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실하고 엉터리인가를 절감할 때가 있다. 이렇게 나의 무식과 무지를 새삼 깨달을 때 내가 지금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 공부하기에는 이미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너무 멀게 느껴져 아득하기만 하다.
새해 들어 처음 읽은 책이 전봉준의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전진우의 장편 역사소설 「동백」(나남, 2014)이었다. 이 책이 소설적 구성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보다 충실한 탓도 있겠지만, 여기서도 나는 나의 동학이나 갑오농민혁명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형편없는 것인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정초부터 되게 한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갑오년은 내게 그렇게 왔다.
각별한 역사와 간절한 사연 담긴 헌법 제1조
그보다 더 참담했던 경험이 작년 연말에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정 시행하고 있는 임종국상(林鍾國賞)의 시상을 보고 나서였다. 임종국상의 제7회 학술부문 수상자는 박찬승 교수였는데, 그 수상저서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돌베개, 2013)라는 책이었다. ‘헌법 제1조 성립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 대해 임종국상 심사위원회는 “제헌헌법을 중심으로 민주공화국 수립의 기원과 과정을 역사학적 관점에서 해명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지향해야 할 바를 뚜렷이 했다”고 그 수상이유를 밝혔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는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뿐, 거기에 뿌리 깊은 역사가 있고 사연이 있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통탄스럽고 한심한 일인가.
나는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는 다른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의 그것을 따라한 것으로 그 내용이 비슷한 줄만 알았다. 그러나 헌법 제1조에 “OOO는 민주공화국”이라고 표현한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헌법 제1조는 종교의 자유를 비롯한 자유권을,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의 사상을 반영하여 자유와 평등을, 2차 대전 이후에 만든 독일의 헌법은 인종의 차별을 금지한다는 것을 각각 헌법 제1조에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헌법 제1조는 각기 그 나라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하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헌법 제1조로 했을까. 이 책에 따르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의 지식인들은 공화제보다는 입헌군주제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이 나라 지식인들은 대한제국을 다시 복원하기보다는 공화제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울 때 그 헌장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문장을 첫 머리에 넣게 되었다.
‘민주’라는 말이 들어간 경위도 재미있다.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은 공화국에는 ‘귀족공화국’과 ‘민주공화국’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고, 따라서 공화국을 세우되 반드시 ‘민주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민주를 갈망했고 민주의식에 투철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조항은 그대로 1944년 4월, 임시정부의 수정 임시헌장 제1조로 이어졌고, 마침내 제헌헌법 제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문장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랜 역사 아우른 ‘대한’, 새로운 지향 ‘민주’ ‘공화국’
이참에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게 된 과정도 알아보게 되었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1897년 10월, 고종이 황제의 위(位)에 오르면서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고종은 반조문(頒詔文)에서 단군과 기자 이래의 여러 나라와 마한·진한·변한까지를 모두 아우른다는 뜻에서 ‘대한’을 국호로 정한다고 했다. 이것이 1919년 임시정부를 세울 때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신석우(申錫雨)의 발의를 표결로 채택,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정해진 것이 그대로 제헌헌법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에는 우여와 곡절의 역사가 담겨있고 나라를 잃은 백성의 한(恨)과 소망이 절절히 배어있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거나 우연히 그 조항이 탄생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헌법학자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문장은 고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헌법 제1조가 바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지향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 그랬었구나 하는 감회와 함께, 웬일인지 최근 들어 특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벅 차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 말이 자꾸만 되뇌어지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은 또 어인 일인가. 그렇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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