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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피폭자들 지원대상서 빠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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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귀훈(90)씨
원폭 피해 승소 끌어낸 곽귀훈씨


“피폭자는 어디 있어도 피폭자”

12년 전 일본 정부 상대로 이겨

일본 바깥 거주 5000명 지원받아

‘나는 한국인 피폭자다’ 책도 내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다.”


곽귀훈(90·사진)씨의 이 한마디에 일본 재판소는 할 말을 잃었고, 일본정부도 상고를 포기하고 무릎을 꿇었다.


지난 4일 성남시 야탑동 자택을 출발해 홀로 서울 공덕동의 <한겨레신문사>를 찾아 온 구순의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곽씨는 너무나 정정했다. “그때 내가 그랬지. 오사카 공항에 들어가면 피폭자가 되고 공항을 나가면 피폭자가 아니냐. 아침엔 피폭자고 저녁엔 피폭자가 아니라는 법이 무슨 법이냐?”


그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단독으로 ‘피폭자 자격 확인소송’을 제기한 게 1998년이었고, 판결이 최종 확정된 건 2002년 12월18일이었다. 일본에 살지 않는 외국인 피폭자도 일본 원호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그런 류의 소송에서 거의 유일하게 승소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피폭 관련 소송의 흐름과 피폭에 대한 관념까지도 바꿨다. 그 다음해 3월부터 일본 바깥에 사는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에게도 건강수첩이 발급되고 일본후생성으로부터 연간 의료보험료 개인부담분과 월별 건강관리수당도 지급받을 수 있게 됐다. 한국 거주 피폭자 2700명과 미국 거주자 1000명, 브라질 거주자 2000명 등 약 5000명이 혜택을 받았다. 그 전까지 일본 정부는 일본 국외 거주 피폭자들을 원호법 적용대상에서 제외했다가, 한국인 피폭자 손진두씨 등의 소송을 거치면서 일본 입국 치료자에 한정해서 적용하는 쪽으로 개선했으나, 대다수 국외거주 피폭자들은 여전히 거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북에 생존해 있는 수백명의 남쪽 출신 피폭자들이 아직까지 지원대상에서 빠져 있어서 안타깝다”고 곽씨는 말했다.


얼마전 곽씨는 그 재판사건을 포함해 출생 이후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정리한 회고록 <나는 한국인 피폭자다>(민족문제연구소 펴냄)를 출간했다. “오래 전부터 후세에 진실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다. 일본이나 우리나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엇이 사실이고 진실인지 잘 모른다.”


전주사범학교를 다니던 곽씨는 1944년 9월 일제의 징병 1기생으로 히로시마 서부 제2부대에 강제징집당했다. “1945년 8월6일 원폭이 떨어졌는데, 원래 폭심지에서 750미터 정도 떨어진 부대에 있던 나는 바로 그 전날 폭심지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겨갔다. 그 덕에 살았다. 죽지 말라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죽다가 살았다. “그날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는데, 왼편 약간 앞쪽 방향에서 눈부신 섬광이 번쩍였고 왼쪽 턱과 왼팔, 등쪽이 완전히 타버렸다. 세상이 캄캄해졌고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희미한 시야 속에 방공호를 더듬어 찾아들어갔는데, 그때야 내 등에 불이 붙어 있는 걸 알았다.” 치사량 수준의 방사선에 피폭당했으나 그는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무지의 피폭자”였다. 그 무지가 오히려 그를 살렸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매일 5~6명씩 죽어나가는 임시 일본육군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으며, 미군 함포사격 소리에 사흘만에 의식을 회복한 그는 “살이 허물어지고 구더기가 끓는 지옥”의 위기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해 말 귀국해 그 다음해 고향 초등학교 교사가 된 그는 동국대 사대부속고등학교장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교직에 종사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징병과 원폭 피해의 상흔들을 숨기지 않고 공론화하는 작업을 계속했고 그것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곽씨는 책 자료를 자신이 직접 챙겼고 3개월 가량 걸린 집필작업도 컴퓨터 자판기를 손수 두드리며 직접 했다. 지금도 안경을 쓰지 않고 아침 신문을 본다. 청력은 5년쯤 전부터 많이 떨어졌지만, 매일 탄천에 나가 4~10㎞씩 걷는다. 대한산악연맹 결성 멤버일 정도로 등산도 열심히 다녔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명예회장으로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서울 미아리에 있는 협회 사무실에 나가면서 강연도 한다. “지금도 일본어든 우리말이든 4시간 정도는 계속 얘기할 수 있다.”


일본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피스보트도 지금까지 5번이나 탔다. “인도와 파키스탄, 아프리카, 밴쿠버, 유엔본부, 남태평양 타히티까지 초청받아 갔다. 주로 핵 문제 얘기하러 간다. 내가 피폭자인데다 핵에 대해서는 남보다 좀더 공부를 했다. 나는 철저히 반핵이다. 해마다 히로시마 반핵평화집회에도 초청받아 가는데, 올 8월에도 간다.” 한국에선 오히려 별로 대우를 못받지만 “바깥에 나가면 제법 무게가 있다”고도 했다.


곽씨는 지금은 아픈 데도, 피폭 후유증도 없다고 했다. “피폭자들 평균수명이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길다고 하더라.” 그는 “원폭의 섬광 때문에 몸에서 나쁜 게 나 타버려서 그렇다고 얘기한다”며 껄껄 웃었다.


곽씨는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사고 뒤에 한동안 주춤하다가 다시 원전 재가동 쪽으로 가는 걸 크게 걱정했다. “원전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야. 반감기가 수십만년이나 되는 방사능 폐기물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중국도 400기나 원전을 지을 것이라는데, 황사나 미세먼지 날아오는 것 보고 있지만, 중국에서 원전사고가 나면 다 이쪽으로 날아올 텐데…. 아직도 수만 기가 있다는 핵무기도 어떤 정신나간 자가 의도적으로 그러든 실수로 그러든 단추 잘못 누르면 끝장인데…”


<2014-04-06>한겨레


☞기사원문: “북한 피폭자들 지원대상서 빠져 안타깝다”

※ 관련기사

☞연합뉴스: “온통 불덩어리로 변한 히로시마는 지옥의 모습” (2014.02.23.)

☞한겨레: 엄마는 다리를 못 썼고 아들은 뇌성마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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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한국인 피폭자다 – 원폭피해자 곽귀훈의 삶과 투쟁

저자 곽귀훈 l 출판사: 민연 l 15,000원 ㅣ283page l 2013.12.31 l ISBN 9788993741117


원폭피해자운동의 산증인 곽귀훈 선생은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죄로 징병1기로 끌려갔고, 히로시마에서 원폭피해까지 입은 이중 피해자이다. “묻지마라 갑자생”이란 서글픈 세대가 이제 구순을 맞이하는 세월이 흘렀지만, 살아남은 자는 여전히 아픈역사의 상흔으로몸살을앓고있다.징병1기생의수기나자서전이 매우 드문 가운데 자신이 겪은 피해를 당당히 밝히고 맞서 투쟁해 온 한 원폭피해자의 역정이 이 회고록에 오롯이 담겨있다.

특히 곽귀훈 선생은 한국사회가 원폭피해자를 멸시와 외면의 대상으로 치부하던 1950년대 말 한국일보에 히로시마 회상기를 연재해 강제동원과 원폭피해 사실을 공론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후 식민지배와 전후(戰後)처리 과정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 일본에 진정한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운동을 일본 시민운동가들과의 함께 꾸준히 진행해 왔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무렵이다. 많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비록 패소하더라도 법정에서 자신의 피해사실을 인정받고, 피해자 스스로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의 하나로 재판투쟁을 벌였다.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내팽개쳐진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1972년부터 제기하기 시작한 재판투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한 고발을 법정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노력들은 과거청산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자 성찰의 과정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1998년 곽귀훈 선생 자신이 원고가 되어 제기한 ‘피폭자 지위 확인 소송’은 ‘운동’적 차원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1978년 한국인 피폭자 손진두가 승소한 결과, 한국인 피폭자도 건강수첩과 건강관리수당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한국인 피폭자가 일본을 벗어나면 그 권리가 박탈되곤 했다. ‘통달 402호’라는 행정명령 때문에 한국인 피폭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제한받아 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매번 일본에 가서 다시 건강수첩을 발급받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원폭지원법에 규정한 피폭자의 권리는 ‘국적’을 불문하고 주어지는 것인데 유독 통달 402호를 빌미로 한국인 피폭자에게 차별을 두는 것은 위법이라고 제기한 것이 곽귀훈 소송이다.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다.’라는 말로 상징되는 이 소송은 2001년 6월 1일 1심에서 ‘일본국이 곽귀훈의 건강수첩 유효를 인정하고 미지급한 수당 약 116만 엔과 이후에도 수당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그리고 2002년 12월 5일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도 승소하여 일본 정부가 상고를 포기한 2002년 12월 18일 원심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한국인 피폭자도 어디에 있던 피폭자로서 자격을 유지하며, 따라서 사망시까지 일본 원호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재판결과 재외 피폭자 약 5,000명(한국 2,700명, 북한 1,000명 추산, 미국 약 1,000명, 브라질 200명)이 2003년 3월부터 일본의 원호법에 근거한 혜택을 받게 되었다.국내 원폭피해자의 경우, 2010년 현재 협회 등록 회원 2,632명 가운데 2,482명이 건강수첩을 발급받았고 건강관리수당도 수령하고 있다.

또한 곽귀훈 선생은 산악인으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대한산악연맹 창립 회원인 선생은 1950년대부터 산악운동을 전개해 등반활동을 대중화시키는데 앞장섰다. 원폭피해자가 등반대회를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그의 열정적인 이력을 따라 읽다 보면 금방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한 열정이 바탕이 되었는지 곽귀훈 선생은 40여년의 원폭피해자운동을 해 오면서 본인이 발표할 원고를 직접 작성하고, 왕성한 기고활동으로 피폭자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서 왔다. 그래서 구순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컴퓨터로 회고록 원고를 완성했다. 기록의 소중함을 몸소 실천해 온 곽귀훈 선생은 원폭피해자 소송의 성과와 원폭피해자 운동 관련 기록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관련 자료 전체를 수집하여 지난 2005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하였다.

이 또한 피해자 개인의 노력으로서 결코 작지 않은 업적이라 할 만 하다. 일제 식민지배와 강제동원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역사에 남기기 위해 이 회고록에 기울인 저자의 마지막 노력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 김승은


저자소개


저자 곽귀훈
1924년 출생


저자는 전주사범학교 재학중 1944년 9월 징병1기생으로 히로시마 서부 제2부대에 강제 징집되었다.


훈련중에 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피폭당했다. 귀국 후 45년 말부터 교육계에 투신, 동국대사범대부속중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했다.


1967년부터 피폭자 운동에 앞장선 그는 한국인 피폭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국내외에 널리 알려, 피폭자 권익을 확보하고 인권을 옹호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98년 10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피폭자 자격 확인 소송> (곽귀훈 수첩 재판)에서 승리해 한국인 피폭자 등 재외 피폭자들에게 원호법을 적용시키는 획기적인 성과를 이끌어 냈다.



목차

책을 내며 2

추천사 6

식민지에 태어나 16

일본군 생활 24

피폭 52

전쟁은 끝났지만 70

귀국 83

교육자의 길 98

산에 오르다 119

버려진 한국인 원폭피해자 137

인도적 지원의 허와 실 154

재판투쟁을 결심하다 164

한국인 피폭자와 함께 한 일본인 186

원폭피해자협회와 나 200

부록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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