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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누가 쐈나? 이토의 마지막 말” 안중근의거 상세묘사 1909년 싱가포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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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기 위해 전날 오후 7시에 하얼빈역에 잠입했으며 이토는 저격전 30분간 러시아의 코콥초프 재무장관과 기차에서 대화를 나눈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기(3월 26일)가 다가오는 가운데 저격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사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909년 11월18일 발행된 싱가포르 프리프레스는 ‘이토 백작 피살 상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포함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또한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저격 다음날인 1909년 10월27일 로이터 송고기사를 통해 저격 속보를 전했고 11월10일엔 “30대로 알려진 한국인 저격자는 양복 차림이었고 저격 직후 ‘한국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다“는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사진은 1909년 11월18일 싱가포르 프리프레스. 2014.03.25. <사진=싱가포르 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2014-03-25

 

안중근의사 회색양복 차림..다른 일본인 치명상 피해 조준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기 위해 전날 오후 7시에 하얼빈역에 잠입했으며 이토는 저격전 30분간 러시아의 코콥초프 재무장관과 기차에서 대화를 나눈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기(3월 26일)를 하루 앞둔 가운데 저격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사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909년 11월18일 발행된 싱가포르 프리프레스(The Singapore Free Press and Mercantile Advertiser)는 ‘이토 백작 피살 상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일부 새로운 사실들을 포함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신문에 따르면 이토는 1909년 10월26일 장춘에서 기차를 타고 오전 9시경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당초 이토는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콥초프를 만나기 위해 플랫폼을 걸어가다 저격당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신문은 코콥초프가 열차안에 들어가 이토와 30분간 대화했다고 보도했다.

대화를 마치고 이토는 열차앞에 기다리던 러시아와 중국 영사 등의 영접을 받았다. 이어 도열한 러시아와 중국 군인들을 사열을 받았고 양 옆에는 코콥초프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가 있었다. 일본 남만주철도 사장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是公)와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등 수행원들이 뒤를 따랐다.

이토가 일본인 환영단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돌연 몇걸음 뒤로 물러섰다. 회색 양복차림에 모자(shooting cap)를 쓴 23세의 한국인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7연발 리볼버권총으로 불과 5피트(약 1.5m) 앞에서 3발을 이토의 가슴과 복부를 향해 쏘았다.

곁에 있던 나카무라 사장이 쓰러지는 이토를 잡았다. 이토는 “내가 당했어”라고 신음을 토했다. 차츰 안색이 창백해진 이토는 급히 열차안으로 후송됐다. 그곳에서 이토는 “누가 쐈나? 모리(비서관)도 맞았나?”하고 물었다고 전했다.

몇 분 뒤 그는 의식이 혼미해졌고 결국 30분만에 사망했다. 싱가포르 프리프레스에 따르면 안중근의사는 9시30분경 저격을 감행했고 이토는 10시경 숨진 것으로 파악된다. 결정적 사인은 오른쪽 폐를 관통한 것이었다.

안중근의사는 이토 저격후 세발을 더 발사, 옆에 있던 가와카미 총영사의 오른팔을 맞췄고 남만주철도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이사는 오른발을, 모리 비서관은 오른팔을 맞춘 것으로 나타났다. 안중근의사가 대한독립군 참모중장으로 전투경험이 풍부한 군인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이토를 정확히 조준 사살했으며 나머지 세발도 일본인사들만 겨냥, 치명상을 입지 않도록 하는 등 놀라울만큼 침착성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기 위해 전날 오후 7시에 하얼빈역에 잠입했으며 이토는 저격전 30분간 러시아의 코콥초프 재무장관과 기차에서 대화를 나눈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기(3월 26일)가 다가오는 가운데 저격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사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909년 11월18일 발행된 싱가포르 프리프레스는 ‘이토 백작 피살 상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포함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또한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저격 다음날인 1909년 10월27일 로이터 송고기사를 통해 저격 속보를 전했고 11월10일엔 “30대로 알려진 한국인 저격자는 양복 차림이었고 저격 직후 ‘한국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다“는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사진은 1909년 10월27일 스트레이츠 타임스. 2014.03.25. <사진=싱가포르 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2014-03-25

싱가포르 프리프레스는 “저격자는 현장에서 붙잡힌 후 전날 오후 7시에 겐산과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 하얼빈에 들어왔으며 이곳에 온 목적은 수많은 한국인들을 살해한 이토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면서 “그는 체포직후 아주 평온한 모습이었으며 두려움의 빛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을 하기를 거부했다”고 덧붙였다.

이번 기사자료를 발굴한 재미언론인 문기성씨는 “안중근의사의 나이를 실제보다 8살 적게 표기하긴 했지만 싱가포르 프리프레스는 이토가 저격직전 코콥초프 장관과 열차회담을 가졌다는 사실과 죽기 직전 남긴 말, 4명이 어떤 부위에 총을 맞았다는 내용, 안중근의사의 양복색깔 등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매체보다 상세하게 보도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뉴욕타임스가 이듬해 8월 일본옷을 입은 안중근의사의 저격 삽화를 그린 것과 관련, “미국에서 공개된 저격 동영상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큰 뉴욕타임스가 굳이 일본인 복장으로 그린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서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빼앗은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겠냐”고 분석했다.

프리프레스 외에도 싱가포르 영자신문들은 안중근의거에 관한 속보를 지속적으로 보도됐다. 저격 다음날인 10월27일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로이터 송고기사를 통해 이토 저격 사실을 급전으로 전했고 11월10일엔 6면에 “30대로 알려진 한국인 저격자는 양복 차림이었으며 저격 직후 ‘한국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다“는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당시 싱가포르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던만큼 세계 정세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제국주의 일본의 최고위 정치인을 사살한 안중근의사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뉴시스> 2014-03-25

기사원문: [단독]“누가 쐈나? 이토의 마지막 말” 안중근의거 상세묘사 1909년 싱가포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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