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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은 우금치전투에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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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칼럼>  호남뿐 아니라 전국 항쟁 마지막 우금치 격전 뒤에 이듬해까지 항전 이어져


기고: 신명국 원광학원 이사장


1990년 무렵,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관련 시군이나 광역 단체장들을 만나 기념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당시 단체장들의 공통된 첫 반응은 ‘동학 기념사업은 정읍의 일인데 왜 우리가?’ 라는 태도여서 매우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이켜 보니, 전라도 충청도 각 시군에서는 ‘왜 우리가?’라는 질문은 없어진 것 같아 다행스럽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러한 대중인식은 학계의 연구 부진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5·16정부가 이른바 ‘5·16혁명’을 정당화 하고자 교과서에 ‘동학란’이라는 사건 명칭을 ‘동학혁명’으로 바꾸면서 이 사건을 정읍에 한정된 사건으로 축소시키고자 한 의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120년 전 갑오년에 일어난 사건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상(歷史像) 사이에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 사건에 대한 대중의 역사인식은 전적으로 국사교과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다음 두 가지 점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첫째로 전봉준과 호남 중심의 사건 인식을 탈피해야 한다.

이 사건의 발단은 고부였고 그 중심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 농민들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호남 농민들이 전주성을 점령할 무렵부터 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가을봉기 때에는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까지 확대되었고 이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군 주력과는 별도로 활동하였다. 충청도 서북부 지역에서 모인 3만여 명의 농민들은 태안에 집결하여 서산 홍성전투를 치르고 당진 예산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또한 황해도 지역 농민들은 해주성을 점령하고 이후 황해도 일대에서 1개월 이상 전투를 계속하였다. 그 외에도 경상도 김천 상주 예천 안동 지역과 하동 진주 산청 지역에서, 강원도 홍천 강릉지역에서도 대규모 봉기가 잇달았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을 호남지역의 사건으로만 생각하는 대중인식을 바꾸려면 각 지역 농민항쟁의 전모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둘째로는 우금치전투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금년에 새로 발행된 국사 교과서에서 조차도 동학농민혁명은 우금치전투에서 패하고 농민군 지도부가 피체됨으로써 끝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금치전투 이후 일본군의 농민군 진압작전이 본격화되면서 각지의 농민군들은 오히려 더 치열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 대표적인 전투가 장흥전투와 보은 북실전투였다. 장흥에서는 1895년 초에 3만 이상의 농민들이 참여하여 일주일 이상 계속된 장흥전투에서 장흥부사가 전사하고 100여명의 관군과 1500여명의 농민군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그 외에도 황해도 지역 역시 을미년 초까지 전투가 계속되었고 남해안의 섬지역이나 완주의 대둔산으로 들어간 농민군도 이듬해 2월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따라서 갑오년 농민군들은 우금치 전투 이후 이듬해 2월까지 더욱 격렬한 항전을 계속하였고 그 후 산발적인 전투는 이해 7월까지도 계속되었다.

120주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은 호남만이 아닌 전국적인 농민항쟁이었고, 우금치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듬해 2월까지 대규모 항전을 계속했던 사건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 물론 그 정신은 갑오년 참여자였던 김구나 한용운의 예에서 보듯이 의병운동이나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후 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전북일보<2014-03-30>


기사원문: ☞ 동학농민혁명은 우금치전투에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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