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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평화의 소녀상’ 작가 김운성·김서경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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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수상하다. 한일관계가 불편하다. 아베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연일 강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군이 직접 나서서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증거는 없다라며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인하고 있다. 여기에 발맞춰 아베의 낙하산 인사들은 정권의 입맛에 맞는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NHK 회장은 전쟁을 하고 있는 어느 나라에도 위안부는 있었다는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최근 일본정부는 프랑스에서 열린 만화전에 출품한 위안부 기획전을 무산시키려 시도하다 국제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가속화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가 위안부문제 등 일제의 만행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20111214,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1000번째 수요집회가 열리던 날, 화의 소녀상(이하 소녀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상은 여린 소녀의 모습으로 위안부 문제에 소극적인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 그리고 세계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소녀상의 시선이 불편한 일부 일본인들은 말뚝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소녀상과 함께 이를 제작한 작가들도 유명 인사가 됐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언론기사를 검색했다. 신문, 방송, 잡지 등 소녀상 작가들을 인터뷰한 기사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민족문제연구소와도 인연이 닿아 있다. 현재 작가들은 연구소 2대 이사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의 동상을 제작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시점인데다 조문기 선생 동상 제작경과도 궁금해 김운성·김서경 작가 부부를 만났다.

▲ 사진 왼쪽부터 거제 소녀상, 서울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미국 글렌데일 시립 중앙도서관 앞 소녀상.     


그래 내가 할 일 하는구나

어떻게 소녀상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는 민족미술인협의회에서 오래 전부터 참여를 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마음의 빚이 있었죠. 그래서 정대협에 찾아 갔어요. 마침 정대협도 수요집회 1,000회가 다가오니까 이런 부분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맞아 떨어진거죠.

소녀상을 제작하고 세우면서 고민이 적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렇죠, 일본대사관 앞인데. 공공도로이고 허가를 받지 않은 상황인데. 그래도 누가 잡혀가든 합시다. 우린 무조건 하겠다는 생각이었죠. 오전 7시에 세웠어요. 깜깜한 시간이었죠. 엄청 추운 날이었어요.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게 처음이었어요. 기자들 플래쉬 세례가 쏟아지는데, 99% 일본기자였어요. 소녀상을 앉히려는데 일본 방송국에서 현장생중계를 해요. “그래 내가 할 일 하는구나, 뿌듯했어요.”

– 소녀상 디자인은 어떻게 태어났나요?

그건 정대협과 협의하면서 만들어졌어요. 처음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죠. ‘기림비처럼 세우자, 바닥에 까는 것도 생각하고. 정 안되면 안중근 의사 저격 현장 표지판처럼 하자.’ 그러다가 우리 쩨쩨하게 하지 말고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 들었죠.

작가들은 이런 숙제가 떨어지면 온갖 고민을 해요. 빈의자를 놓을까, 꽃신을 놓을까, 작은 비석으로 할까. 그 와중에 김서경 작가가 작은 소녀상을 만들어 왔어요. 할머니가 끌려가던 때는 소녀였거든요. 다른 아이디어가 다 필요 없어졌어요.

소녀상에 빈의자, 꽃신, , 단발머리 등 여러 가지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하던데?

처음부터 계획적인 건 아니었어요. 처음 합의된 건 소녀의 모습 정도였어요. 나머지는 작가의 몫이었죠. 몰입을 하며 진행하다 보니 하나하나 감정이입 되면서 만들어진 거죠. 작업을 하며 느낌이 생겨요.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하나하나 첨부된 것이죠.

일본의 압력이 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그래서 포개져 있던 손 모양이 주먹으로 바뀌었죠. 주먹이 분노도 표현하지만 다짐도 표현하죠. 끝까지 해결하자는 의지. 그런 것이었죠.

작품은 작가를 닮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소녀상의 얼굴은 김서경 작가를 닮았다. 굳게 다문 입매는 판박이다. 작가는 소녀상은 할머니들의 마음이 저희 손을 빌려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할머니들의 마음이 작가의 마음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작가의 손에서 흙으로 빚어진 것이다.


일어선 소녀상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네 곳에 소녀상이 세워졌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립공원, 경기도 고양시 호수공원에 이어 지난 113일 거제시 문화예술회관 소공원에 소녀상이 세워졌다.

최근 거제에 세운 소녀상은 일어선 모습이다. 이유는?

바람 때문입니다. 3가지 바람이 있어요. 미국 글렌데일 소녀상을 철거하려는 바람, 일본의 우경화 바람, 또 하나는 교학사 교과서로 대표되는 수구세력의 광풍. 그러한 바람에 정면으로 맞닥뜨리며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언제까지 다소곳이 앉아있을 수만은 없죠.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새를 두 손에 감싸 들었죠.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일제 만행을 꾸짖으며,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파랑새를 보호하는 이미지를 표현했어요.

   

– 작가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와 일본은 차이가 있어요. 우리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대목에서 김운성 작가의 어조가 굳어졌다.) 일본이 위안부, 독도 등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저급해요. 기껏해야 말뚝 박고, 봉지 씌우고.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문화예술적으로 성숙해 있어요. 이런 문제에 대해 일본도 인본적으로 고민하고 인권적으로 생각하게 해야 합니다. 민족문제를 문화적으로 풀어낼 때 대중적으로도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문기 선생님 동상 진행 상황은?

새로운 작업실을 준비하고 있어요. 2월 내로 마치고, 3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지금은 구상을 하고 있어요. 구상의 기본은 소녀상과 같아요. 친근하게 일반에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그 시대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기본일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에 세우기 때문에 아이들과의 친밀감도 생각해야 할 것 같고. 조문기 선생님 회고록을 읽었어요. 부민관 의거, 그 결연함을 표현해 내는 것도 고민입니다.


앞으로의 구상은?

전 세계에, 특히 모든 국가의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세우고 싶었어요. 외교적인 문제가 이렇게 복잡할지 몰랐네요. (웃음) 해외 뿐 아니라 국내 어디라도, 북한이라도 의뢰가 온다면 세울 의향이 있어요. 위안부 문제를 알릴 수 있는 곳, 어디라도. 작가들은 오래전부터 민족문제연구소의 팬이라고 했다. 특히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와 민족미술인협의회가 함께 진행한 일본군 위안부와 조선의 소녀들전시회를 계기로 연구소에 대한 신뢰, 애착이 더욱 강해졌다고 한다.

두 사람은 대학 때부터 캠퍼스 커플이었고, 지금까지 언제나 함께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다고 한다. ‘어려울 때는 가족들 등 쳐먹었죠라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작가들을 보며, 인터뷰하는 내내 동료로서의 신뢰감과 함께 부부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 <2014-02-11>

Interview by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 권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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