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 3·1혁명 95주년을 맞는다. 우리는 이제까지 3·1운동이라 표기하고 3·1절을 국경일로 기념해왔다. 제헌절·광복절·개천절 등 다른 국경일은 그 의미가 명칭에서 충분히 드러나는데 유독 ‘3·1절’은 가치중립적인 숫자로 불러왔다. 정부가 1949년 10월1일 법률 53호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때부터 ‘3·1절’ 호칭은 논란이 많았다. 이제부터라도 마땅히 ‘3·1혁명일(절)’로 고쳐야 한다. 이름을 바로잡는 정명사상(正名思想)은 나라의 근본에 속한다. 기미년 3~4월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추구하는 가치와 저항, 참여 민중, 세계 피압박 해방운동에 끼친 영향, 한민족이 처한 상황이 그랬다.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대혁명,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못지않았다. 세계혁명사에 비해 손색이 없는데도 우리는 스스로 ‘운동’이라 비하해왔다. 어떤 외국인이 ‘스리 콤마 원 스포츠’라고 불렀다는 것을 우스개로 탓할 수만은 없다. 3·1혁명은 사망 7500명, 부상 1만6000명, 피검 4600명을 낸 장엄한 피의 혁명이었다. 당시 2000만 국민 중 210만명이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자진해서 항일시위에 참가했다. 이념·성별·지역·신분에 상관없이 범국민적인 항쟁이었다. 국민의 10분의 1 이상이 항쟁에 나선 것은 세계 식민지 역사상 초유의 현상이다. 3·1혁명이 추구한 가치는 고종의 기일을 기해 거사를 도모했으나 결코 복벽주의가 아닌 민주공화주의였다. 이후 상하이를 비롯해 몇 개의 임시정부가 수립(선포)되면서 내세운 것이 하나같이 민주공화제의 정체로 나타났다. 이것은 4·19혁명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되고 있다. 3·1혁명을 통해 한민족은 개국 이래 최초로 근대적인 시민혁명을 도모한 것이다. 이로써 봉건적 신민(臣民)의식에서 근대적 신민(新民)의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3·1혁명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출산하고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현행 헌법은 3·1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 승계를 명시한 것이다. 5년 뒤면 3·1혁명과 임정 수립 100주년이다. 하여 제안한다. 광화문광장에 3·1혁명 기념탑과 근처에 임시정부기념관을 짓자. 친일파들을 기리는 각종 기념사업회·상·기념관은 넘치는데 임정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얼빠진’ 모습이다. 헌법정신의 위배이기도 하다. 지금 광화문에는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두 분 다 우리 민족 구원의 지도자다. 그런데 두 분은 조선왕조 시대의 인물이다. 민국을 세우고도 100년을 앞둔 나라에서 수도 심장부에 민국의 상징이 없다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3·1혁명기념탑(물)은 1919년을 상징하는 조형물이었으면 좋겠다. 박근혜 정부의 성향으로 보아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국민의 성금으로라도 세웠으면 한다. 다행히 2019년은 새 정부가 들어선다. 지금부터라도 3·1정신을 잇고자 하는 국민·단체들이 뜻을 모으고 아울러 선포 100주년을 앞두고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기미독립선언서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도록 준비했으면 한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침략주의 언설이 끊이지 않고, 내부적으로는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교과서 파동이 말해주듯이 일제식민지배를 동경하는 세력이 증대되고 있는 시점에서 광화문 3·1혁명기념탑의 의미는 각별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근원, 민족 정체성의 정립, 국민통합, 근대적 시민사회의 출발, 자주독립정신, 남북통일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1혁명 당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광화문으로 진출하여 일경과 맞섰다. 광화문은 3·1혁명의 성지였다. 3·1혁명 100주년을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을 수 없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한겨레> 2014-02-26 ☞ 기사원문: [시론] 광화문에 3·1혁명기념탑 세우자 / 김삼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