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운정고·경북 성주고 “교학사 교과서 교체”
분당영덕여고·여주제일고 등도 재검토 들어가
교사 “선정과정 외압” 폭로…학생, 대자보 항의
역사 왜곡과 사실 오류로 비판받은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를 올해 교재로 채택한 고교들이 학생과 학부모, 교사, 동문회 등 학교 구성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특정 교과서 선정에 반대해 학생과 학부모 등이 들고일어나는 초유의 상황이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취소하는 학교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경기도 파주의 운정고는 2일 역사 교사 등으로 이뤄진 역사교과협의회를 열어 교학사 교과서 선정을 취소하고 다른 출판사의 교과서로 바꾸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학교의 이순덕 교감은 “학생과 학부모, 지역사회로부터 ‘1%도 선택받지 못한 교과서를 왜 선정했느냐’며 많은 항의와 우려가 제기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밖에 이미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경북 성주고도 이날 다른 교과서로 바꾸기로 했고, 경기도 분당영덕여고·여주제일고 등도 재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교학사 교과서 선정 과정에서의 외압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경기도 수원 동우여고 공기택(54) 역사교사는 <한겨레>에 “교장실에 불려가 ‘교학사 교과서를 추천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이 교과서를 (선정 한도인) 3위에 올렸는데 어찌된 일인지 3위가 (최종) 선정됐다”고 말했다. 동우여고 한 학생은 이에 항의하는 대자보를 이날 붙였다.
이런 현상을 두고 교육계에서는 ‘비상식적’인 학교의 결정에 대한 ‘상식’의 저항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친일·독재 미화 논란에 오류투성이로 밝혀진 교학사 교과서를 교재로 선택한 학교의 비합리적 의사결정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다. 재단이나 학교장 중심의 권위적인 학교 분위기가 교과서 선정 작업 때도 반영되면서 교육 수요자인 학생·학부모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선택이 이뤄진 데 따른 결과다.
박범이 참교육학부모회 회장은 “‘불량 교과서’로 수업을 받아야 하는 학생 당사자나, 자기 자녀의 문제인 학부모 입장에서는 학교의 비합리적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며 “보통 학부모들은 학교 문제에 대해 자녀 걱정 때문에 문제제기하기 쉽지 않은데, 이번에는 강하게 반발하는 모습이 여느 때와 다르다”고 말했다.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둘러싸고 교육 주체들이 집단적인 저항을 하는 현재의 모습은 2000년대 중반 일본에서 극우파가 만든 후소사판 교과서에 대해 교사, 역사학자, 시민들이 불채택운동에 나섰던 것과 닮은꼴이다.
결국 애초부터 수많은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교학사 교과서 지키기’식 검정과정을 운영해 온 교육부가 자초한 일이라는 비판이 인다. 한국역사연구회 하일식 회장(연세대 교수)은 “이념 논쟁 이전에 교학사 교과서에 오류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을 학계에서 분석해 알렸는데도, 이런 교과서를 선택한 교장이나 재단은 도저히 교육자라고 볼 수가 없다. 특히 이런 교과서를 최종 승인한 교육부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음성원 기자, 파주/박경만 기자 esw@hani.co.kr
학생들 “역사 잊은 민족에 미래 없다” 대자보
“교육부 장관 사퇴를” ‘역사왜곡 교과서 퇴출을 위한 광주시민대책위원회’와 ‘친일·독재 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달 19일 오후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정문 앞에서 교학사 교과서 즉각 퇴출과 교육부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뉴시스 |
[교학사 교과서 채택 반발] 교학사 교과서 채택 학교 후폭풍
“창피하고 부끄럽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참담하다”….
친일·독재 미화와 사실 왜곡 논란을 빚고 있는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가 2일 현재 전국에서 14곳으로 알려지면서 교과서 선정 철회를 요구하는 해당 학교 학생, 학부모 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고생들이 새벽녘 학교에 나와 대자보를 붙이는가 하면, 학교 누리집 게시판에는 교과서 채택 철회를 요구하는 글이 연이어 올라왔다. 논란이 불거지자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 가운데 4곳은 교과서 선정을 취소하거나 재선정 절차에 들어갔다.
2일 아침 7시께 경기도 수원 동우여고 2·3·4층 계단 복도 6곳에 ‘안녕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이 학교 3학년생 3~4명이 함께 쓰고 붙인 것으로 알려진 대자보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지칭하고 안중근 의사를 교과서 색인 목록에서 제외한 점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군을 따라다닌 경우가 많았다’고 쓴 점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5·16’ 사료를 선별적으로 편집, 역사적 오류가 다수 발견된 점 등 교학사 교과서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들은 이와 함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문구를 교과서 집필진들에게 건네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말았다. 정말 한탄스럽다”고 적었다. 학교 쪽은 이 대자보를 10여분 만에 뗐다. 학교 관계자는 “검인을 받지 않아 규정을 무시한 게시물이어서 철거가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이 학교 학생회도 최근 간부회의에서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모아 학교 쪽에 전달하기로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수원 동우여고 학생들
안중근 색인 제외 등 조목조목 비판
파주 운정고 학부모 거센 항의
“수능시험서 피해 볼 우려”
전교조, 외압 의혹 특감 요구
경기도 내 공립학교 중 유일하게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파주 운정고등학교는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교과서 선정을 취소하기로 했다. 이 학교 이순덕 교감은 “많은 항의와 우려가 제기됐다. 학생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학생·학부모가 원하는 교과서로 공부할 수 있도록 교학사 교과서를 제외한 나머지 8종을 대상으로 재선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교학사 교과서에 사실관계 오류가 많은 것으로 드러난 것도 학생과 학부모의 불안감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운정고 학부모 최아무개(48)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왜곡된 역사관도 문제지만 이 교과서로 공부하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틀릴 수 있다는 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지난해 자율형 공립고로 전환된 이 학교는 고양, 파주지역에서 성적이 높은 학생들이 많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학교 학부모들은 이날 학교를 항의 방문하거나 전화 통화, 온라인 글쓰기 등을 통해 선정 경위를 따져 묻고 교과서 교체를 요구했다. 김금석 운정고 학교운영위원장은 “대다수 학부모와 학생들이 원한다면 당연히 바꿔야 한다. 교과서 선정에 미흡한 부분이 있었던 것에 대해 학교 쪽이 사과하고 수정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말했다.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한 경기도 성남 분당영덕여고 누리집 자유게시판에는 항의 의견이 줄이어 올라왔다. 한 학부모는 “학부모라는 게 정말 부끄럽다. 학생들이 모를 것 같은가”라고 썼다. 항의글이 수십건이 올라오자 분당영덕여고 쪽은 누리집 자유게시판을 없애기도 했다.
반발이 거세지자 경북 성주고도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취소하기로 했고, 분당영덕여고와 경기 여주 제일고는 채택 취소와 재선정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긴급회의를 여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자율형사립고인 전주 상산고는 교학사 및 지학사 2종을 역사 교과서로 채택했다. 학교 쪽은 “균형감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북학부모회’는 “비난 여론을 모면하고 싶은 얄팍한 술수일 뿐이다. 입시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는 자율형사립고에서 입시 비중이 낮은 한국사를 2종의 교과서로 가르치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라고 비판했다.
대구지역에서 유일하게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포산고 운영위원회는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면서 ‘다른 교과서들은 정치적 성향이 강해 교학사로 선정하는 것이 좋다’고 의견을 모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한겨레>가 입수한 ‘제99회 포산고 운영위원회 임시회 본회의 회의록’을 보면, 운영위원회는 지난 12월30일 오전 11시30분부터 회의를 열어 ‘2014학년도 포산고 한국사 검정 교과서 선정 심의안’을 다뤘다. ㄱ위원은 “나머지 교과서들은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선정하신 교학사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냈다. 이에 대해 학교장과 교사, 학부모 등 나머지 운영위원 6명은 모두 “재청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포산고 운영위원회가 교학사 교과서를 선정할 당시는 교학사 교과서의 보수 편향과 역사 왜곡 관련 논란이 한창 일고 있었다.
울산 전체 고교 53곳 가운데 유일하게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현대고 누리집에는 동문들의 항의글이 이어졌다. 현대고는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는 현대학원에 딸린 학교다. 이 학교 2회 졸업생은 누리집에 “온갖 오류투성이 교과서로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란 글을 올렸다. 현대고 쪽은 “교과협의회에서부터 다수 교사들이 교학사 교과서를 일순위로 추천해 이 의견이 반영됐다”고 밝혔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교과서 선정 과정에서의 ‘외압’ 의혹을 제기하며 시도교육청의 특별감사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전교조 울산지부 관계자는 “현대학원의 현대청운고와 현대공고 등 나머지 2개교에선 학교장을 통해 역사 교사들에게 교학사 교과서를 학교운영위에 추천해 달라는 압력이 들어갔으나 교사들이 반대해 이 교과서 채택을 1년 뒤로 미룬 것으로 알고 있다. 현대고에도 같은 압력이 있었을 정황이 짙다”고 주장했다.
전교조 경기지부 관계자도 “자체 파악 결과 학교장이 해당 교과 선생님들에게 교학사 교과서가 선정될 수 있도록 은근한 압력을 가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경기도에서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5개 학교에 대한 도교육청의 특별감사를 실시하라”고 촉구했다. 전교조 대구지부는 이날 성명서를 내어 자율형공립고인 포산고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채택을 즉각 취소하라고 주장했다. 성남 파주 전주 울산 대구/
김기성 박경만 박임근 신동명 김일우 기자
<한겨레>20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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