라는 식으로 고발한 글이 거의 없었다.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이 (그에 관해) 최초로 쓴 거였는데, 그게 나온 게 1978년이다. 그것도 바로 금지됐다. (독재 정권이) 못 팔게 했다. 이처럼 양민이란 말이 어떻게 사용됐는가를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점도 있지만 제일 무서운 현상은 뭐냐 하면 민간인 학살이라고 하면 일부 극우 반공 세력이 ‘그거 빨갱이를 민간인이라는 걸로 포장하려는 거 아니냐’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도대체가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그런 논리를 내세우더라.
학살 당시 어린이도, 여자도, 노인도 많이 죽였는데 그때 죽이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나. ‘빨갱이 자식은 죽여도 좋다. 빨갱이 여편네는 죽여도 좋다. 빨갱이 애비는 죽여도 좋다’, 이런 식의 주장을 폈다. 그런 게 증언에 나온다. (빨갱이로 지목된) 당사자가 피신하니 (빨갱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부인 등을 죽이면서 그런 얘기를 공공연하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빨갱이 씨를 말려야 한다는 말이 참 많았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극우 반공 세력 가운데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이 쓴 글을 읽어보면 그렇다. 그런데 양민이란 말을 쓰면 (저들도) 가슴이 뜨끔한 게 있는가 보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당신들이 죽인 거다. 극우 군경이 죽인 거다’, 이것엔 가슴이 뜨끔한 게 있나 보다. 그런 점도 있고 또 역사성도 생각해서 나는 민간인 학살, 주민 집단 학살, 양민 학살 이 세 가지를 병용하며 번갈아 가면서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2013-10-21
[기사원문보기]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참 무서운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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