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들은 목숨을 걸고 봉기했나’ 화두 삼아 / 서울 남산에 ‘전봉준 장군 동상’ 세우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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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자 이이화 씨가 ‘전북일보 리더스아카데미 강좌’에 연사로 초대돼 동학혁명 관련 특강을 하고 있는 모습. | ||
동학농민혁명 2주갑은 그 자체가 역동적인 역사였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혁명 1주갑이었던 1954년 당시까지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별 울림을 주지 못했다. 우리 역사상 최대 민중항쟁이었던 그 역사가 전면에 부상한 것은 고작 100주년에 즈음해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역사의 베일을 벗기려는 노력이 있었고,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흐름을 타고 학계의 재조명 작업이 내부적으로 진행됐지만, 대중적 관심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직도 많은 과제를 앞에 두고 있지만, 오늘의 모습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우리 앞에 서기까지 연구자들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역사찾기’를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본 기획에서 혁명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묻혀있던 자료를 찾아내고, 현장을 누빈 연구자와 활동가를 만난다. 이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역사학자 이이화(77)는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전봉준 장군처럼 키가 작고, 목소리가 크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기질과 비슷해서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찾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많은 활동을 한 것이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30대 때부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과 연구활동을 바탕으로 1989년 역사문제연구소 부설로‘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는 등 책과 현장을 넘나들었다.
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후 관련 공식 직함은 없지만, 2주갑은 그를 현장으로 다시 불러냈다. 지난 20일 기념재단에서 제작하는 홍보영상물 촬영을 위해 정읍을 찾았고, 전북일보 리더스아카데미 강좌에 연사로 초대돼 관련 특강을 했다. 이달 중 경북 영덕과 전남 무안에서 특강도 잡혀 있다.
그는 현재 동학농민혁명의 대중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런 일련의 활동 역시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대중화 작업으로 여긴다.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나 배경이 있었다면.
“늦은 나이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광주고)을 마쳤습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서 문학도의 꿈을 키우던 중 참기름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위암으로 쓰러지면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틈만 나면 국립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이 때 역사학도가 될 것을 결심했어요. 그런데 80년대 암흑의 시대, 역사학자로서 무슨 역할을 할까. 그리 자문하면서 동학 관련 연구서와 자료들을 찾아보고 답사를 다니며 ‘왜 이들이 목숨을 걸고 봉기했을까’를 화두로 삼게 된 것이죠.”
-당시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접근했나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있을 때 규장각에서 수집했던 자료를 검토하고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특히 젊은 연구자들과 답사팀을 꾸려 전라도·경상도·충청도·경기도·강원도까지 유적지를 탐방했고, 유족이나 관련자를 찾아 증언을 들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오늘의 역사로 서기까지 선생님의 공적인 많은 데, 그 역할을 자평하신다면.
“공로자라고 해서 원광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고 녹두대상도 받았지만, 운동은 혼자 하는 게 아닌, 같이 하는 것입니다. 특별법 하나만 봐도 연구자와 단체, 국회의원들이 힘을 합해 뜻을 모아 이룬 것 아니겠습니까. 2주갑을 맞아 돌아보면 몇 가지 큰 진전과 성과에 자부심을 갖기도 합니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30권의 사료총서를 내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토대를 제공했고, 특별법을 만들어 법적으로 참여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특별법에 바탕을 둔 재단 발족으로 혁명의 지속적인 조명과 선양사업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유족회 발족도 성과였습니다.”
-그간의 연구를 평가한다면.
“제 개인적으로는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된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을 정창렬 교수와 함께 찾아낸 것입니다. 그러나 매천의 며느리가 기증한 원본 중 의병 부문은 전주대 호남학연구소에 잘 보관돼 있으나, 동학 관련 부분의 원본이 사라져 애석합니다. 100주년을 전후해 국내 자료가 많이 발굴됐으며, 전북일보의 발굴 사료인 전봉준의 제자가 기록한 〈석남역사〉(박문규) 역시 귀중한 사료로 평가합니다. 다만, 일본 자료가 아직도 많이 발굴되지 않아 관심이 필요합니다.”
-기념재단 이사장 혹은 연구자로서 그간의 활동에 아쉬운 점도 있을 텐데요.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 후 동학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제작이 안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100주년때 거의 모든 신문들이 연재물로 다루었고, 지상파 방송에서도 4부작 혹은 5부작 다큐로 제작했지만, 대중화를 위한 노력은 부족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수미의 ‘파랑새’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조수미 씨에게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문학, 음악, 연극,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예술적으로 대중화 하는 작업이 따라야 합니다.”
-대중화를 위한 개인적인 계획이나 욕심이 있다면.
“서울 남산에 안중근·김구 동상이 있습니다. 여기에 동상 하나를 더 세우고 싶은 데, 그게 전봉준 입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친하지만, 친분으로 되는 것이 아니죠.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한 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보람 있는 일로 꼭 이루고 싶습니다. 그것은 서울 남산에 또 하나의 동상 하나가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이 국민적 정신으로 우뚝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2주갑을 맞아 기념사업들이 활발히 준비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방향은.
“과거 추모제로 치러졌던 기념사업이 축제적으로 접근하는 분위기 입니다. 잔이나 올려놓고 제의적로 치렀던 형식적인 의례에서 벗어나 다양하게 기리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합니다. 다만, 지역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기념사업이 결코 밥그릇 싸움이 돼서는 안 됩니다. 특히 동학기념일 제정은 혁명의 대중화와 국민적 인식 제고, 사업의 집중화를 위해 아주 중요한 데, 지역이기주의로 흘러 안타깝습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과 관련, 그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대신 대다수 학자들이 무장기포일에 손을 든 상황에서 우금치전투 패배일이 어떻냐고 조크를 했다고 했다.)
-2주갑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주시죠.
“동학농민혁명은 대내적으로 평등, 대외적으로 자주를 부르짖었고, 북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남으로 여수 진주까지 떨쳤습니다. 토지제, 신분제, 남녀차별 등 전근대적인 사회구조를 바꾼 일대 혁명이었고, 그 정신은 미래로 가는 빛입니다. 그 역사에 대한 이해와 의미를 아는 것이 혁명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 역사운동가 이이화 씨는 발로 뛰는 ‘민중사학계 거목’
이이화 씨는 발로 뛰는 역사운동가다. 그의 관심 영역은 민중이다. 역사학자로서 처음 이름을 올린 것도 신분차별의 타파를 내세운 허균에 관한 연구였고(1973년 창작과비평에 발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과 친일인명사전편찬 등에 깊이 관여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의 관심을 피해가지 못했다. 동학에 대한 관심 역시 같은 맥락에서다.
발로 뛰는 사학자는 8순을 눈 앞에 뒀지만, 지금도 현장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술과 담배도 그의 오랜 친구다. 그와의 인터뷰도 늦은 저녁에 전주의 한 가게맥주 집에서 진행했다. 필름통 잿털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대구 출신의 그는 전북과 특별한 인연은 특별히 없지만, 동학을 고리로 오랜 세월 많은 인연을 쌓았다.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이 지난 뒤 관련 일을 떠나 장수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공저를 포함해 100여권의 책을 냈다. 그의 대표작인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전 22권)는 9년간의 집필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녹두장군, 전봉준〉 〈평등과 자주를 외친 동학농민운동〉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 10권〉를 비롯,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만화 한국사〉(전 9권) 〈평등과 자주를 외친 동학농민운동〉 등이 그의 저서다.
많은 역사서를 내고도 그의 책 발간에 관한 허기는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사를 정식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너무 헤프게 쓴 것 같다는 반성을 달고서다. 경기도 파주로 거처를 옮긴 것도 그 때문이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손을 대지는 못했단다. 그의 혁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전북일보 <2014-03-28>
☞기사원문: [(12) 동학 연구·활동가들 – 이이화] “동학, 드라마·영화화…다양한 예술장르로 대중화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