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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언제까지 미룰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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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어머니가 해준 흰 모시를 차려입은 그이의 낯빛은 약간 창백해 보였지만 충분히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듯했다. 교도소장은 사형집행문을 낭독한 후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전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남길 말은 없으며 다만 지금 이곳에 있는 일본 관리들이 동양의 평화를 위해 끝까지 노력해줄 것을 당부했다. 마지막 기도가 허락되자 그는 잠시 기도를 올렸다. 올가미가 목에 걸렸고 마침내 사형이 집행됐다. 15분 후 검시의사의 확인 아래 시신은 교도소측이 준비한 관에 입관, 교도소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조도선과 우덕순 유동하 등 함께 거사를 행한 3인의 동지들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도록 허용됐다. 우덕순은 아주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오후 1시 시신은 공동묘지에 매장됐다.’ <1910년 4월14일 스트레이츠 타임스>

3월26일,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지 104번째 기일을 맞는다. 그러나 임의 유해는 104년이 지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조국이 해방되면 유해를 조국의 강산에 묻어달라고 한 유언을 해방 70년을 맞는 오늘까지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정부가 유해발굴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난 2008년 이명박정부 시절 중국정부의 협조 아래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작업을 29일간 벌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중국 뤼순 형무소의 소장 딸이 자신이 갖고 있는 자료를 통해 안 의사가 묻힌 추정지점을 형무소 바로 위의 북쪽이라고 증언했지만 10살 때의 기억에 의존한 발굴은 애당초 무모한 것이었다.

정작 유력한 유해 추정지는 평생을 안중근 유해 찾기 사업에 헌신한 김영광 전 의원(타계)으로부터 나왔다. 안중근의사숭모회 부이사장이기도 했던 그는 유해를 찾기 위해 한·중수교 전인 80년대 몰래 중국 뤼순으로 건너갔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묘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발견했다. 형무소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야산이었다.

이와 관련, EBS는 2010년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기를 맞아 특집 다큐를 통해 유해 매장 추정지를 처음 공개했다. 이 지역이 유력 매장지로 부각된 것은 안중근의사 묘역 위치를 직간접으로 알고 있는 신현만, 김파. 이국성 씨 등 3명의 증언자가 한결같이 지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도왔던 유동하 열사의 외조카 김파 선생은 지도까지 그려가며 이 지역을 찾는데 결정적인 제보를 했고 ‘안중근지묘’라는 나무 팻말이 한동안 붙어 있었다는 증언 및 기타 관련 자료들도 새롭게 발견됐다.

 

 

소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 안중근의사의 묘를 찾았다는 중국동포 이국성씨도 묘 위치를 구체적으로 증언하면서 앞에 돌로 열 ‘十’자’를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2011년 출범한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대표 안태근)는 서로 안면도 없는 세 사람이 동일 지역을 ‘안중근 의사의 무덤’으로 지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발굴을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2차 발굴 작업은 기약 없는 가운데 추정지역 코앞까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어 이러다 영원히 발굴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추가 시도를 위해선 중국 당국의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순국 104주기를 맞는 올해야말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에 나설 결정적인 시점으로 판단되고 있다.

올들어 하얼빈역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들어선 것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등 일본의 수정역사관에 대항하여 한·중 양국은 어느 때보다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더불어 북한도 황해도가 고향인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1970년대부터 관심을 표명한 만큼 3국이 공조하는 유해발굴 프로젝트를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앞장서야 할 때라는 것이다.

 

올 들어 뉴시스의 기획보도시리즈를 통해 ‘안중근 의거’가 아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 대양주 등 전 세계에 걸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감옥에서 집필하던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기 위해 사형집행이 늦춰진다는 내용이 미 전역에 보도되면서 그 시절 미국인들은 안중근의사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이미 한 세기 전에 동북아의 ‘통합과 연대’의 길을 제시한 선각자적인 혜안으로 평가되고 있다. 감옥이 있던 뤼순(旅順)을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만들고, 한·중·일 공동군대를 편성하고 공동은행을 세워 공용화폐 발행을 주창한 것은 오늘날 EU와 같은 지역경제 공동체를 제안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안중근의사는 한 나라의 애국지사를 넘어 동양평화를 부르짖은 아시아의 영웅이요, 나아가 세계사에서도 평가할만한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뤼순형무소의 일본인들이 수감된 안중근의사의 고결한 성품과 대의명분에 감화돼 존경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의 사찰 다이린지(大林寺)에는 안중근 의사의 위패가 뤼순형무소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의 위패와 함께 나란히 모셔져 있다. 지바는 안중근의사가 옥중에서 쓴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유묵을 받아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그뿐인가. 이토의 저격 당시 옆에 있다가 발에 총을 맞은 남만주철도의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이사는 일본 기업인 안도 도요로쿠(安藤豊祿)가 1984년에 펴낸 회고록에서 “안중근의 늠름한 모습과 유연한 언행, 달려든 헌병이나 경찰에게 총알이 아직 한 알 있음을 주의시키는 태도 등은 인격의 높이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안중근”이라고 말한 내용이 최근 국내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국적(國賊) 1호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천 엔 지폐에 실렸을 만큼 일본에서 여전히 숭모되고 있다. 우리 민족사의 영웅이 대한민국 지폐에 실린 것은 고사하고, 불비한 역사교육으로 안중근의사를 안과의사로 착각하고 유해조차 찾지 못하는 통탄할 현실을 언제까지 방치할텐가.

올해는 기필코 효창원에 있는 안중근의사의 빈묘(虛墓)에 유해가 봉환되기를 간절히 희구해본다.

“내가 죽거든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조국이 독립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라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안중근의사의 마지막 유언>

뉴시스 <2014-03-25>

기사원문: [특파원칼럼]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언제까지 미룰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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