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교과서 논란①] 경제건설 위해 한일 정상회담
지난 10일 교육부가 최종 승인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여전히 황당한 수준의 역사 왜곡 논란을 낳고 있다. 교육부는 오는 23~24일,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에 대해 다시 표기상 오류 수정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러나 <프레시안>이 민족문제 연구소와 함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살펴본 결과,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등을 교정한다고 정상적인 교과서가 될 수준이 아니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가 18일까지 찾아낸 역사 왜곡·오류 400건과 19일 학계가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할 200건을 합치면 600여 건에 달한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박승직’을 중요한 기업인으로 소개하고 박정희 정권을 미화하는 등 중대한 역사 왜곡·오류 내용이 버젓이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고 연구소는 이날 밝혔다. 기업과 친일을 미화하기 위한 교학사 교과서의 노력 ①”1995년 한국 기네스 협회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로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현 신한은행)을 선정하였다.” (199쪽) 한국 기네스 협회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 가장 오래된 상장 기업’으로 ‘한성은행’이 아니라 ‘조흥 은행’을 선정했다. 연구소는 신한 은행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려다 사실과 다른 서술을 했다고 지적했다. ②”박가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화장품으로 두산 그룹 창립자인 박승직의 부인 정정숙이 만든 상품이라고 한다.” (245쪽) 애초에는 ‘포목점을 운영하던 박승직’으로 되어 있었는데 수정·보완을 거쳐 ‘두산 그룹 창립자인 박승직’으로 수정됐다. 연구소는 “박승직이나 두산 그룹이 뭐 그렇게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존재라고 교과서에 굳이 명기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더욱이 박승직은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친일파”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③”한국인 상공업자는 경제적 자립이 곧 독립을 이룰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여겨 상공업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대규모의 토착 자본이 투자된 경성 방직 주식회사 외에도 평양의 메리야스 공업과 고무신 공업은 우리 민족의 기호에 맞고 내구성이 강하여 값싼 제품을 생산하여 일본 기업과 능히 경쟁할 수 있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 대기업들의 공업 분야 투자가 급증하였다” (278쪽 ) 일제강점기 당시에 한국인 상공업자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교과서는 마치 제품만 잘 만들면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 대기업의 공업 분야 투자 급증’의 이유가 병참 기지화였다는 사실은 누락했다. ④”동진 수리 조합은 1928년에 섬진강 상류에 유역 변경식 운암댐을 완성함으로써 김제 광활면 간척지에도 농업용수를 공급할 수 있었다” (279쪽, <이야기 한국사>-전북 김제에서 지주제의 발달 중) 일본 덕에 간척과 수리가 이뤄졌다고 묘사하며 당시 한국 소작인들의 실상을 무시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 왜곡 우익 교과서인 후쇼사 교과서와 궤를 같이하는 지유사 교과서를 보면, “한국병합 후 설치했던 조선총독부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철도·관개(灌漑) 시설을 정돈하는 등 개발을 하고, 토지조사를 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화사업에 의해 그때까지의 경작지로부터 쫓겨난 농민이 적지 않았고”라고 명시한다. 연구소는 “교학사 교과서는 일본 우익 교과서도 서술한 소작인의 실상을 누락했다”고 지적했다. ⑤”만주 사변 이후 일제가 침략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며 이를 크게 홍보하자 한국인의 일부는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고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되었다. (중략) 상공업자들 가운데는 일제의 전시 호황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88쪽) 친일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일제의 전시 호황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파라는 사실을 서술하지 않았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미화…빛나는 경제 발전만 남아? ①”정부는 신속한 경제 건설을 위해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두르기로 하고 한·일 회담을 진행하였다. 야당은 반대하였고 학생들은 시위를 벌였다. 1964년 6월에는 서울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할 정도의 시위가 일어났다.(6·3사태) 그러나 정부는 1965년 국교 정상화를 이루었다.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확보된 대일 청구권 자금과 차관은 경제 건설에 큰 힘이 되었다.” (324쪽)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해 ‘경제 건설’이란 당위성을 부여했을 뿐 야당과 학생들이 왜 반대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연구소는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과정에서 경제발전을 강조함으로써 식민청산의 과제가 유실된 한계와 평가를 전혀 하지 않았다. 특히 식민지배의 가장 큰 피해자인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었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②”1981년까지 국민소득 1만 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목표는 4년을 앞당겨 1977년에 모두 달성되었다.” (332쪽) 1977년에 달성한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가 아니라 1000 달러였다. 수정·보완을 거쳤는데도 기초적인 수준의 통계 오류가 여전했다. ③”1980년대에는 정치적으로 권위주의적 정부가 들어섰으나 경제적으로는 시장 경제 원리를 적극 도입하였다.” (333쪽) 전두환 정권에 대해 군사 독재 혹은 신군부 정권, 독재 정권이라는 표현이 없다. 연구소는 “갑자기 1980년대에 들어서야 ‘시장 경제 원리를 적극 도입했다’면 이승만, 박정희 정권기 경제 원리는 시장 경제가 아니란 뜻이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④”박정희 정부는 빈곤과 정체에서 잠자고 있는 농촌을 깨워 일으키지 않으면 한국의 근대화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정부는 농민들의 근면, 자조, 협동 운동으로, 그리고 잘사는 농촌을 건설하기 위한 농촌 개발 운동으로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였다. (중략) 농민의 자립 정신과 협동 정신을 길러주는 운동이 되었다.” (334쪽) 연구소는 교학사 교과서가, 보수·우익적 역사관을 가진 경제단체의 시각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교학사 교과서에는, 2008년에 대한상공회의소(이하 회의소)가 교육부에 제출한 ‘초중고 교과서 문제점과 개선방안’ 의견서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당시 회의소는 새마을 운동에 대해 “(새마을 운동은) 박정희 정부의 독재와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는 금성 교과서의 서술을 문제 삼으며, “새마을 운동에 대한 고의적, 악의적 비방”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프레시안>2013-12-19 [기사원문보기] [단독] 교학사교과서 수정본도 오류 600건…박정희 미화 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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