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장인 임헌영 선생을 뵈러 가는 길, 영하 십도의 칼바람이 청량리 떡전사거리를 쌩쌩 달리고 있다. 어수선한 정세처럼 바람에 쓸려다니는 종이와 비닐봉지들. 박설희_시인, 한국작가회보 편집장 최근 일이 많았지요. 교학사 교과서, 그 이전에 『현대문학』 건도 있었고요. –그 기사를 보는 순간에 ‘이건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자칫하면 문화예술 전반에 된서리가 내릴 수 있는 징조다’ 생각했어요. 한 잡지사의 문제가 아니고 그걸 봄으로써 다른 잡지들도 스스로 사전점열을 할 수 있지요. 작가들이 글을 쓸 때에도 이렇게 쓰면 혹시 안 실어주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을 심어주는 데에는 성공을 한 겁니다. 영화를 종종 보십니까? –바빠서 <변호인>이고 <레미제라블>이고 못 봤어요. 제가 못 봤는데 그만한 관객 수가 있다는 데 만족합니다. 빅톨 위고가 만약 우리나라에 와 있으면 지금 뭘 했을까요? 현정권 체제 하에서 누구도 할 수 없는 반독재 민주화 통일 운동을 했을 겁니다. 아마 빨갱이 소리 들었겠지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해서 18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는 도중에 쓴 글이 『레미제라블』입니다. 자베르 경감이 추격 끝에 장발장을 잡았는데 영장이 없다고 그냥 가지요. 우리 실정과 비교해볼 때 놀라웠어요. 약 이백년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유럽은 전체적으로 18세기 계몽주의 때부터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역사를 바로 보는, 독재를 싫어하는 그런 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개화기 때의 문학을 계몽주의 문학이라 하지만 서양이 겪었던 인간존재론적인 계몽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독재가 부활할 수 있는 풍토인 거지요. 영화를 보고 공감대를 느끼는 것,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서 국민들이 공감대를 넓혀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염려가 되는 건 정작 정치현실로 돌아오면 다 이상하게 둔갑을 해버린다는 점입니다. 투개표 잘못인지 아니면 국민들이 예술과 교육과 현실 정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참배하는 걸 우리 정부가 욕할 자격이 없어요. 정말로 아베를 비판하고 싶으면 당장 교학사 교과서를 취소해야 합니다. 교학사 교과서는 서울 남산에 야스쿠니 신사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2012.5.4 국민일보 서평『불확실시대의 문학』에서 민족주의와 레드컴플렉스를 다루셨지요. 작년 한 해 빨갱이, 종북좌파라는 말이 난무했는데요, 레드컴플렉스와 관련 있는 건가요? –관련 있지요. 거기선 문학작품으로만 다룬 거고 실제로 사회적인 문제거든요. 공동 책임이 있지요. 북한도 육이오 때 한 일이나 그 뒤에 냉전체제 속에서 남한 사람들에게 줬던 공포의식 같은 거 생각해 보면 책임이 있지요. 남한에서도 진보세력들이 국민들에게 다가서서 일체감을 주는 게 아니고 한 발만 앞서야 하는데 경쟁하듯이 세 발 네 발 앞섰어요. 그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앞으로 상당히 어려워요. 독재옹호세력들에게 빨갱이, 종북 타령보다 더 좋은 무기는 없어요. 그들은 몇 가지 속성이 있거든요. 대개 독선적이고, 부패했고, 친일파를 옹호하고, 통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재벌을 옹호하고, 전쟁을 좋아하고. 그들이 야당에게 권력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부정선거와 종북좌빨입니다. 그래서 그걸 안 버립니다. 이쪽에서도 그게 안 먹혀들도록 해야 하는데 그 동안에 전연 그런 게 없었어요. 그게 아까 얘기한 계몽주의입니다. 유럽에선 계몽주의가 그치면서 종교적 편견과 함께 이데올로기에 의한 편견도 없어져버려요. 레드컴플렉스에 특별한 해법이 없나요? –우리 자신이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여야 되지요. 여러 가지로 봐서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다, 저런 사람이 정권을 비판할 때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정치가들도 그렇고요. 민주화 십년 동안에 레드컴플렉스가 상당히 수그러들었다가 이번에 아주 악질적으로 악용을 해서 없어진 걸 살리려 했지요. 그런데 이 정권과 함께 레드컴플렉스의 효능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그럼으로써 우리가 선진국과 함께 되는. 올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중점적으로 하실 사업은요? –여전히 친일인명사전을 보완할 겁니다. 우리 연구소의 근본은 동아시아의 평화정착입니다. 그걸 위해서는 과거사 청산을 반드시 해야하고요. 장애가 되는 부분에 대해서 비판하고 투쟁하는 것이지요.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시는 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요? –자기 조상은 친일이 아니다 소송을 내는 것, 가처분 신청해서 사전을 발간 못 하게 하려는 것. 다 우리가 승소했어요. 사전을 내보니까 친일에 대해서는 국민적인 공감대와 지지를 받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지요. 이번 교과서 문제는 재확인한 거고요. 그런데 정부가 그걸 끝까지 하려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절대 발 못 붙이게 해야지요. 이게 연구소뿐 아니라 작가회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문학의 가장 큰 영역은 역사거든요. 어느 나라든지 가장 위대한 작품은 다 역사문학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문학의 위기는 역사를 포기한 문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대담론을 문인들이 포기한 뒤부터 문학 자체는 살아 있는데 문인이 오히려 죽은 거지요. 노동문학도 사실은 그 근본이 역사인데 역사의식을 도외시하고 너무 현장에 함몰돼 있어 작품이 안 나왔던 겁니다. 21세기 한국문단의 과제가 뭔가 여쭤보려고 했는데, 그게 연관이 있나요? –지금 당장 문학의 거대담론이 나와야 합니다. 저는 문학을 이렇게 나눠요. 문학인들과 문학도를 위한 문학, 중산층 여성들을 위한 문학, 시대가 요구하는 문학. 지금 우리 문학은 첫번째 문학에 아주 충실한 거에요. 그 문학독자들이 사서 보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겁니다. 두 번째 문학은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얘기한 건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문학은 중산층 여성들이 좌우한다 예언을 했어요. 시대가 요구하는 문학엔 아무도 대응을 안 해요. 겁도 나고 장사 안 된다는 핑계로. 그런데 장사 안 됩니까? <레미제라블>도 보고 <변호인>도 보고 하는데 그런 소설이 나오면 왜 안 되겠어요. 소설은 일반 독자들이 『태백산맥』처럼 재미있게 읽어야 합니다. 세계문학 전체가 그런 재미있는 문학이에요. 그 시대를 꿰뚫어 보는 눈, 이게 문학의 기본이지요. 세 가지 문학이 골고루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오십 년, 백 년 지난 뒤에 남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 문학이 얼마나 빈약한가 알 수 있는 거지요. 비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학이 이렇게 된 원인이 비평가들에게 있다고 봐요. 거시적 탐구가 없어요. 내가 어떤 작가를 좋아한다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 작가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고 남아야 된다는 걸 보장하는 건 없는 거예요. 골고루 연구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점이 있지만 문학 가치관을 바로 세우지 못하는데 작가들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습니까. 그리고 평론가는 학자하고 다른데 지금은 평론이 학문처럼 돼 버렸어요. 평론도 시 소설처럼 대중화 돼야 합니다. 어느 나라 문학사든지 외국문학 이론이 들어와서 쓴 평론은 하나도 안 남아요. 우리는 독특한 문화고 삶이기 때문에 외국의 어떤 탁월한 이론도 안 맞아요. 우리나라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결국은 평론도 당대를 반영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중성도 있다고 봐요. 제가 좋아하는 평론가 중에 에드먼드 윌슨이라고 『핀란드 역으로』를 쓴 사람인데 거의 준역사학자입니다. 자유로운 지성이 되어서 문학 이외에 인류학, 역사학, 미술 등을 가지고 진중권처럼 다양하게 사회비판도 하면서 대중과 호흡하는 평론이 돼야하지 않을까요. 가라타니 고진, 얼마나 대중력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민족이란 뭔가요? –민족의 개념은 지금 와서는 유동적으로 봐야 돼요. 그전에 민족문학 하면 민족의 중심은 민중, 이렇게 해석했거든요. 지금도 글을 쓰면 그렇게 쓸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국민국가, 그게 지금은 민족의 개념을 대신합니다. 국민국가라는 건 같은 경제권에 같은 행정조직에 같은 문화공동체에 사는 거지요. 베트남 사람이 시집 와서 한국유행가를 듣고 한국문학 작품을 읽고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인 거지요. 국민국가문학이라고 하면 너무 복잡하니까 민족문학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사실 유럽은 국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무역이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국가 단위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국민국가라는 그 문화 정서는 인류사회가 존속하는 한 없어지지 않습니다. 세계 정부가 되어도 지방색처럼 남아 있을 거고, 아무리 우리가 영어를 잘 해도 우리 후손들은 결국 우리말을 쓰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문학이 소중한 거지요. 향후 계획은요? –점점 더 문학을 중심축으로 신경을 쓰려고 해요. 책 내는 게 제일 급해요. 지금 원고 쌓인 게 열다섯 권 분량 돼요. 해외동포문학, 북한문학, 유럽 문학기행, 시론, 소설론, 명작 속의 여성, 명작 속의 남성, 문단사 등. 죽기 전에 내가 꼭 써야되겠다 하는 것은 당연히 문학사지요. 일반 문학사가 아니고 소설사회사로 쓰고 싶어요. 문인들에게 새해 덕담 부탁드립니다. -2014년은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에게는 행운의 해가 될 겁니다. 왜냐하면 한 시대, 한 사회가 모순과 갈등에 차 있을수록 그 국민들은 뜨거운 문학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문학을 창작할 수 있는 문인은 작가회의 회원들입니다.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 더보기: 임헌영의 문학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