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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친일경찰, 광복군 장군의 뺨을 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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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⑧]해방 후 친일파 득세…의열단장 끝내 ‘평양 행’

▣해방된 조국에서 수모를 당한 의열단 단장 

 

1947년 7월 17일 남산공원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환영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사진=시대의 창 제공)

중국에서 27년간 무장투쟁을 벌인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김원봉은 해방 후 석달이 지난 1945년 12월 1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분단된 한반도에서 그의 앞길에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와 갈등을 빚은 김원봉은 임정을 탈퇴하고, 좌우합작 운동에 주력했다. 이마저 여의치 않자 중간파를 이끌고 좌익계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이 시작됐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자 그 배후로 몰려 성북경찰서에 연행 구금돼 친일경찰들한테 폭행을 당했다. 이어 공공연한 협박은 물론 테러 위협까지 받자 중국에서처럼 거처를 수시로 옮기고 잠행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월북을 결심한다.

김원봉은 남북에서 정부가 수립되기 전 마지막 회담인 평양의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남았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김원봉이 북한을 선택한 건 친일경찰 노덕술의 폭력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경찰서에 붙잡혀가 대표적인 악질 친일파 노덕술한테 뺨을 맞고 욕설을 들었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고 모욕을 당했으니…. 의열단 활동을 같이 했던 유석현 집에 가서 꼬박 사흘간 울었다.”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은 누구인가? 

친일파의 원류…한일합방에 찬성한 내각 각료들이 일본 견학 당시 찍은 사진. 1910년 10월 12일 조선총독부는 매국 친일파 76명에게 공, 후, 백, 자, 남작의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지급했다. (사진=권태균 신구대 교수 제공)

해방 후 1주일동안 전국에서 경찰관에 대한 군중들의 폭행사건이 177건 발생했다. 이 가운데 111건이 조선인 경찰에 대한 보복이었다. 침략 당사자인 일본 경찰보다 조선인 경찰을 더 미워한 것은 그들이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인물이 노덕술이다. 

그는 일제하에서 경찰로 일하면서 체포된 학생, 사회주의 운동가, 신간회 간부 등 나이, 성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다. 그 결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다가 또는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인물이 미 군정청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변신해 평생을 의열단원과 광복군과 함께 총을 들고 일본과 싸운 의열단 단장의 뺨을 갈겼으니 그 심정은 어땠을까?

▣해방 후 다시 마주친 독립운동가와 친일군경

김원봉보다 더 기막힌 사연은 많다.

여성 독립운동가(1900~1991) 정정화는 상해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려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가 부역죄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구타를 당했는데,자기를 때리는 경찰관이 일제 때 자기를 구속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일제 말인 1943년 합천독서회 사건으로 구속돼 1년여 동안 감옥에 있었던 이구영(1920~2006)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가 1958년 7월 남파공작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접선에 실패하고 2달만에 부산에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를 체포한 형사 역시 일제시대에 그를 고문했던 형사였다.

저명한 언론인이자 문인인 송지영씨의 사연도 기구하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와 연결된 혐의로 1944년 2년 선고를 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 있다가 해방 후 출소했다. 그는 국내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활동하다 5.16 쿠데타 직후 민족일보 사건과 관련돼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 그를 살리기 위해 국제 엠네스티는 물론 문인과 언론인 104명이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박창암 혁명검찰부장에게 제출했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나와 만주군 장교로 일했던 인물이고, 박창암은 우리 독립군을 잡기 위해 만든 간도특설대 출신의 친일파다. 서명을 해주던 문인과 언론인들 모두 혀를 찼다.

“독립운동가가 친일파들한테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세상이 됐구나.” 

왜 이런 비극이 벌어진걸까?

어느 나라건 외세로부터 해방되면 국가건설과 함께 2가지 일에 착수한다.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을 거둔 애국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식민지 시절 동포를 핍박한 매국노를 처단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 두가지 과제 수행에 실패했다. 나치 독일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드골장군은 적에게 협력한 군인, 경찰에 이어 문인과 학자, 언론인 1만명을 체포해 대부분 교수형대로 보냈다.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일부 주장에 대해 그는 “위대한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타락시킨 매국노를 처단했을 뿐이다.” 

※노컷뉴스<2014-04-02>

기사원문: ☞ 악질 친일경찰, 광복군 장군의 뺨을 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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