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군에 끌려갔다 해방 후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억류됐던 피해자들의 모임인 ‘시베리아 삭풍회’의 이재섭 회장이 지난 3일 오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베리아 삭풍회’는 1990년 12월 결성되어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를 상대로 전후피해보상을 위한 힘겨운 투쟁을 벌여오고 있는 단체이다. 고인은 故 이병주 회장에 이어 2011년부터 회장직을 맡아왔다. 고인은 시베리아 억류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여 아픈 역사를 세상에 알리는 한편, 고령임에도 피해자들의 권익을 되찾는 활동에 진력해 왔다. 경기도 시흥이 고향인 故 이재섭 회장(1925년생, 향년90세)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45년 8월 1일 징병2기생으로 평양공병대에 강제징집당했다. 이후 만주국 관동군으로 전속되어 북만주 국경에 위치한 하이라루 20495공병부대에 배속되었다. 일본이 패망하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1945년 9월 15일부터 크라스노야르스크 제1수용소에서 3년 5개월동안 수용되었다. 강제징집된 조선인 출신임에도 부당하고 참혹한 포로생활을 겪은 고인은 1948년 12월 28일 드디어 나호트카항을 거쳐 흥남항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통과하여 남한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적성국인 소련에서 귀환했다는 사실과 북한을 통과하여 남하하였다는 이유로 또다시 인천수용소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대부분의 시베리아 억류 귀환자들은 풀려난 뒤에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되어 감시당하는 등 거의 전 생애에 걸쳐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안고 살아왔다.
▲ 故 이재섭 회장의 빈소 모습 민족문제연구소는 2003년부터 ‘시베리아 삭풍회’와 인연을 맺고 피해보상운동을 지원해 왔다. 지난 2009년에는 시베리아 억류 귀환 60주년을 맞아 전시회와 기념식을 개최한바있다. 이들이 왜 천황의 군대로 끌려갔는지, 일본이 패망했는데도 왜 돌아오지 못하고 시베리아에 억류당했는지, 그리고 이 문제가 50년 동안 외면당하다가 어떻게 진상규명 활동을 벌이고 있는지를 다룬 최초의 전시회이자 무사귀환을 자축한 조촐한 기념식이었다. 이후에도 연구소는 ‘시베리아 삭풍회’ 정기 모임에 참석하며 할아버지들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생전 이재섭 회장의 깊게 패인 주름과 힘겹게 걷는 걸음걸이가 혹독한 시베리아의 동토에서 받은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 아니었다”고 회고 했던 고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빈소는 안산 군자장례식장 301호에 마련됐고 발인은 6일이다.(☎031-491-4432)
“할아버지 여기 봐주세요.” “자. 찍어줘.”
일본으로부터 사죄는커녕 망언만 듣고 가신 이재섭 회장님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 2013년 5월 31일 故 이재섭 회장의 마지막 모습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안미정> 2014-03-05
|
주요기사
[알림] ‘시베리아 삭풍회’ 이재섭 회장 별세
By 민족문제연구소 -
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